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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 겨레가 따르는 품

 

나는 입북후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그들속에는 각 분야의 일군들도 있었고 기자들도 있었으며 작가, 시인들도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나는 이따금 어떻게 해서 공화국인민들이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는 어려운 때를 택하여 월북을 단행하게 되였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하기는 공화국에서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고있는 때에 월북을 단행한 사람이 어찌 나 혼자뿐이겠는가. 그속에는 남조선에서 종교계 상층에 있었던 오익제선생 같은이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공화국이 어려움을 겪었던 때라면 50년전 조국해방전쟁의 일시적후퇴시기가 먼저 떠올려진다. 그때에 이남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버이수령님을 찾아 스스로 북행길에 올랐던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찌 이뿐이라 하겠는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으로 불리우는 10여만명의 재일동포들이 공화국북반부에로의 귀국, 사실 그들의 절대다수가 남조선에 고향을 두고있는 사람일진대 이 사변을 두고 또한 어떤 설명을 주어야 하겠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북에로 쏠리는것은 력사적으로 남녘민심의 추향인것이다. 그러니 때에 관계없이 나의 월북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것이다.

비유하면 이렇게 말할수 있으리라.

온 세계의 계곡들과 들판을 흐르는 내물들이 합쳐 대하를 이루고 수천수만의 대하들이 굽이쳐 흘러들어가는 곳이 대양이다. 아무리 세계의 곳곳에서 대하들의 물이 흘러들어도 대양은 넘쳐나는 법도 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도 없다.

대하의 물들은 천태만상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청수도 있는가 하면 탁류도 섞여있다. 하지만 그 어떤 탁류도 일단 대양의 품에 안기면 깨끗이 정화되고만다. 대양은 더없이 넓을뿐아니라 헤아릴수없이 깊어 자기의 품에 흘러든 모든 물을 한가지의 순도를 가진 물로 순화시킨다. 대하의 물들이 쉬임없이 대양으로 흘러드는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자연의 리치이다.

대양이 이렇듯 대하들의 품이라면 어버이수령 김일성주석님의 품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품은 그대로 우리 7천만겨레가 안겨사는 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렇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위대한 품은 온 겨레가 안겨사는 드넓은 품이다.

물론 나의 대답을 자연현상의 리치에다만 비유할수는 없다. 나는 입북후 평양교외의 신미리에 있는 애국렬사릉을 찾아갔을 때에 받은 감동을 피력하는것으로 나의 대답을 더 선명히 하려 한다.

애국렬사릉의 비석들에 새겨져있는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들과 그들의 모습을 생동하게 찍은 돌사진들을 바라보느라느니 마음의 격정을 금할수가 없었다.

여기 애국렬사릉에서 영생의 모습으로 있는 사람들속에는 항일혁명투사들과 남조선혁명가들뿐아니라 《상해림시정부》요인들과 독립군의 인물들, 한때 반공일선에 섰다가 후에 련공통일애국의 길을 걸은 사람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무산자계급에 속했던 사람들과 유산자계급에 속했던 사람들,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 문자그대로 각이한 출신과 각이한 정견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다 들어있다.

어떻게 이렇듯 각이한 출신과 각이한 경력, 각이한 주의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수령님의 품을 찾을수 있었고 그분을 민족의 구세주로 우러러 높이 받들어모실수 있었는가. 어떻게 우리 수령님께서와 위대한 령도자님께서 그 복잡다단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 각이한 정견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한품에 안으실수 있었는가.

나는 입북후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할 기회를 가질수 있었고 우에서 지적했던것처럼 각 분야의 인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이 과정에 나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였다. 참으로 두분의 위대한 수령께서는 태양의 인력보다도 더 큰 끌힘을 가지고 계신다고 나는 절감하였다.

그러면 그 끌힘의 원천은 무엇이겠는가.

