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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1(2022)년 6월 27일
 

민족의 우수성을 전하여주는 또 하나의 귀중한 력사적재보​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실장과 《조선의 오늘》 기자가 나눈 대담 -


공화국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문화성 민족유산보호국 조선민족유산보존사의 연구사들이 최근 개성시 해선리에서 고려 25대왕이였던 경효(충렬)왕의 무덤을 새로 발굴한 소식은 학계와 사회계의 커다란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키였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발굴을 책임졌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실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 이번에 발굴한 무덤의 주인공인 고려 25대왕 경효(충렬)는 어떤 사람이며 왜 아직까지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있었는가?

실장: 이 문제에 대한 리해를 옳게 가지자면 우리 민족사와 더불어 전해오는 고려시기 왕릉들의 존재여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에 의해 건립된 후 1392년 마지막왕이였던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4대에 걸쳐 474년동안 존재하였다.

경효(충렬)는 고려의 25대왕으로서 1236년에 고려 24대왕 원종의 맏아들로 출생하여 30여년동안 왕위에 있다가 72살이 되던 1308년에 사망하였다.

경효왕은 사망후 왕족의 관례에 따라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무덤은 경릉으로 명명되였다.

근 500년에 걸치는 존속기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령역에서 동방의 강국으로 이름떨친 고려의 왕릉들은 조선봉건왕조시기까지 조상대대로 계승되여온 관례대로 잘 보존되여왔다.

그러나 20세기초엽에 이르러 일제의 악랄한 조선민족말살책동으로 말미암아 고려의 왕릉들은 무참히 도굴당하게 되였으며 그 모습조차 알아볼수 없게 파괴당하였다.

불우한 력사의 이끼속에 파묻혀있던 고려시기의 왕릉들은 민족재생의 은인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잃었던 우리 조국을 찾아주신 그때부터 자기의 모습을 되찾게 되였다.

반만년의 유구한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누구보다도 귀중히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학자들에게 고려왕조가 34대까지 내려왔으므로 아직까지 찾지 못한 왕릉이 어디에든지 흔적이라도 있을것이라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왕릉들을 모두 찾아 후대들에게 물려줄데 대하여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고고학계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하여 지난 수십년동안 개성일대에 대한 현지조사발굴과 문헌연구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왔으며 그 과정에 19개의 고려왕릉들을 고증하고 6개의 고려왕릉들을 새로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경효(충렬)왕의 무덤을 비롯한 9개의 왕릉들의 흔적은 좀처럼 나지지 않았다.

기자: 그러면 수백년동안 땅속에 파묻힌채 문헌기록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던 경릉을 과연 어떻게 찾아내게 되였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으면 한다.

실장: 우리 연구집단은 지난 시기의 발굴경험에 토대하여 이미 여러개의 고려왕릉들이 알려진 개성시 해선리 명릉동골안의 지형지세에 주목을 돌리였다.

명릉동골안은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만수산줄기에서 남쪽으로 갈라져나온 산릉선에 위치하고있는 경치좋은 곳으로서 중세시기에 널리 성행되던 《지리풍수설》에 부합되는 명당자리라고 말할수 있다.

또한 명릉동골안에서 반경 3~4㎞범위안에는 고려태조 왕건왕릉을 비롯한 고려시기의 왕릉들이 분포되여있다.

특히 경효(충렬)왕의 안해(안평공주)의 무덤인 고릉도 이 골안에 있다.

명릉동골안의 이러한 특징들은 많은것을 시사해주고있으므로 우리 연구집단은 이 골안에 반드시 또 다른 왕릉급무덤이 있을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주체110(2021)년 이곳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를 진행하던 과정에 마침내 명릉동골안의 산중턱에서 큼직한 무덤무지를 찾아내였다.

무덤은 발굴당시 천정과 뒤벽이 심히 파괴되여있었으며 천정막음돌 한쪽모서리에는 폭파를 시도했던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발파구멍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무덤내부의 벽면들에 그려져있던 벽화들은 모두 예리한것으로 갉아버려 벽화의 형체도 찾아볼수 없었으며 다만 바닥에 벽화쪼각들만 여기저기 딩굴고있었다.

