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군님의 야전솜옷
어버이장군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더욱더 심장을 끓이는 12월이다.
어제 저녁에도 나의 발걸음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동상을 높이 모신 만수대언덕으로 향했다.
금방 어느 공장에서 돌아오신듯, 또 어느 초소를 찾아가시려는듯 야전복차림 그대로 서계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동상을 우러르느라니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우리 장군님 고난의 행군때부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나날까지 입으셨던 야전솜옷.
이렇게 조용히 외우느라니 몇해전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우리 공장에 찾아오시여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비단실을 만져보시며 비단옷을 입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시다가 문득 갈리신 음성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 2009년 1월 15일 이곳에 오시여 비단실이 쌓여있는것을 보시며 자신께서는 비단옷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하였다고 교시하시였다는데 우리 장군님은 한평생 인민복과 야전복을 입으시고 인민을 위한 험한 길을 걷고 또 걸으시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눈물없이는 받아안을수 없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그 말씀, 우리들은 인민들에게 비단옷을 해입히시려 그리도 마음쓰시면서도 한평생 수수한 잠바옷과 야전솜옷만을 입으시고 현지지도의 길을 걸으신 어버이장군님의 숭고한 풍모가 가슴저리게 안겨와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자신도 근로하는 인민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한평생 그 어떤 특전이나 특혜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인민들과 꼭같이 검박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신 우리 장군님, 인민들을 위해서는 억만금도 아끼지 않으시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남기지 않으시고 옷 한벌 새로 만드는것마저 불허하신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추대되신 후 첫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였을 때 입으시였던 옷은 그이께서 그로부터 17년전 외국방문을 진행하실 때 입으시였던 옷이였다.
새옷을 지어드리려는 일군들을 엄하게 만류하시며 인민들에게 아직 좋은 옷을 마음껏 해입히지 못하고있는데 내가 새옷을 입고 간들 마음이 편하겠는가고 하시며 17년전의 옷을 그대로 입으시고 외국방문의 길에 오르시였던 우리 장군님께서는 혁명생애의 마지막나날까지 수수한 잠바옷과 한벌의 야전솜옷을 입으시고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의 강행군길을 이어가시였다.
하기에 위대한 장군님과 영결하던 10년전 그날 어버이장군님께 변변한 솜옷 한벌 마련해드리지 못한것이 천추의 한으로 맺혀, 일을 쓰게 못하여 색날은 야전복을 벗겨드리지 못한것이 너무도 가슴에 사무쳐 우리 공장 로동자들은 땅을 치며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야전솜옷자락을 날리시며 서계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동상을 우러르면서 더욱 굳게 맹세다졌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위대한 장군님의 애국념원, 강국념원을 이 땅우에 현실로 꽃피우는데 나의 모든것을 다 바치겠다는것을.
김정숙평양제사공장 1직장 2작업반 반장 배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