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머리이야기
1945년 8월 10일.
북만땅 전역이 온통 몸부림치며 떨고있었다. 대일작전에 참가한 쏘련원동군부대들의 격렬한 포성이 천지를 진감하고 일본군의 방어선에 돌입한 쏘련땅크들은 포진지에 구겨박힌 포신들과 바퀴와 흙과 나무들은 물론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까지 철의 무한궤도로 짓이기고 씹어뱉으며 거침없이 남으로 전진해갔다.
남으로 뻗은 그 길에서는 일본군패잔병들이 악에 받쳐 부르짖고 미친듯 총을 란사하며 밀려가고있었다. 숨막힐듯 한 무더위속에서 재빛먼지구름이 뽀얗게 피여오르군 했다. 어느 한 언덕의 오두막에서는 가래끓는 소리로 불러대는 일본군가소리가 터져나왔다.
얼마전까지 대륙을 짓뭉개며 행진해가던 《대일본제국》이 목터지게 불러대던 군가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위엄찬 군가도, 씩씩한 행진곡도 아니였다. 할복자살을 앞둔 왜놈장교들이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자기들의 피비린 인생을 하직하는 목갈린 고별가였다.
…
8월 12일.
그날 치치하얼부근에 징용으로 끌려가 방어공사를 벌리다가 가까스로 도망친 장정환은 7~8명쯤 되는 조선인로동자들을 이끌고 천고의 숲을 헤쳐가고있었다. 한시바삐 송화강을 건너 조국으로, 고향으로 가야 했다. 지옥같은 공사장에서 도망친것이 꿈만 같았다.
이제 송화강만 건느면 조국이 멀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그들의 일행에 난데없는 처녀까지 끼여들었다. 얼굴이 창백한 그 조선인처녀가 언제 어떻게 그들의 일행에 끼여들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그때 열아홉살나던 그 처녀는 장춘시의 어느 한 약국에서 일하다가 쏘련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정신없이 고향으로 달려가던 길이라고 한다. 처음엔 기차로, 다음엔 마차로, 지금은 도보로 여기까지 이르렀었다.)
송화강은 상류로 거슬러오를수록 조선과 가까운 장백, 통화지구로 들어서게 된다. 도처에서 일본군패잔병들이 살판치는 때였으므로 장정환의 일행은 선창이나 나루터를 피해 계속 상류로 거슬러오르며 죽기내기로 배를 찾아 헤맸으나 배가 있을리 없었다. 일본군패잔병들이 상선이나 어선들은 물론 나루터의 매생이들까지 사정없이 총검을 휘두르며 빼앗아갔던것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송화강상류의 어느 한 물구비에 배가 있었다.
날이 어두웠을 때였다. 어데선가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더니 멀지 않은 물구비쪽에서 불길이 황황 치솟는것이 보였다. 일행은 불길한 예감에 주춤거렸다. 그러나 장정환이 먼저 움씰거리며 걸음을 떼자 다른 사람들도 일시에 그를 따라 달려갔다. 저 멀리 불빛이 어룽거리는 강기슭으로 매생이가 미끄러져나오는것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피나게 찾던 희망과 구원의 배!…
물구비를 향하여 숨차게 달려가니 차츰 거세여지는 불빛에 비추어진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대여섯쯤 되는 사람들이 헐금씨금하며 강기슭의 모래불로 작은 배를 끌어내고있었다.
장정환일행이 나타나자 검은 그림자들이 흠칠하며 허리를 폈다. 그들의 등뒤에서 타번지는 세찬 불길이 방금 거기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낱낱이 고발하고있었으니… 불타는 초막앞에 중국인늙은이와 한 소녀의 시체가 란도질당해있고 앞 못보는 로파가 땅바닥을 벌벌 기며 무어라고 울부짖고있었다. 그 로파앞에는 살기띤 두눈을 희번뜩이는 일본군오장놈이 시퍼런 군도를 쳐들고있었다.
사태는 명백했다. 일본군패잔병들이 작은 초막과 숲속에 감추어둔 배를 요행 찾아내였고 그 배를 한사코 지키려는 중국인늙은이와 손녀 그리고 앞 못보는 로파까지 무참히 요정내는 참이였다.
별안간 어둠속에서 장정환일행이 나타나자 왜놈들이 기절초풍한것은 물론 이편도 역시 너무나 참혹한 정경앞에서 굳어져버리고말았다. 몸서리치는 침묵… 두패는 한순간 서로 꼼짝도 않고 마주보기만 했다. 눈알마저 제대로 굴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피비린 살륙에 이골이 난 왜놈오장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자가 중국말로 웨쳤다.
