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푸른 이끼를 털어버린 민족문화유산을 찾아서
예로부터 조선의 5대명산의 하나로 불리워온 구월산,
이 구월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아사봉 동쪽면 절골에는 구월산의 4대사찰중의 하나인 월정사가 자리잡고있다.
얼마전 우리는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 있는 이곳 월정사를 찾았다.
수십년세월 대를 이어 구월산 월정사보존관리에 애국의 땀방울을 묵묵히 바쳐가는 안악군민족유산보호관리소 길병호동무가 우리를 맞았다.
월정사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1 000여년전에 지은 절이다.
울창한 수림과 너럭바위들을 정갈하게 씻어내리며 흐르는 협곡의 맑은 시내물을 좌우에 낀 곳에 자리잡고 갖가지 꽃들과 열매주렁진 감나무들,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들에 둘러싸여있는 월정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고전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듯 한 느낌을 받았다.
월정사에는 그 이름과 관련하여 이런
먼 옛날 아산이라는 한 스님이 아사봉에서 잠을 자고있었는데 꿈속에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꾸짖기를 나라에 외적이 쳐들어오고 사람들은 먹을것이 없어 죽어가고있는데 여기서 잠만 자면 어쩔셈이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손에 무슨 단자를 쥐여주며 동쪽으로 가라고 하였는데 스님이 소스라쳐 깨여나 손을 살펴보니 정말 박달단자가 손에 쥐여져있었다.
그는 너무도 신비스러워 할아버지가 가리켜준대로 동쪽으로 가고 또 갔다.
그러다가 쑥대가 무성한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한상의 부처가 있었다. 부처의 잔등에는 신기하게도 월정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부처님이 있는 곳에 사찰을 지으라는 단군님의 계시다.)
이렇게 생각한 스님은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부처를 모시였으며 자기 이름을 월정이라고 고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월정이라는 스님이 지은 사찰이라고 하여 이 사찰을 월정사라고 부르게 되였다는것이다.
월정사에는 현재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만세루, 명부전, 수월당, 료사가 있으며 석조물로서 세존사리탑과 비, 석교비(1707년), 석인, 부도, 월정사영비가 있다.
구월산을 찾는 사람들은 월정사를 보지 않고 구월산을 다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군 한다.
그것은 월정사가 한폭의 그림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 력사가 오래고 건물의 구조와 형식이 치밀하게 잘 째여져있어 우리 나라 옛 건물을 연구하는데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지고있기때문이다.
천연이끼 오른 태고적의 유적, 월정사가 어떻게 되여 세월의 푸른 이끼를 털어버리고 그 이름을 세상에 빛내이게 되였는지 우리는 길병호동무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였다.
《민족유산보호사업은 선조들이 이룩한 귀중한 정신적 및 물질적유산을 계승발전시켜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고수하고 빛내이기 위한 애국사업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유적들이 그러하지만 월정사에도 민족의 문화재를 제일로 사랑하시는
주체86(1997)년 9월 어느날,
서해명승 구월산을 인민의 유원지로 더 훌륭하게 변모시키기 위해 명승지일대를 현지지도하시던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월정사 관리원을 만나시여 사찰의 래력이며 보존실태에 대해 일일이 알아보신
이어 극락보전으로 걸음을 옮기신
이날 극락보전과 명부전 불상의 얼굴에 금으로 박아넣었던 기미를 일제놈들이 뽑아간 사실을 관리원으로부터 전해들으신
그러시면서
사실 수많은 참관자들이 이곳을 돌아보았지만 옛 건축물에 못과 꺾쇠가 있는가 하는것은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며 력사유적보존관리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이 고적의 품위를 떨구고 사람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줄수 있다는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있었다.
오직 민족의 슬기와 창조적재능이 깃든 문화재라면 그 무엇이라도 귀중히 여기고 대를 이어가며 빛내이시려 그토록 마음쓰신 우리
이날
이렇듯
가꾸어주는 원예사가 있어 아름다운 꽃을 바랄수 있는것처럼 하나의 력사유적유물도 귀중히 여기고 민족의 자랑으로 내세우는 공화국의 옳바른 민족문화유산보존정책이 있기에 오늘 월정사만이 아닌 이 땅의 수많은 력사유적유물들이 민족의 국보로 자랑떨칠수 있는것이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