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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0(2021)년 10월 15일
 

직업 (1)

 

나의 직업은 위생시설수리공이다.

누구나 선뜻 선택하기 쉽지 않은 이 일을 오래동안 해오고있는 나를 보고 언제인가 조국을 방문하였던 한 해외동포는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말하는 〈천한 직업〉에서 한생 험하고 궂은일을 무슨 재미로 하고있는가?》

그의 질문을 받고보니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하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1960년 8월이였다.

부푸는 희망에 넘쳐 중학교(당시)졸업을 앞두고있던 어느날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낯익은 길에 나섰다.

신의주시 어느 한 수원지의 물뽐프운전공이였던 나의 아버지는 6남매중에서 나를 각별히 애지중지하였다. 아버지는 늘 나를 데리고 수원지에 나가서는 설비들에 대하여, 그 원리와 운전조작법에 대하여 하나하나 품들여 설명해주군 하였다.

그날도 설비를 깐깐히 점검하고난 아버지는 문득 이렇게 말하였다.

《난 네가 여기서 함께 일했으면 한다.》

대학입학을 희망하던 나에게 있어서 상하수도를 관리하는 일은 시대의 용용한 흐름과는 거리가 먼 하찮은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때 아버지는 이야기하였다.

《여긴 네가 태를 묻은 곳이다. 우리 가정이 이 수원지에서 해방을 맞이했지.》

해방전 나의 아버지는 직업이 없는 막벌이군이였다. 가정을 먹여살릴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몸을 내댔다.

나라가 해방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벽동으로 가지 않고 수원지에 그냥 눌러앉았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는 상하수도망이 잘 정비된 도시가 없었다. 일제놈들은 상하수도까지 자기들이 사는 곳에만 만들었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건국의 초행길에서 일감이 많으셨지만 도시들에 상하수도망을 형성하는데 큰 관심을 돌리시였다. 수령님의 그 뜻을 받들어 나와 네 어머니는 여기 수원지에 그대로 남아 건국사업에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토록 정을 다해 지켜가고있는 일터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렇게 되여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뒤를 이어 도시경영부문에서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떼게 되였다.

그렇지만 한창 맵시를 볼 꽃나이처녀시절에 목긴 고무장화를 신고 궂은일을 하다가 동창생들의 눈길과 마주칠 때면 부끄러운 생각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느날 나는 끝내 작업반장아바이한테 참고참았던 말을 쏟고야말았다.

다른 일은 얼마든지 하겠지만 이 일만은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나의 등을 다독이며 작업반장은 조용히 말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물을 쳐내고 도시를 깨끗이 하는 일은 인민들에게 복무하는 영예로운 일이라고 가르쳐주셨단다.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더 존경할것이라고 하시였지.》

작업반장의 이 말은 나의 귀전에 계속 맴돌았다. (계속)

신의주물정화사업소 위생시설수리공 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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