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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0(2021)년 7월 31일
 

행복의 절정에 우리 삽니다(1)

 

언제인가 나는 과학교류사업으로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간적이 있었다.

국제발명 및 새 기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금상을 받은 나에게 그 나라의 한 이름있는 기업가가 찾아와 자기 기업체의 기술고문이 되여달라고 하였다.

호화주택, 고급승용차, 최상급의 연구조건과 거액의 리윤…

이만하면 아마 내가 마다하지 않을것이라고 짐작한듯 기업가는 무척 기대어린 눈길을 나에게 보내였다.

그때 나는 단마디로 《아니, 난 내 나라가 더 좋소.》라고 말해주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다 후련해지군 한다.

나는 남조선과 자본주의일본에서도 살아본 사람이다.

고향은 저 멀리 제주도의 서귀포, 무척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였지만 나라를 빼앗겼던 해방전 그 세월의 고향에 대한 나의 어릴적 추억은 눈물겨운것이였다.

그 세월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저주로운 왜놈의 세상에서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고 하며 온 가족이 보가지알을 먹었던 일, 부모님들을 따라 행여나 하는 기대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조선사람이라는 리유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더욱 가난에 쪼들리던 일...

그러던 어느날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와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다시 현해탄너머 제주도로 떠나보냈다.

고향땅에 돌아와 아버지없이 두 자식을 키우는 어려운 속에서도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머리가 좋아 마을사람들속에서 신동이라고 불리우던 나만은 어떻게 하나 공부를 시키고싶어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한창 학교를 다니던 때인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 15살밖에 안되던 나는 어머니의 권고로 아버지가 있는 일본땅으로 다시 건너가게 되였다.

간난신고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반가움보다 욕을 앞세웠다.

《이 철없는것아, 여긴 왜 왔느냐? 고향땅이나 이 일본땅이나 다 우리 같은 놈은 목숨도 건사하기 힘든 곳인줄 모르느냐?》

아버지를 만나면 밥술도 뜨고 그렇게 하고싶은 공부도 다시 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 험악한 세상에 나를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때 보가지알을 먹고 콱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다 들었다.

아버지와 나는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했다. 저주러운 세상에 도전하려는 모진 마음을 안고 고학을 시작했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신문배달, 그것만으로는 학비를 충당할수 없어 우유배달과 심지어 전등알장사까지 하였다.

그렇게 몇해가 흘러 마침내 나에게도 어머니조국의 따스한 손길이 와닿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본땅에서 생활상곤난으로 상급학교에 못 가는 동포학생들을 조국의 대학에 진학시켜 공부시킬데 대한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던것이다. 바로 그 은정속에 나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운 첫 귀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제1차 조국진학생으로서 귀국의 배길에 오르게 되였다.

꿈결에도 그립던 조국의 포옹은 정말로 뜨겁고 열렬했다.

사회주의조국에 와서 나는 울보가 되여버렸다.

소학교 교원이 되는것이 희망의 전부였던 내가 돈 한푼 내지 않고 배움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을 때에도 울었고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이 어린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장학금을 받을 때에도 울었다.

과학과 기술로 내 조국을 떠받들자. 그래서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에 꼭 보답하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당시) 학생이 된 나는 그날부터 잠자는것을 잊어버렸다. 온 넋을 태워 나는 한계단한계단 지식의 탑을 쌓아나갔다.


김일성종합대학 첨단기술개발원 전자재료연구소 연구사 김상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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