《누구야, 웬놈들이야?!》
《…》
대답이 있을리 없었다. 이마전의 피줄들이 부풀어오르다 못해 금시 터져버릴것 같은 한순간, 또 한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아하, 》 마침내 오장놈이 이번엔 조선말로, 그것도 녀자들의 비명처럼 아츠러운 소리로 울부짖듯 했다. 《니들 저―기 비밀공사장에서 도망이나 쳤지? 근데 여긴 왜 왔어, 왜 왔어?―》
왜놈오장이 두손으로 움켜쥔 군도가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장정환도 그놈을 알아보았다. 비밀공사장을 감독하던 왜놈헌병대중에서 류달리 잔인하기로 유명한 마쯔이라는 오장놈이였다. 기이하게도 운명의 갈림길에서 또 맞다든것이다.
그때 다른 왜놈들중에서 견장이 없는 군복을 넝마처럼 걸치고있던 말라꽹이가 팔을 후들후들 떨며 당장 쏴갈기자고 했다.
그러나 마쯔이오장은 피방울이 점점이 튀여있는 낯짝을 실룩거리며 무엇인가 재빨리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무던히 강마른 편이였지만 고양이처럼 날파람있는 놈이였다. 비밀공사장에서 도주자들을 잡으면 무조건 자기 가문의 자랑이라는 《핫꼬이찌우》(한자표기로는 〈팔굉일우〉―즉 세계를 한집안으로 만든다는 국수주의적구호) 4글자가 새겨져있는 칼날을 비스듬히 내리쳐 단숨에 목을 썩둑 잘라버리는것으로 유명했었다. 그자는 중국말, 조선말도 잘했다.
《아―냐! 》 하고 오장놈은 여전히 군도를 틀어쥔채 아츠럽게 고아댔다. 《니들, 마침 잘 왔다. 여기 와서 배나 끌어내라, 알겠는가? 》
나머지 왜놈들은 일제히 총을 꼬나들었다. 하여 장정환일행은 왜놈패잔병들의 총칼앞에서 배를 끌어내여 물에 띄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배가 물에 뜰 때까지 칼끝같은 눈길로 그들을 살피던 왜놈오장이 일이 끝나자 그들에게 군도를 휘둘러댔다.
《조센진들, 인젠 갈데루 가라. 빨랑빨랑!… 못들었는가?…》
바로 그때 장정환의 기억에 한생 잊을수 없는 괴로운 추억으로 남은 그 지긋지긋한 일이 벌어졌다. 왜놈들이 총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쫓아내다가 지금까지 뒤쪽에 숨어있던 조선인처녀를 발견했던것이다.
한순간 장정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 유도3단, 저 계집 어째볼 생각이 없어?》
넝마같은 군복을 걸친 말라꽹이가 앞가슴에 수풀처럼 털이 돋아있는 거구의 왜놈병졸에게 한 말이였다. 그러자 하마같은 왜놈병졸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으로 앞가슴의 털을 북북 긁으며 마쯔이오장놈에게로 다가갔다. 그자들이 수군거리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유도3단이라고 불리운 놈이 자기 패거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이 이마무라, 저 처녀를 이리 끌어와!》
그러자 이마무라라고 불리운 말라꽹이왜놈이 일행속의 유일한 처녀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츠러운 비명… 언제 어떻게 일행속에 끼여들었는지 알수 없던 녀자, 남달리 예쁘다고는 할수 없으나 잘 다듬어진 조약돌마냥 단아한것이 왜서인지 어떤 불안감을 주던 처녀였다.
이마무라가 발버둥치는 그 처녀를 마쯔이오장놈에게 질질 끌고갔다. 그러자 마쯔이는 이마무라가 자기앞에 바싹 내세운 처녀를 재빨리 훑어보고는 이상야릇한 웃음소리를 킬―킬 흘리였다. 잔인하고도 관능적인 신음소리같았다. 다음순간 그자는 날쌔게 왼손을 내뻗쳐 처녀의 머리태를 움켜잡았다.
《이년아!―》
어느새 그자가 오른손으로 칼손잡이를 바싹 틀어잡는것이 눈에 띄였다. 장정환은 짜릿한 전률이 등골로 줄달음치는것을 느꼈다. 다음순간 마쯔이놈이 쳐든 시퍼런 칼날이 허공에서 펀뜩하였다. 악!― 하는 가느다란 비명… 숨막히는 한순간이 지나간 후 사람들이 눈을 떠보니 벌써 처녀의 옷고름이 날아나고 속옷이 갈라지고있었다. 이어 서슬푸르게 날아간 칼자리를 따라 처녀의 앞가슴에 줄무늬처럼 빨간 피방울들이 내돋기 시작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대로 헤쳐지던 처녀의 피젖은 가슴…
《안돼! 이러지 마!―》
처녀가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조선말로 지껄이는 마쯔이오장놈의 악청은 더 높았다.
