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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8(2019)년 3월 1일
 

3. 1인민봉기의 력사적의의

 

력사적인 3. 1인민봉기가 있은 때로부터 어느덧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3. 1인민봉기는 그 력사적의의로 하여 오늘도 우리 겨레의 심장마다에 깊이 자리잡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3. 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사람들은 우리 인민이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인민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가진 인민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

이 봉기로 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3. 1인민봉기는 일제침략자들에게 거족적으로 대항해나선 우리 민족의 장엄한 독립운동이였다. 비록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에 의하여 3. 1인민봉기는 실패하였지만 그것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사에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진다.

3. 1인민봉기가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무엇보다도 이 투쟁을 통하여 슬기롭고 용감한 조선인민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굴할줄 모르는 투지가 뚜렷이 과시되였다는데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쌓이고쌓인 조선인민의 민족적울분과 사무친 원한은 마침내 1919년 3월 1일에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강도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두고 가슴을 치며 통탄하던 조선민족은 남자와 녀자, 늙은이와 젊은이 할것없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일제강점자들을 반대하는 항쟁의 거리, 투쟁의 마당으로 떨쳐나섰다.

력사적인 3. 1인민봉기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먼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의 앞장에는 평양숭실학교(당시)의 애국적청년학생들이 서있었다.

전민족적인 3. 1인민봉기의 첫 봉화를 지펴올린 평양시민들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은 각지 인민들을 반일항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그 불길은 평양, 서울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당시의 평안남도 남포, 안주, 평안북도 의주, 선천, 함경남도 원산(오늘의 강원도 원산) 등지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평양과 서울의 시위를 발단으로 봉기는 3월중순에 이르러 전국의 13개 도를 모두 휩쓸고 중국의 상해, 연해주와 하와이 등 해외에 있는 조선동포들에게까지 파급되여 전민족적인 항쟁으로 번져갔다. 그때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직업과 신앙, 남녀로소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 다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전민족적인 항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된 3. 1인민봉기는 조선사람들이야말로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인민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가진 인민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

3. 1인민봉기가 가지는 력사적의의는 다음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조선인민의 민족적각성을 크게 높여주었다는데 있다.

당시 평화적시위의 형태로 시작된 3. 1인민봉기는 시간이 감에 따라 폭동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하였다.

3월 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당시)의 수백명 농민들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모조리 파괴한 다음 무기를 로획하였다. 같은 날 남포지방에서도 시민 100여명이 폭동에 떨쳐나 일제경찰서와 식민지통치기관인 부청을 습격하는 과감한 투쟁을 벌렸다.

4월 1일 하루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60회이상의 투쟁이 있었는데 그중 폭력투쟁만 하여도 28회나 되였다.

3. 1인민봉기에 가장 광범히 참가한것은 농민대중이였으며 당시 로동계급은 아직 발생기에 처하여있던 청소한 계급이였으나 파업을 일으키고 시위와 폭동의 앞장에 서서 용감히 싸워 반제투쟁에서의 완강성과 전투성, 단결력과 조직성을 잘 보여주었다. 선진사상에 민감하고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싸우려는 의지가 강한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은 각계각층 인민들에게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는 한편 시위와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정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청소년학생들이 보여준 희생적인 투쟁모습은 다음의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평안북도 철산군 인민들의 시위투쟁때 대오의 앞장에 서서 용감히 싸우던 한 소년은 적의 흉탄에 맞고 칼에 찔리여 숨을 거두면서도 자기 어머니와 마을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열렬히 호소하였다.

《나의 가슴에 상처가 열인지 백인지 계산해주시오. … 불을 지르리라, 나의 가슴에 끓던 피의 방울방울이 불꽃이 되여 왜놈의 나라를 태워버리리라, 그것을 모조리 태워 없애지 못하면 그것을 물어뜯고 물어삼키기라도 하리라.》

이것은 비단 그 한사람만의 불타는 심장의 웨침이 아니였다. 그것은 수천수만의 조선소년들의 심장의 고동이였고 2천만 겨레의 애국의 웨침이였다.

수공업자들과 상인들도 일제히 문을 닫고 애국적인 투쟁을 벌리였으며 이밖에도 일제 관청 및 기관에 복무하는 하급관리들과 사무원들도 참가하였다.

당시 일제는 전국도처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수많은 애국자들을 검거투옥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기간에 국내에서만 하여도 4만 6 700여명에 달하는 애국적인민들이 체포투옥되였다. 반일인민봉기의 전기간 일제의 총칼에 맞아 쓰러진 조선사람의 수는 10여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제는 류혈적인 탄압으로써도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정신과 의지를 말살할수 없었다.

3. 1인민봉기의 력사적의의는 다음으로 식민지예속국가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발전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는데 있다.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한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반일항쟁은 아시아의 피압박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발전에 커다란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3. 1인민봉기는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전민족적애국투쟁으로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3. 1인민봉기가 일어난 때로부터 한세기가 흘렀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애국선렬들의 불굴의 기개와 넋을 이어 민족자주의 기치높이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것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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