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교가 생겨나게 된 사연
우리 공화국에서 아이들은 나라의 왕으로 떠받들리우며 마음껏 배우고 고운 꿈과 희망을 활짝 꽃피우고있다.
내 조국의 자랑찬 이 현실은 어린이들과 학생소년들을 억만금의 금은보화에도 비길수 없는 귀중한 보배로, 희망과 미래의 전부로 여기시며 아이들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신
그에 대한 하많은 사실들가운데는 분교가 생겨나게 된 이야기도 있다.
《후대들을 위해서는 아까울것이 없습니다.》
해방의 새봄을 맞이한 조국땅이 끝없는 환희와 기쁨으로 설레이고 새 생활창조에 일떠선 인민들의 힘찬 노래소리가 온 강산에 울려퍼지던 주체36(1947)년 9월말 어느날이였다.
인민의 새 나라를 세우시려 끊임없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길가에서 몇명의 학생들이 한데 몰켜 서성거리고있었다.
이것을 보신
함께 공부하는 동무가 앞산에 있는 학교에서 내려오지 않아 기다리고있다는 그들의 말을 들으신
양암성이라고 일러오는 그 성안에는 옛날부터 향교가 있었는데 마을에 새 학교를 지을 때까지 그 향교건물을 림시교사로 리용하고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학교학생들이였는데 집이 멀어 혼자 떨어지면 갈수 없기때문에 공부가 끝나면 이렇게 서로 기다렸다가 모두 함께 가군 하였던것이다.
학생들의 말을 통하여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되신
그 물으심에 한 학생이 아호비령밑에서 다니는 동무도 있는데 거리가 약 40리가량 된다고 말씀드렸다.
허리에 흰구름을 두르고 저멀리 아득히 솟은 아호비령쪽으로 눈길을 주신채 40리나 되는 곳에 다닌단 말이지, 너무 멀구만라고 누구에게라없이 조용히 되뇌이시던
그에 대한 학생들의 말을 다 들으신
그러자 한 학생이 한발 나서며 《일없습니다. 해방전에는 학교에 가고싶어도 학교가 없어 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한동안 아무 말씀없이 학생들의 옷차림을 바로잡아주시던
그러시면서 나라가 해방된지 두해밖에 되지 않아 모든것이 부족하고 하여야 할 일도 많지만 무엇보다먼저 여기 실정과 같은 모든 곳에 하루빨리 분교를 내오도록 하여 우리 어린이들이 먼데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시였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후대교육에 대한
분교!
참으로 그것은 중중첩첩 시련이 가로놓였던 건국의 첫새벽에 그 누구도 생각할수 없었던 문제였다.
오직 후대들에 대한 사랑을 천품으로 지니신
그때로부터 우리 공화국에는 분교가 많이 생겨났으며 오늘은 외진 섬마을이나 림산마을을 비롯하여 그 어디에나 학생들이 있는 곳이면 사랑의 분교가 배움의 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반겨맞고있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