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계의 첫 원사 김지정선생

 

- 별(직업: 연구사, 주소:로씨야) 독자의 요청에 대한 해답기사 -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절세의 위인들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서 지난날 곡절많은 생활의 길을 걸어온 오랜 지식인들도 우리 제도에서 자라난 새 세대 지식인들도 다같이 보람찬 과학탐구의 한길을 걸으며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전사, 제자로서 값높은 삶을 빛내여올수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수학발전과 수학보급사업에 크게 기여한 지식인들가운데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원사 교수 박사 김지정선생도 있다.

고향이 평양인 김지정선생은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향학열이 높았던 김지정선생은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국땅에서 피눈물나는 고학으로 학문을 다지였으며 1935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교편을 잡고 제 나라, 제 민족의 수학자들을 키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식민지민족의 설음은 교단에 선 김지정선생의 가슴속에 뿌리깊은 울분의 상처만을 남겼으며 해방후 서울에서 대학교편을 잡았을 때 역시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하리라던 그의 애국적소망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우리 조국을 또다시 식민지화하려는 미제의 책동을 반대한것으로 하여 대학교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던 김지정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참다운 삶을 누릴수 있었다.

김지정선생을 공화국북반부로 불러주시여 근로인민의 첫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수학강좌(당시) 강좌장으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훌륭한 살림집도 마련해주시고 가정생활도 따뜻이 보살펴주시여 그가 근심없이 마음껏 후대교육사업에 전심할수 있도록 하여주시였다.

나라의 기초과학발전의 토대를 다지는데 공헌한 그는 주체41(1952)년 공화국의 첫 원사들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과학원 물리수학연구소(당시) 소장의 사업을 겸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주시고 몸소 자신의 존함으로 된 표창장도 안겨주시였으며 새해축하장도 여러차례 보내주시였다.

그렇듯 따사로운 태양의 품속에서 김지정선생은 많은 교재와 참고서들을 집필, 번역하여 새 조선의 수학전문가육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자신의 명예보다 나라의 수학발전을 먼저 생각하면서 전공도 주저없이 바꾼 애국적인 수학자였다.

김지정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 수학력학부(당시)에서 오래동안 강좌장으로 사업하면서 우리 나라의 첫 《수학사전 편찬하였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해석수학》, 《실험계획법초보》, 《확률론》, 《실험계획법》, 《실변수함수론》 등의 도서들을 집필하여 나라의 수학발전을 적극 추동하였다.

깨끗함 량심과 원칙적인 요구성, 높은 책임성을 지닌 김지정선생은 나라의 수학분야를 당당하게 떠메고나가는 원사, 후보원사, 교수, 박사들을 수많이 키워냈다.

30대에 세계수학계를 놀래운 재능있는 수학자였던 원사 교수 박사 인민과학자 조주경선생은 생전에 수십년세월 걸음걸음 이끌어준 잊지 못할 스승인 김지정선생에게서 사심 모르는 순결한 량심, 대바르고 고지식한 성품, 불타는 열정 등 교육자로서, 과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신도덕적풍모를 배웠다고 하면서 김지정선생이야말로 우리 나라 수학계의 보배였으며 어버이수령님과 조선로동당밖에 모르는 충신형의 교육자였다고 뜨겁게 추억하였다.

김지정선생은 생의 말년에도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방대한 분량의 현대적인 수학사전을 스스로 맡아 집필한 량심적인 학자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한생토록 살붙이처럼 애용하던 도서 천수백권을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하여 후대교육사업에 이바지하는 애국적소행도 발휘하였다.

우리 당만을 굳게 믿고 보답의 길을 걸어온 김지정선생은 의식이 흐려지는 속에서도 마지막기력을 모아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 부르고 생을 마치였다.

수학계에서의 첫 원사인 김지정선생은 오늘도 공화국의 품속에서 영생하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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