나는 북에서 보고 듣고 공부한데 기초해서 내 나름대로 그것을 이렇게 정립해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민족은 반만년력사를 련면히 이어왔지만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기전까지에는 민족의 앞길을 밝힌 사상과 철학을 목 마르게 기다려온 민족이였다.

진보적인 사상과 철학을 못 가지고 있었기에 사대주의에 스스로 포로되여 있었고 그것으로 하여 남에게서 수모를 당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종당에는 남의 식민지노예의 운명에까지 빠져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1930년대 중반기에 발표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그토록 우리 민족의 가슴가슴을 사로잡았던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거기에서 자기 고유의 사상과 철학을 발견하였기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상과 철학이란 우리 민족이 자기의 주체적인 힘으로 나라를 찾고 민족전환의 길을 열데 대한 사상과 철학인것이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접한 우리 겨레는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구세주로 더더욱 높이 받들어모시게 되였다.

8. 15와 함께 이남의 량심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북으로, 평양으로 끝없이 쏠리게 된것은 그이의 위대한 사상과 철학에 대한 매혹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버이수령님을 찾은 사람들속에는 려운형, 허헌, 홍명희, 김규식, 조소앙, 윤기섭과 같은 이름있는 애국인사들도 있었고 백남운, 리극로 같은 학자들과 리승기, 리종만과 같은 과학자, 기술자들도 있었으며 리기영, 송영, 조령출, 리면상 등과 같은 작가, 예술인들도 있었다. 아무튼 이름있는 인사라면 그 누구든 어버이수령님을 찾아 이런 또는 저런 기회에 북행길에 올랐다.

사실 몽양 려운형선생이라고 하면 그는 자존심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였으며 도고하기도 보통정도가 아닌 사람이였다. 그는 조선사람치고 레닌을 만나본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이며 일찌기 중국의 손문, 인디아의 간디와 같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민족운동자들과도 만나 시국을 론했다는 사람이다. 그는 《공산당선언》에 대한 첫 번역자로 자부한 사람이기도 하며 일본 도꾜에까지 가서 조선의 독립을 절규하며 일본제국의 대신들과 맞담판을 할만큼 배짱도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니였다. 그런가 하면 8. 15당시 그는 나이가 이미 60이 넘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러하던 그가 30대의 청년장군이신 김일성장군님앞에서 숙연히 머리를 숙이고 진로를 찾기 위해 솔선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았다.

나는 북에 들어와 학습하는 과정에 김일성전집》에서 《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과 한 담화》를 읽고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2월 11일에 있은 려운형선생과의 담화석상에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나아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사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조선사람에게는 미국옷도 맞지 않고 쏘련옷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식옷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조선식옷》, 과연 얼마나 통속적이며 얼마나 사상이 뚜렷한 교시인가.

8. 15직후 이남의 정세는 극히 혼란되여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식《민주주의》를 따를것을 제창해나섰는가 하면 《공산주의자》로 자처해나선 일부 사람들은 조선이 쏘련의 일개 가맹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고 쓸개 빠진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 수령님께서는 《조선식옷》이라는 매우 통속적인 표현으로 주체적인 새 조국건설로선을 세파속에서 온갖 수난을 겪으며 늙어온 한 정객앞에 이렇게 펼쳐보였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이 나아갈 길을 손금처럼 세세히 가르쳐주시는데 나는 마음이 흐뭇해서… 참으로 장군님이시야말로 이 나라의 위대한 령도자이시오. 장군님께서는 우리 조선인민의 힘을 크게 믿으시는것이였소. 우리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해야한다는 그 믿음직하고 떳떳한 립장이시였소.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사람의 힘을 믿는 여기에 바로 통일독립의 비방이 있는것이요.》

이것은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서울로 돌아간 려운형선생이 찾아 온 동료들과 기자들에게 한 말이였다.