우리는 수개월에 걸쳐 무덤의 내부 및 외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무덤은 지하에 만들어진 외칸으로 된 돌칸흙무덤으로서 무덤칸의 동벽과 서벽, 북벽은 잘 가공된 화강석판돌을 5층으로 쌓아 만들어져있다.

동벽에서 주목되는것은 네번째 층의 중간부분에 자그마한 구멍이 나있는것이였는데 이것은 안해와의 《혼》이 통하는 구멍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또한 무덤에서는 당시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붙여줄 때 리용되는 옥책(대리석으로 만든 책)의 일부분과 금도금한 철제품, 청자쪼각을 비롯한 여러가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이상의 실물자료들은 이 무덤이 일반무덤이 아니라 왕릉급에 속하는 무덤이라는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 무덤칸의 동쪽벽축조상태와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 -


기자: 하다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고려 25대왕이였던 경효(충렬)왕이라는것을 어떻게 밝히였는가?

실장: 우리는 옛 문헌기록들에 대한 조사와 이미 알려진 왕릉들과 비교분석하는 과정에 무덤의 주인공이 고려 25대왕이였던 경효(충렬)왕이라는것을 찾았다.

옛 문헌들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중경지》에는 경효(충렬)왕의 무덤인 경릉이 개성부에서 서쪽으로 12리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되여있는데 이 무덤도 당시 개성부가 위치하고있던 만월대근방에서 서쪽으로 5㎞ 즉 12리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또한 《고려사》에는 고려 25대왕 경효(충렬)의 아들인 고려 26대왕 선효(충선)가 자기 어머니(안평공주)의 무덤인 고릉을 돌아보고 불길한 장소에 무덤자리를 잡았다고 하여 당시 관계자들을 처벌한 다음 즉시 새로 건설된 아버지의 무덤인 경릉을 돌아보고는 만족하여 공사에 참가하였던 관리들과 역군들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놓고볼 때 경효(충렬)왕의 안해의 무덤인 고릉과 이번에 발굴한 무덤사이의 거리는 250m정도로서 지형지세를 분석해보면 《고려사》의 기록과 비교적 일치하였다.

또한 경효(충렬)왕의 안해였던 안평공주의 무덤인 고릉이 동쪽가까이에 있는것을 고려해볼 때 이 무덤칸의 동벽중심에 설치된 《혼》구멍은 그들부부간의 《혼》이 서로 통할수 있도록 내주었다고 볼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 무덤의 외부 및 내부구조와 유물들을 놓고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볼 때 무덤의 축조년대를 13세기말~14세기로 볼수 있었으며 이것은 고려 25대왕 경효(충렬)의 생존년대(1236년―1308년)와 거의 같았다.

이상의 조사와 비교 및 분석을 통하여 연구집단은 이 무덤이 다름아닌 고려의 25대왕 경효(충렬)의 무덤인 경릉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게 되였다.

기자: 그러면 경릉발굴이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무엇인가?

실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고학학회에서는 이번에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굴된 무덤의 건축형식과 규모, 유물들에 대한 과학적자료들을 심의하고 이 무덤이 고려 25대왕이였던 경효(충렬)왕의 무덤이라는데 대하여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또 하나의 고려왕릉이 발굴고증된것은 고려후반기 왕릉제도, 고려도자 및 금속가공기술연구에서 중요한 학술적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였다.

이번 발굴을 통하여 우리는 민족사에 첫 통일국가로 기록된 고려의 웅건한 모습을 또다시 감회깊이 돌이켜보게 되였다.

왕릉의 벽체를 이루고있는 5~15t 되는 무거운 화강석들은 당시 고려인민들의 높은 창조적지혜와 뛰여난 재능을 잘 보여주고있으며 동시에 막강한 봉건국가였던 고려의 무거운 제도적중압과 경제적위력을 그대로 과시하고있다.

또한 옥책과 금속세공품, 청자쪼각, 벽화쪼각들은 당시 동방문화의 선진국이였던 고려의 높은 문화적수준과 그를 통한 고려의 높은 대외적권위를 엿볼수 있게 한다.

기자: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 감사하다. 고려시기의 왕릉이 또다시 발굴된것은 우리 조선민족이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민족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될것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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