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로!
《제대군인동무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속의 군복을 벗지 말고 병사시절에 체득한 군인정신, 군인본때, 군인기질로 당이 가리키는 혁명의 길, 애국의 길을 따라
우리 가정에는 색날은 한장의 사진이 있다.
대덕산의 천년바위우에 새겨진 《일당백》구호앞, 쩍 벌어진 어깨우에 묵직한 함마자루를 올려놓고 호함진 웃음을 함뿍 담은채 수건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는 특무장의 모습, 1960년대 대덕산초병이였던 나의 아버지의 사진이다. 홍안의 그 시절 기백과 용기로 가득찬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수십년세월은 깊숙이 새겨놓은 주름과 함께 수북한 장미에도, 숱적어진 머리에도 흰서리가 소복이 내려앉은 헌걸찬 로인의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것이 있다. 인생황혼기에 추억으로만 사는 늙은이라고는 볼수 없는 씩씩하고 패기있는 군인본때, 군인기질이였다.
며칠전 설명절날 아침 나는 안해와 딸과 함께 설인사를 드리려고 부모님들의 집으로 찾아갔었다.
려명거리의 상징인양 쌍기둥을 이루며 현대적으로 일떠선 초고층살림집의 10층에는
《딸랑!》소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의 딸은 할머니에게 설인사를 나붓이 하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할아버진 지금 론쟁중이란다.》 하고 대답하는것이였다.
《론쟁?》
어리둥절해하는 딸이였지만 나에게는 십분 리해가 가는 소리였다.
서재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퍽 낯이 익은 로교수들이 모여앉아 열띤 론쟁을 벌리고있었다. 서로 갑론을박하기도 하고 적극 긍정하기도 하면서 벌리는 로교수들의 진지한 토론은 언제 끝날지 모를듯싶었다. 언제나와 같이 오늘도 론쟁의 중심에는 나의 아버지가 서있었다.
서재에 들어선 나의 딸이 《할아버지!》 하고 불러서야 아버지는 이야기를 멈추고 손녀를 반겨주시는것이였다.
《어이쿠, 내 손녀가 왔구나. 하하하!~》
《령감님들의 신성불가침의 일과를 손녀가 깨버렸수다.》
등뒤에서 울리는 어머니의 즐거운 지청구였다. 어머니의 말처럼 이제는 교단을 내리신지 근 10년세월이 흘렀지만 아버지의 집필과 로학자들과의 토론시간은 변함이 없었고 그 《일과》는 가정의 《법도》처럼 고수되는 신성불가침의 시간이였다.
온 가정이 모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올렸다.
《아버님, 이제는 교편을 놓으신지도 퍼그나 되시고 또 나이도 많으신데 집필사업을 그만두셔도…》
《무슨 소릴!》
말이 채 끊나기도 전에 나에게 엄한 시선을 보내던 아버지는 이윽하여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글쎄, 네 말이 옳을수도 있다. 내가 걷던 길을 이제는 네가 이어가고있구 또 내가 집필을 그만둔다구 누가 탓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는 대덕산초소의 옛 병사이구 당원이야. 이번에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2차전원회의에서 우리
앞으론 그런 소릴랑 아예 하지 말아. 군복을 입었을 때나 벗었을 때나 병사의 걸음은 언제나 당과 보폭을 함께 하는 정보여야 한다.…》
그 무엇이라 이름하기 어려운 충격이 가슴을 쿵 울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병사의 걸음은 언제나 정보여야 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외원쑤들의 발악적책동이 극도에 달했던 지난 세기 60년대중엽
방의 제일 밝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영광의 기념사진들이며 중요정치행사들의 대표증들, 박사, 교수의 학위학직증서들과 메달들, 발명 및 창의고안증서들과 과학기술축전들에서 받은 상장들, 수십년동안 집필한 백수십건의 과학론문들과 수십건의 학과목교재들은
나는 아버지의
나도 언제나 아버지처럼 후대교육사업에서 자그마한 탈선도 없이 오직 곧바로, 변함없는 정보로 걸어가겠다.
병사시절의 그 발걸음으로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원 리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