려운형선생의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주체사상의 위대성을 더더욱 절감하게 된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하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의 힘으로 개척할수 있게 하는 위대한 철학을 안겨주는 주체사상에 매혹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벌써 조선사람이 되기를 그만두고 배달민족이 되기를 그만둔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나는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나서 한 김구선생의 말을 통해서도 세상사람들은 어버이수령님의위대한 끌힘이 바로 위대한 주체사상에 바탕을 두고있음을 똑똑히 알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구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듣노라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 환히 내다보이고 마음이 후련해지고 참 그분을 이제 알게 된것이 한스럽습니다.…

김일성장군님의 공산주의는 절대 찬성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에 얼마나 감동되였으면 김구선생이 생명처럼 여겼던 《상해림시정부》의 법통까지 어버이수령님께 넘겨드리려 했었겠는가. 그것은 그토록 완고했던 김구선생과 같은 우익정객까지도 민족의 운명이 어버이수령님께 있음을 인정했다는것을 말해준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에서 통일독립의 길을 내다보았고 위대한 주체사상에서 민족의 빛나는 미래를 내다보았기에 8. 15직후에 많은 사람들이 원한의 38 선을 넘어 평양으로 왔고 남북련석회의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평양으로 왔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또한 많은 사람들이 어버이수령님의 품을 찾아 북행길에 올랐고 전후시기에 재일동포들이 집단적으로 태줄을 묻은 남조선으로가 아니라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신 공화국북반부에로 귀국하였던것이다.

력사의 반동들이 주체사상에 그토록 전률하고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태양의 인력보다도 더 강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대한 끌힘은 또한 그분들의 위대한 포옹력에서도 찾아볼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에서 김구선생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사실 우익정객이였던 그는 왜정시기에 민족주의운동을 하면서도 공산주의라고 하면 무작정 반대하고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한사코 배척하던 사람이였다. 그가 진행한 테로행위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들이 피해를 입은 일도 있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기에 남북련석회의 조직당시에 종파분자들은 말할것 없고 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사람들은 그를 회의에 초청하는것을 반대하고있었다.

그러나 우리 수령님께서는 김구선생의 가슴속에 스며있는 한가닥의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을 인정하시고 그를 불러주시였고 크나큰 믿음을 주시였으며 통일애국의 길에 내세워주시였다.

나는 주체59(1970)년 11월초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개회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수령님께서는 개회사에서 혁명렬사들의 이름과 함께 애국렬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적하시였는데 그속에는 조봉암선생의 이름은 물론 안재홍씨의 이름도 있었다.

안재홍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였던가.

안재홍씨로 말하면 그는 일찌기 자기 나름의 《구국의 길》에서 방황하던 끝에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8. 15후 남조선에서 《미군정청》에도 관여한 사람이다. 그탓으로 그는 1950년 여름 인민군대의 반격으로 서울이 해방되였을 때 죄책감으로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그러하던 사람이였으나 정작 그가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는 성명도 발표하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오른 여러 인사들과 함께 북에 들어섰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시고 너그럽게 그를 안아주시였다. 그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조국통일위업수행에 헌신하다가 갔다. 아니 간것이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영생하고있다.

나는 애국렬사릉에 있는 최덕신선생의 돌사진앞에서도 많은것을 생각하였다.

최덕신이라고 하면 그의 곡절많은 경력으로 하여 이름이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해와 같은 그 넓은 품에 그를 뜨겁게 안아주시였다. 그는 지금 애국렬사릉에서 부친 최동오, 장인 류동열선생들과 함께 영생하고있다. 그의 비석에는 《최덕신선생,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그의 불미스러운 과거는 수령의 품속에서 영영 청산된것이다. 탁류도 대양의 품에 안기면 청수로 정화되고 만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놓고 말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포옹력이야말로 민족대단결의 기초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의 인력을 초월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끌힘은 또한 두분의 뜨거운 인간애와 숭고한 의리에 있다고 나는 특별히 강조하고싶다.

