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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2(2023)년 1월 13일
 

조선의 이름난 서예가 한석봉 ​

 

- 왕화용(직업: 서예애호가, 주소: 중국 남경) 독자의 요청에 대한 회답기사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서도 빛나는 전통을 창조한 재능있고 지혜로운 문명한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의 자랑찬 력사에는 남달리 뛰여난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가지고 국력강화와 문화발전에 기여한 우수한 인재들이 수없이 많다. 그중에는 16세기 후반기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한석봉도 있다.

그의 이름은 한호였으나 사람들속에는 한석봉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졌다.

1543년 개성의 빈곤한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떡국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보장해주는 학비로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와 서예공부를 하였다.

그때 벌써 한석봉은 글씨재주가 특출하여 사람들을 놀래웠다. 그러나 한석봉이 명필가로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그의 고심어린 노력이 깃들어있다.

어려서부터 서예에 남다른 취미와 소질을 가지고있던 그였지만 집이 하도 가난하여 먹과 종이를 사기조차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서예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한석봉은 밖에서는 채하동(개성 송악산동쪽의 한 골짜기)의 너럭바위우와 나무잎에 숯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사기그릇에 글씨를 쓰면서 부지런히 련습하였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썼던지 어느날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숯으로 바위와 나무잎에 쓴 글이 씻기여 골안에 먹물처럼 도랑져 흘러 채하동아래 골짜기는 《먹적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였다고 한다.

그가 사람들을 경탄시키는 유명한 서예가로 되기까지에는 어머니의 교양과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일찌기 남편을 잃은 한석봉의 어머니는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아들만은 공부를 시킬 결심을 굳히였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씨에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있는 아들을 어떻게 하나 잘 키우리라 결심하고 석봉이를 10년을 기한으로 먼곳에 있는 외가친척벌되는 훈장집으로 보내여 글씨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동안 어머니는 항상 자기의 떡만드는 일을 아들의 글씨공부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떡을 더 맛있고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어느덧 세월이 흘러 7년째 되는 해 어느날 한석봉은 어머니가 그립고 글씨공부도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어머니는 자신만만해하는 아들에게 《그럼 한번 시험쳐보자.》고 하고는 등불을 껐다. 그리고는 어두운 속에서 그더러 글을 쓰라고 하고는 자기는 떡을 썰겠다고 하였다.

내기를 한 결과 어머니가 썬 떡은 어느것이나 차이가 없이 크기가 고르로운데 석봉의 글씨는 획이 고르롭지 못하고 크기도 같지 않았다.

어머니는 7년만에 만나보는 아들이였지만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은 자식을 엄하게 꾸짖었다.

《이제 곧 당장 떠나거라. 그리고 3년을 마저 채우기 전에는 집문턱을 넘어서지 말아라.》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한석봉은 《어머니를 모시고 글공부를 계속하겠으니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아들을 곁에 두고싶은 마음이 어머니인들 오죽하였으랴.

하지만 그는 아들이 나라의 기둥감이 되기를 바라며 자식의 등을 서슴없이 떠밀었다.

하여 한석봉은 그날로 집을 나서게 되였다.

10년동안 그는 어머니의 당부를 한시도 잊지 않고 붓글련습을 꾸준히 하였다.

이런 어머니의 엄격한 교양과 보살핌속에서 한석봉은 마침내 명필가로서의 이름을 떨칠수 있었던것이다.

한석봉은 글씨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높은 탐구심을 가지고 우리 나라의 력대 서예가들은 물론 다른 나라 명필가들의 글씨도 깊이 연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는 여러가지 글체의 묘법을 체득하게 되였으며 마침내 독자적인 필체와 서풍인 《석봉체》를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필법의 특징은 자기의 독특한 개성이 있는데 있다. 그의 글씨는 천군만마가 내달리는듯 기세차고 시위를 끌어당긴 활처럼 무엇이 당장 터져나올듯이 힘찬것으로 하여 누가 보든지 다른 사람이 쓴 글씨와 확연히 구별되였다.

그는 서체에 있어서도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등 모든 서체에 능통하였고 작은 글씨와 큰 글씨 할것없이 자유자재로 묘기와 특기를 발휘하여 당대 그 어느 서예가도 따르지 못하는 명필가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사람들은 한석봉을 안평대군 리용, 김구, 양사언과 함께 조선봉건왕조시기의 4대명필가로 꼽았는데 그중에서도 한석봉을 첫자리에 놓았다.

그가 명필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조선봉건왕조에서는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 항상 그를 사자관(글쓰는 관리)으로 참가시켰으며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그에게 글을 씌우군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글씨솜씨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높이 평가되였다.

한석봉이 얼마나 글씨를 잘 썼는지 당시 명나라의 서예가들은 석봉의 글씨를 보고 력대로 중국에서 일러오는 유명한 명필가인 왕희지를 릉가한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조선에 왔던 명나라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물처럼 여기면서 저마다 구해가지고갔다고 한다.

한석봉의 글씨는 현재 그의 필적을 묶은 《석봉필적》, 《석봉서법》과 그가 쓴 《석봉천자문》을 비롯하여 개성의 서화담신도비, 선죽교비, 남대문현판과 고양의 행주승전비, 파주의 익양군순평공덕비 등에 그대로 남아 전해지고있다.


- 개성의 남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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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화용 | 중국남경 | 서예애호가        [2023-01-28]

조선의 이름난 명필 한석봉!

저의 요청을 들어주신 관리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의 오늘》홈페지에 소개된 고화 《씨름》의 창작가인 김홍도의 출생년도와 그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워 | 해외 | 연구사        [2023-01-17]

7년만에 돌아온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와의 겨루기에 대한 일화는 아무리 읽어도 싫지 않습니다. 이 일화는 조선녀성들의 강인성과 자기 자식에 대한 참된 사랑이 어떤것인지를 잘 반영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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