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가 결성된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갔다.
주체103(2014)년 7월 2일이 바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자기의 출산을 세상에 알려 고고성을 울린 때로부터 58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이날을 맞으며
나 리우갑으로 말하면 1993년에 비로소 통협이라는 《함선》에 탑승한 사람이다.
통협이라는 《함선》이 건조되여 첫 출항의 고동을 울렸을 때 거기에 타고있던 재북인사들의 년령은 평균 50대 중반에 이르고있었다. 그들가운데는 70대의 년장자들도 여럿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근 40년이 지나 통협회원이 되였으니 나에게 있어서 통협이라는 《함선》의 첫 선원들은 선배치고도 대선배가 아닐수 없다.
그들속에는 갖은 풍파와 우여곡절끝에 보천보의 총성에서 고무적힘을 얻고
배달민족의 성산
그러고보면 그 선배들이 한참 독립운동, 통일운동으로 동분서주하고있을 때 겨우 소년시절에 있었던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연혁을 론하자고 하고있으니 제3자들이 볼 때 주제넘은 일이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지러운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내가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통협의 연혁을 연구하는 과정에 새롭게 발견한것이 있다.
그것은 지심에 깊이 박고있는 통협의 뿌리이고 통협이 딛고선 초석이였다.
남조선에서 북에 들어온 정계, 사회계인사들을 망라했던 통협은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무어진 단체도 아니요, 사상루각과 같은 단체는 더욱 아니였다.
통협은 지심에 깊고 튼튼한 뿌리를 박고 정교하게 다듬은 초석우에 선 통일애국단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통협이 뿌리를 뻗칠수 있는 지심은 다름아닌
이것이 바로 내가 통협의 연혁을 연구하는 과정에 도달하게 된 귀중한 진리인것이다.
이 진리에 도달했을 때 나의 가슴을 크게 친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력사의 진리를 무시하고 진정한 통일애국인사들에게 심히 모독적인 《랍북인사》라는 감투를 함부로 들씌운 남조선의 반민족, 반통일분자들의 불법무도한 죄행에 대한 격노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남조선의 수많은 정계, 사회계의 인사들이 자기의 신념에 따라 공화국의 품에 안긴것을 두고 남조선의 반동분자들은 처음부터 《랍북인사》라고 하면서 그들의 애국심을 모독하였으며 《유신》독재자들은 《랍북인사송환운동》이라는 소동을 피우면서 그 문제를 유엔에까지 끌고가는 망동을 부리였다. 한편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현 남조선당국자들은 《랍북인사》라는 낡아빠진 곡조를 되풀이하면서 그것을
량심적이고 지조도 높고 자존심도 강한 통일애국인사들에 대한 반동들의 모독행위는 물론 론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다.
그것은 선배들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더욱 크게 해주고 인생행로에서 곡절도 많았던 선배들이 통일애국의 한길로 꿋꿋이 걸어나갈수 있게 이끌어주셨던
비록 나라의 통일을 위한 길에서 공적도 없고 필력도 무딘 내가 이런 글을 내놓는다는것에서 다소 부끄러움이 앞서는것을 어찌할수 없지만 통협회원인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력사의 소명에 따른 일로 된다는데서 힘과 용기를 가다듬으며 감히 붓을 들었다.
비록 미숙한 글이지만
1. 통협의 뿌리와 초석
내용전개에 앞서 먼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라는 단체의 머리에 명기되여있는 《재북》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이며 일괄적으로 이 단체의 회원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인 《재북인사》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를 담고있는가에 대해서부터 풀이하고 넘어가는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재북》이라고 하면 《북에 있다.》는 의미로 될것이고 《재북인사》라고 하면 《북에 주재하고있는 인사》라는 의미로 될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는것은 너무나도 단순한것이다. 사실 《재북》 또는 《재북인사》라는 용어는 아주 류다른 의미를 담고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민족의
남조선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다가 북반부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재북인사의 개념에 속하는것은 아니다. 전쟁시기에만도 무려 수십만명에 달하는 남조선의 청장년들이 의용군으로 출전하였다가 북반부로 들어와 정착하였지만 그들을 재북인사로 부르지 않는것이다.
이밖에 1948년의 남북련석회의를 전후한 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남조선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북반부로 들어와 생의 보금자리를 편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도 재북인사로 불리워지지 않는다.
재북인사라고 하면 조국해방전쟁시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군대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왔다가 정전실현 얼마후에 스스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뭇고 거기에 망라되여 통일성업을 위해 활동한 이전 남조선 각계 인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통협결성에 참여하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그 이전에 별세한 김규식선생 같은분들도 사람들속에서 일반적으로 재북인사의 개념으로 인식되고있다. 정인보선생처럼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다시 한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재북인사란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재북인사라는 용어가 담고있는 의미를 대체로 이와 같이 정립할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북인사들속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들이 들어있었는가.
그속에는 우선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우익계에 속했던 인물들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다 3. 1인민봉기의 소산인 세칭 상해림정(그후 중경림정)에 몸담고있었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수십년간 해외에서 반일독립운동을 벌리다가 8. 15후 귀환하여 전쟁전까지 남조선에서 정계활동을 벌렸던 인사들이였다.
상해림정에서 내무부장, 재무부장을 력임했다가 전쟁발발 한해전 김구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독립당
그 경력들이 보여주고있는바와 같이 이들은 사상상의 미숙성으로 하여 8. 15직후 한때나마 미제국주의의 신식민주의강점정책에 추종한 오유의 경력소유자들이였으며 1948년의 남북련석회의에서 눈을 새롭게 뜨고 확고하게 련공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였다.
이밖에 재북인사들속에는 당시 30~40대에 속한 사람들로서 8. 15후에 비로소 정계에 등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견과 신앙을 볼 때 우익 또는 중도계에 속한 젊은 층의 민족주의세력인데 보통 《국회》소장파로 지칭된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였다.
그들은 원내무대에서 정면으로 미제와 리승만반역도당에 도전하여 가장 견결하게 싸웠던 사람들이였다.
이밖에 재북인사들속에는 우익에 기울어지고있었던 각계각층 인사들과 일부 극우익에 속하여 남조선에서 좌익과 정면으로 대결하고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우익에 기울어지고있었던 사람들은 8. 15후 5년간의 정세발전을 통하여 점차 정의와 부정의, 애국과 매국을 갈라보게 되면서 련공애국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 사람들이였으며 극우익에 속했던 사람들은 전쟁초기 리승만역도에 대한 배신감을 통절하게 느끼고 단호하게 그와 결별하여 련공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였다. 이런 극우익인사들로서는 내무부 장관을 했던 김효석과 극우익정당인 《한민당》 조직부장과 1, 2대 《국회》의원을 했던 조헌영 같은 인사들이 들어있었다.
그러면 이들에 의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어떻게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는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는 부지불식간에 땅에서 불쑥 돋아난 존재도 아니였으며 푸르청청한 하늘우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나온 존재도 아니였다. 통협의 출현은 우리 나라의 분렬력사선상에서 필연의 하나였던것이다. 통협의 뿌리와 초석이 그것을 말해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