나는 경애하는 수령님과 위대한 령도자님의 덕성실기들의 갈피갈피를 넘기면서 한두번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덕성실기들의 갈피갈피는 문자그대로 그 어떤 전설에서도 들을수 없는 감동에 넘친 내용으로 꽉 들어차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8. 15직후 새 조국건설을 위한 그 다망하신 속에서도 려운형선생의 부탁을 받으시고 그의 두 딸을 댁에 받아들여 친히 공부시키시였으며 30여년이 지난 주체68(1979)년 1월 1일 설날 아침에는 선생을 못잊어 그의 네 자녀를 만나주시고 그들과의 기념촬영을 위하여 신년사시간을 5분이나 늦추시였다.

허헌선생은 환갑도 쇠지 못하고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헤아리시고 다른 때도 아닌 조국의 운명을 판가리하던 조국해방전쟁때인 주체40(1951)년 6월에 한차례도 아닌 두차례씩이나 선생의 환갑연을 차려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선의 급한 정황을 처리하시느라고 선생의 생일당일에 차린 환갑연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것이 못내 가슴이 걸리시여 그 이튿날 다시 상을 차리고 거기에 참석하시여 선생을 축하하시고서야 마음을 놓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해 여름 허헌선생이 미제공중비적들의 폭격으로 대령강상에서 실종되였을 때 보름넘어 무려 3, 000여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동원하시여 그의 시신을 찾게 하시였다. 전쟁시기에 한명의 군인들도 전투서렬에서 떼여내기가 어렵고 전선형편이 조련치 않을 때에 많은 군인들을 오랜 기간 전투임무수행에서 떼여내여 한 일군의 시신을 찾게 한것은 뜨거운 인간애, 숭고한 의리심을 지니신 우리 수령님과 같으신 위대한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리라.

홍명희선생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에 대한 이야기도 눈물이 없이는 읽을수도 들을수도 없는것이다.

4월남북련석회의직후에 선생의 환갑연을 차려주신 이야기며 하나밖에 없는 목도리를 푸시여 선생의 목에 둘러주신 이야기며 반동들에게 학살당한 선생의 어머니의 장례를 위하여 친히 최고사령관명의의 신임장을 써주시고 선생의 아들을 충청북도 괴산땅으로 떠나보내신 이야기들은 그대로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인간애의 대서사시이다.

나는 특히 덕성실기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품》의 앞에 모셔져있는 한 사진을 보며 더없는 감동에 잠기였다.

주체47(1958)년 5. 1절날에 어버이수령님께서 풍치 좋은 한 호수우에서 홍명희선생을 배에 태우시고 손수 노를 저으시는 사진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애, 다심한 사랑의 화폭이다.

그런데 이 력사의 장면이 어떻게 되여 아름다운 화폭으로 기록되게 되였는가. 나는 그 사연을 한 기자를 통해 듣고 다시한번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홍명희선생을 태우고 노를 저으신 배가 호수 한복판에 서서히 들어서고있을 때 사진기자를 태운 다른 한척의 배가 기운차게 그 배에 접근해가고있었다 한다. 기자를 태운 배에서 노를 저으신분은 다름 아닌 경애하는 김정일령도자님이시였다 한다.

위대한 령도자님께서는 이날의 력사적장면을 기록에 남기기 위하여 친히 기자를 호수가로 불러내시여 배에 태우고 손수 노를 저으시며 가장 좋은 촬영조건을 지으신 다음 기자가 사진기의 샤타를 누르게 하였다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충성심과 숭고한 도덕의리심에 대한 또 한편의 전설이야기인것이다.

대하의 물들이 대양으로 흘러드는것을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것처럼 남녘의 민심이 북으로, 평양으로 흐르는것도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것이며 완전히 합법칙적인것이다.

이 사람 윤성식이 만난을 뚫고 마침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 안기게 된것도 이런 합법칙성에 따른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대답이다.

그런데 이어서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북으로 향한 남녘의 민심의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진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명백하다.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공화국인민들이 강성대국건설에서 성과를 올리면 올릴수록 통일의 희망도 그만큼 커가기때문이다. 그런속에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은 드디여 이루어지고야 말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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