《이년아, 비상씨국에 치마쪼고리가 모야? 이거나 홀랑 벗어라, 벗어! 홀랑 벗구 우리랑 같이 지옥에나 가자!》
한쪽에서 총을 꼬나든채 오장이 하는짓을 구경하고있던 왜놈들이 감질이 나는것을 참을수 없는지 왝―왝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지 신음하는지 알수 없는 기괴한 울부짖음소리였다. 너무도 스산한 정경앞에서 이쪽의 사람들은 다들 처마밑의 고드름처럼 얼어붙어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마쯔이오장놈이 벼락이라도 맞은듯 칼쥔 손을 내려뜨리고 바짝 여윈 낯짝을 손바닥으로 더듬으며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고노야로!―》
처녀가 그자의 낯짝에 침을 뱉았던것이다. 침을 뱉으며 《이 더러운 왜놈아, 이 짐승같은 놈아!―》 하고 부르짖었다.
왜놈오장이 다시 시퍼런 칼날을 움켜쥔것은 그 다음순간의 일이였다. 처녀가 허척지척 뒤걸음쳤다. 그럴수록 마쯔이는 한걸음 또 한걸음 바투 따라섰다. 칼자루를 움켜쥔 그자의 낯짝에 잔뜩 일그러진 잔인한 미소가 불의 그림자처럼 얼씬거렸다.
처녀가 뒤를 돌아보며 흐느끼듯 신음했다. 구원을 바라는 절망적인 눈길… 그의 눈길이 장정환에게 와서 멎었다. 남달리 기골이 장대한 장정환이였다. 허나 왜놈들의 총구앞에 서있는 그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저 손으로 모질게 가슴만 쥐여뜯고있을뿐…
마쯔이오장놈이 칼날을 쳐들고 뒤걸음치는 처녀의 코앞에까지 육박해왔다. 처녀는 더이상 뒤걸음칠데도 없어 장정환의 눈앞에서 굳어졌다. 한순간 피끗 장정환을 스쳐보고는 급기야 왜놈오장의 칼날앞으로 홱 돌아섰다.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서슬푸른 왜놈의 칼날에 목을 내대려고 각오한것 같았다.
장정환은 자기의 이마빡이 땀에 젖는것을 느꼈다. 이제 한순간만 지나면 마쯔이오장놈의 칼날에 처녀의 목이 잘리거나 홀랑 벌거벗기운채로 치욕의 구렁텅이로 끌려갈것이다. 그런데 억대우 장정환, 너는 지금 무얼 하고있느냐? 과연 네가 이런 못난이였단말이냐? 조선인처녀가 쪽발이왜놈들한테 모욕을 받는데도 꼼짝 못하는 그런 버러지같은 존재였단말이냐?…
《그래, 그래!― 난 등신이다. 버러지다. 미물같은 놈이다!―》
이렇게 울부짖은것은 장정환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눈뜨고있는 사나이의 자존심이였다. 드디여 마쯔이오장놈이 칼을 쳐드는 순간 그는 헉!― 하고 단숨을 내뿜으며 한걸음 앞으로 쑥 나섰다. 마침내 눈뜬 리성이 자존심의 심지에 불을 단것이다.
급기야 마쯔이오장놈의 칼쥔 팔목이 뚝 부러지는듯 했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듯 한 소리에 이어 차마 사람의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기괴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장정환이 어느새 그놈의 칼쥔 팔목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비틀어대였던것이다.
《이 쪽―발―이 새끼야!―》
장정환이 목터지게, 무섭게 울부짖는 소리였다.
왜놈오장이 피거품을 물고 허우적거리며 뒤쪽의 자기 패거리를 향해 숨넘어가는 악청을 내질렀다.
