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예군인미술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온 나라에 서로 돕고 이끄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미풍이 차넘치게 하여 우리 사회를 화목하고 단합된 일심단결의 대가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영예군인미술가라고 부르고있다.

영예군인미술가,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도 들을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부름이다.

결코 례사롭게 대할수 없는 이 부름이 늘 나에게 지나온 나날에 대한 회억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군사임무수행중 뜻하지 않게 부상을 당하고 하반신이 마비된 때는 20대초엽이였다.

그때 나를 괴롭힌것은 일신상에 대한 우려만이 아니였다.

사회의 짐으로나 되지 않을가, 쓸모없는 존재로 벅찬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게 되지나 않을가 하는 두려움이였다.

이런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랑과 정을 기울여주었다.

마음속그늘이 질세라, 생활상 애로가 있을세라 구역의 책임일군들과 인민반주민들이 친혈육이 되여 따뜻이 돌봐주었고 나어린 소년단원들까지도 찾아와 노래도 불러주며 힘을 안겨주었다.

주소도 이름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때없이 찾아와 생활을 보살펴주고 진료소 담당의사선생은 물론 큰 병원의 의사선생님들까지 자주 찾아와 나의 건강을 보살펴주군 하였다.

나날이 뜨거워만 가는 사회적보살핌과 사랑은 나에게 생의 활력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언제부터인가는 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이 사회현실을 화폭에 담고싶은 소원까지 깃들게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방조자의 도움없이는 한걸음도 움직일수 없는 몸이라는 생각이 갈마들며 남모르는 모대김속에 헤매기도 하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수 없는것에 대한 갈망으로 가슴이 타들던 어느날 문득 한사람이 나의 집을 찾아왔다. 청년중앙회관 미술소조 지도교원이였다.

《동무와 같은 영예군인들이 누구보다 보람있는 삶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것이 우리 당의 뜻이요. 우리가 도와주겠으니 용기를 내라구.》

이렇게 나는 미술소조원이 되였다. 그날부터 나의 집에서 이동강의가 진행되였다.

지도교원과 함께 매일과 같이 찾아오는 미술소조원들속에 후날 한생의 길동무가 되여준 나의 안해도 있었다.

몇해후에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또 전해졌다. 내가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여 통신교육을 받게 되였던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또 찾아왔다. 축하의 꽃다발이며 붓과 연필을 안고…

창창한 미래를 펼쳐준 사회주의 내 조국, 남의 일을 제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고마왔다.

물론 영예군인의 몸으로 걸어가는 미술수강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은 의지의 강행군길이였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나를 친혈육처럼 위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영예군인들을 적극 우대하고 내세워주는 사회주의조국의 사랑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고 손에 붓을 억세게 틀어잡군 하였다.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후 내가 안해와 함께 완성한 첫 작품에 축전상과 함께 금메달이 수여되였다.

만사람의 박수갈채속에 상장과 메달을 수여받을 때의 그 감격, 격동속에 체감했던 어머니조국과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정이 지금도 나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다.

나는 그후 안해와 나란히 조선미술가동맹 맹원이 되여 벅찬 시대의 숨결을 화폭에 담았다. 우리의 작품들은 전국적으로 진행된 여러 전람회들에 출품되여 참관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오늘도 나는 힘차게 붓을 달리고있다.

우리 영예군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떠받들어주고 내세워주는 사회주의제도와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진정을 다해 위해주는 친혈육과도 같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의 마음을 안고.

그리고 군사복무시절의 그 나날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조국을 위해 보람있게 수놓아갈 불같은 열의를 안고.

락랑구역 락랑1동 69인민반 강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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