도서 《일화로 보는 위인상 2》중에서
높이 내세워주신 작가-김사량
주체102(2013)년 7월 자정도 지난 어느날 밤이였다.
한대의 승용차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건설장으로 미끄러지듯 달려오더니 기념탑대문앞에 이르러 서서히 멈춰섰다.
승용차문이 열리면서
황급히 달려온 일군들이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
격해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뒤말을 잇지 못하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로획무기전시장을 찾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고나신
시간은 흘러 밤은 점점 깊어져 어느덧 새벽 2시를 가까이 하였건만
이곳에 이르신
이때였다.
김사량, 본명은 김시창.
해방전과 해방후에 애국적인 문필활동을 벌렸고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펜과 함께 총창을 틀어잡고 용약 종군의 길에 올랐던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중병으로 인해 더는 운신하기 힘들게 되자 적구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전쟁은 끝났으나 그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나의 당원증은 당중앙위원회에, 종군수첩은 작가동맹에 전해다오.
승리를 위하여, 희망을 위하여.
1950년 10월 1일 김사량》
조국에 온것은 그가 심장으로 쓴 이 글발뿐이였다.
적구에 떨어진 그의 운명에 대해서는 오래동안 누구도 알수 없었다.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 김사량의 생사여부를 두고 요설의 능수인 일본의 보수언론들은 한때 《김사량실종설》을 내돌리며 그가 복잡한 경력과 가정환경때문에 매장되였다는 괴이한 론조를 퍼뜨리기도 하였다. 또한 《전향》이요, 《변절》이요 하면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일부 편협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머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김사량을 변함없이 믿으시고 그의 명예와 가족들을 끝까지 지켜주신분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행적을 알수 없는 김사량에 대하여 못내 걱정하시며 그는 정의감이 강하고 량심적이며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고,
신념이 있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 대해같은 믿음과 사랑의 조치에 의하여 김사량이 지리산인민유격대에 들어가 출판선전사업을 책임지고 투쟁하였다는것이 알려졌고 그의 최후도 밝혀지게 되였다.
…지리산의 산과 골짜기에 《토벌》의 총포성이 멎을 날이 없던 1951년 6월 23일. 인민유격대의 초막을 발견하고 겹겹이 에워싼 적들은 총탄을 미친듯이 퍼부으며 투항하라고 고아댔다. 초막안에서 대답대신 총탄이 쏟아져나오자 악에 받친 놈들은 화염방사기로 불을 뿜어댔다.
잠시후 불에 그슬린 두 부상병이 서로 부축하며 걸어나왔다. 해병대놈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총구를 들이댔다.
순간 《
그들중의 한사람이 김사량이였다.
김사량의 영웅적인 최후에 대하여 료해하신
세계전쟁사를 살펴보면 종군한 문예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사량은
그의 고결한 생애와 빛나는 최후는
2013년 6월.
나라의 천만자식을 태양같이 따사로운 한품에 안으시고 믿어주고 내세워주며 빛내여주시는
그 은정 그 사랑에 떠받들리여 김사량의 삶은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되였다. …
깊은 감회속에 잠기셨던
《김사량은 조국해방전쟁시기
당에서는 김사량이 전사한지 6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의 위훈을 높이 평가하여 지난 6월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자폭으로 최후를 마치는 마지막순간까지 용감하게 싸운 종군작가 김사량.
그의 위훈은 공화국영웅이라는 값높은 영생의 삶을 지닌 빛나는 모습으로 오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영웅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