《야 이것들아, 왜 가만 보구만 있어?…》
그제서야 뒤쪽에서 얼혼이 빠져있던 왜놈들은 한덩어리가 된 두사람에게 함부로 총질은 하지 못하고 욱― 달려들었다. 그러나 산골에서 부대기농사로 뼈대가 굵은데다가 미칠것처럼 격노한 장정환이였다. 그가 두팔을 도리깨처럼 휘둘러대자 어느새 두세놈의 이마빡이 깨지고 허리가 부러진듯 했다. 하마같은 왜놈도 땅바닥에 나딩굴며 태질을 했다. 그러자 지금껏 장승처럼 우두커니 몰켜서서 숨소리도 못내고있던 뒤쪽의 로동자들이 일시에 왁 달려들어 나머지 놈들을 닥치는대로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골로 받고 주먹을 내지르고 배허벅이며 사타구니 할것없이 죽어라 걷어차며 곤죽이 되도록 짓조겨대였다.
순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그처럼 살기를 뻗치던 왜놈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왁―왁 기세를 올리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버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으시시 몸을 떨었다. 오랜 세월 짓밟히던 인생들이여서 방금 자기들이 저지른 일에 본능적인 불안과 공포를 느낀것이다.
마침 장정환이 사람들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뭘하구있소, 빨리 배에 타지 않구?…》
그것이 얼어붙어있던 사람들에게 구령이 되고 힘이 되였다. 사람들이 우― 밀려가더니 매생이에 올라탔다. 그러나 장정환은 한쪽에서 파들파들 떨고있는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차츰 시꺼먼 어둠이 사위에서 바싹 좁혀들었다. 피비린내와 끄스름내만 지독했다. 장정환은 피칠갑이 되여있는 자기의 웃도리를 벗어 처녀에게 내밀었다.
《일없소. 이자 거기선 정말… 장했소. 그러니 뭐 부끄러울게 있소? 이거라두 걸치구 빨리 배에 오르우.》
어둠속에서 떨고있던 처녀는 두손을 앞가슴에 모두어쥔채 비로소 눈길을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고마와요.》
《원, 무슨 말을!…》
장정환은 또 한번 흐느끼듯 숨을 내그었다.
그때였다. 배에 타고있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다급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보게, 정환이! 게서 뭘하구있어?》
《빨리 타우. 저기 왜놈들의 배가 오구있소.》
벌써 발동기소리가 요란했다. 강상류로 물결을 헤가르며 오르는 시커먼 배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배에서 내쏘는 눈부신 탐조등의 불빛이 수면우로 미끄러져왔다. 가슴이 섬찍했다. 끝내 여기서 무리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모두 얼어붙고말았다. 탐조등의 눈부신 불광이 배에 탄 사람들의 눈을 때렸다. 거세고 강렬한 빛의 폭풍이였다. 그 불빛은 숲가의 꺼져가는 재더미와 람루를 걸친 로동자들을 샅샅이 훑더니 급작스럽게 반대편기슭으로 옮겨갔다.
정녕 믿을수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잠시후 더더욱 놀라운 일이 또 벌어졌으니… 탐조등의 강렬한 불빛이 날아오던 그 배에서 웅글은 노래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던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굳어진채로 눈만 데룩거렸다. 자세히 보니 배에 가득 타고있는 이국의 병사들이 바얀(그때엔 물론 그 악기이름도 몰랐다.)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해는 서산에 저물고
저녁안개 강기슭에 스며들 때
쏘련병사 아득한
초원을 지나서 고향으로 가네
방금전까지 죽기내기로 혈투를 벌리던 사람들이 그만 멍해지고말았다. 목을 빼들고 물결을 헤가르는 상륙정과 거기에 탄 낯설은 이국의 병사들을 얼나간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라사군대다!―》
누군가 이상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아냐, 쏘련군대야!》
그러자 누군가 좀 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래, 쏘련군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장정환은 속에 가득 들어찬 숨을 활 내뿜었다. 마주서있던 처녀 역시 가늘게 숨을 내긋고있었다.
노래소리는 계속되였다.
쏘련병사 아득한
초원을 지나서 고향으로 가네
후날 장정환은 해방된 조국에서 인차 이 노래의 곡조며 가사도 알게 되였다. 이 노래뿐만아니라 사교춤이라고 일컫는 왈쯔와 쏘련공산당략사도 배우게 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이국정서가 이제 오랜 세월 사람들의 머리속에 한뜸두뜸 사대와 교조의 얄궂은 알락무늬를 수놓게 되리라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뚝처럼 박혀선채 까딱 움직이지 못했다. 야릇한 불안과 어정쩡한 호기심에 끌려 점도록 그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내려쬐는 불볕아래
군복어깨 땀에 절고 얼룩졌네
드디여 웅글은 노래소리도 차츰 멀어져갔다. 그러나 송화강의 수면은 여전히 쏘련상륙정이 뒤번져놓은 밀물과 같은 파도를 그들이 몰켜서있는 기슭으로 끊임없이 떠밀어보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