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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12월 2일
 

절세의 위인들의 품에서 영생하는 해외동포인사

- 최기환선생이 받아안은 사랑과 배려 -

 

얼마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전 범민련 유럽본부 의장이며 스위스 전 《민중출판사》대표였던 최기환선생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였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간 최기환선생이 어떻게 되여 이런 높은 국가수훈을 받아안게 되였는가.

여기에는 이런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 ※

 

지금으로 32년전인 1983년 6월 푸른 상공으로는 한대의 비행기가 평양을 향해 날고있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려객들속에는 벗어진 이마에 류다른 도수안경을 낀 50대 중엽의 남성도 있었다.

그가 스위스에서 살고있는 해외동포 최기환선생이였다.

조국이 가까와올수록 그는 흥분된 마음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흘러온 인생의 나날들이 어제일처럼 떠올랐다.

최기환선생은 1929년 9월 1일 서울시 서대문구 만리동 1가에서 태여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재학당시 최기환선생은 《주간서울》편집부 책임자로 있던 보성중학교시절의 동창의 부탁으로 가끔 사회와 현실에 대한 시사문제론평을 써서 게재하군 하였다.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마친 후 최기환선생은 1958년부터 서부도이췰란드 본대학 법정과에서 류학하였다.

그 나날 남조선에서 일어난 4. 19봉기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최기환선생은 남조선에서 사회에 환멸을 느끼였다.

1967년 최기환선생은 《동백림간첩단사건》(박정희괴뢰패당이 《6. 8부정선거》로 조성된 대내정치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작곡가 윤이상선생을 비롯한 유럽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술인, 지식인, 류학생 등이 공화국에 포섭되여 《대남적화공작》을 벌렸다고 하면서 무려 194명을 《간첩단》으로 몰아 랍치, 체포, 유죄판결하였다가 대내외의 강력한 항의규탄으로 관련자들을 석방한 사건)의 련루자로 남조선괴뢰들에게 랍치되게 되였다.

당시 최기환선생은 남조선의 중앙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 제자라고 하는자에게 유인되여 스위스 제네바호텔에 연금되였는데 그때 그는 굴하지 않고 스위스인들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최기환선생은 남조선사회와 완전히 결별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형의 권고도 마다하고 스위스에서 1967년부터 남조선괴뢰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게 되였다.

그는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사업을 하면서 남조선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섰으며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에로 불러일으키였다.

이 나날 그는 공화국북반부를 다녀온 동포들의 말을 들으면서 공화국을 더욱 동경하게 되였으며 마침내 조국방문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근로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마음껏 향유하는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는 우리 겨레가 안겨살 진정한 조국은 바로 공화국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공화국을 방문한 후 인생의 목표를 다시 정한 최기환선생은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의장으로 사업하면서 해외동포들을 묶어세워 조국통일에로 불러일으켰으며 1988년 5월 《민중출판사》를 창간하고 남조선인민들과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지역의 동포들을 의식화하기 위한 운동을 힘있게 조직전개해나갔다.

그는 《민족사관의 재정립》을 비롯하여 《〈한국〉의 보검은 주체사상》, 《주〈한〉미군문제》 , 《6. 25전쟁의 도발자는 누구인가》, 《군사식민지 〈한국〉》 등 2000년까지 수많은 도서들을 집필, 출판하여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에 떨쳐나선 해외동포들을 적극 고무추동하였다.

 

 

애국적량심을 가지고 해외에서 조국통일과 민족대단결을 위해 헌신하고있는 최기환선생을 늘 잊지 않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1992년 4월 유럽지역동포대표단으로 조국을 방문한 그를 친히 만나주시고 영광의 기념촬영도 해주시고 경축연회에도 불러주시는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해 8월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3차 범민족대회 대표로 참가한 최기환선생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을 또다시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격과 흥분으로 상기된 여러 해외동포들을 인자하신 눈길로 바라보시며 제3차 범민족대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과분한 평가의 교시를 받아안은 최기환선생과 해외동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고 통일된 광장에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을 함께 모시겠다고 충정의 결의를 다지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 사의를 표시하시고나서 나라의 통일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기본담보는 온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 있다고 하시며 그 방향과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그들을 한품에 안아 영광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민족의 어버이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최기환선생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조선동포들이 굳게 뭉친다면 조국통일은 반드시 이룩될것이라는 희망과 신심이 차넘쳤다. 해외로 돌아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동포들을 조국통일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1994년 7월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뜻밖에 서거하셨다는 청청벽력같은 비보를 접하게 되였다.

한달음에 평양으로 달려온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전에서 피눈물을 흘리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크나큰 상실속에 계시면서도 금수산의사당(당시) 조의식에 참가하였던 최기환선생을 비롯한 해외동포조의대표단성원들을 친히 만나주시고 태양의 넓은 품에 안아 영광의 기념촬영을 해주시고 위로연까지 마련해주시였다.

위로연에 참가한 최기환선생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념원대로 어버이장군님을 받들어 조국통일의 그날을 앞당겨올 맹세를 굳게 다지였으며 민족대단결의 기치아래 동포들을 묶어세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과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길에 바친 그의 공로를 늘 잊지 않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국으로 불러주시는 대해같은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가까이 있는 자식보다 멀리 있는 자식을 두고 늘 마음쓰는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생일 70돐에 즈음하여 최기환선생을 조국으로 또다시 불러주시고 생일상도 차려주시였다.

그리고 위암이라는 불치의 병을 진단받았을 때에는 부인과 함께 조국에 와서 치료와 보양을 받도록 하여주시고 공화국에 영주하도록 크나큰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최기환선생은 날로 더해만가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에 보답할 일념으로 스위스에 돌아가 동포운동을 계속하다가 몸이 불편할 때 오겠다고 하면서 조국을 떠나갔지만 병이 악화되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선군장정의 길을 이어가시는 그처럼 분망하신 속에서도 최기환선생의 건강을 두고 걱정하시며 해당 부문 일군들을 몸소 제네바에 보내시고 그의 병치료에 필요한 장명약을 비롯한 고가약들을 배려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여러차례에 걸쳐 값비싼 보약들도 보내주시였다.

온 겨레를 한품에 안아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뜨거운 동포애를 그대로 이어나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최기환선생이 병환으로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그에게 높은 국가수훈을 안겨주도록 하시고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였다.

대대로 이어지는 절세의 위인들의 은정속에 최기환선생은 오늘 조국통일상수상자, 통일애국인사로 영생의 삶을 빛내이고있다.

 

※ ※

 

최기환동포의 인생행로는 겨레에게 이렇게 깨우치고있다.

- 위인을 따르는 길에 통일애국의 참된 길이 있다.

- 절세의 위인의 두리에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가 하나로 굳게 뭉칠 때 조국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온다.

- 우리 겨레가 안겨살 품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계시는 공화국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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