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인민만을 마음속에 안고사신 절세위인을 우러러​

 

리길송


뜻깊은 광명성절을 맞고보니 인민의 행복속에 기쁨을 찾으시며 한평생 인민사랑의 자욱을 새겨가신 우리 장군님의 애민의 력사가 안겨와 눈굽이 더더욱 뜨거워진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장군님의 애국의 마음에는 언제나 인민이라는 두글자가 꽉 차있었습니다.

우리 장군님 어찌하여 인민이라는 두글자만을 간직하시고 인민을 위해 한생을 초불처럼 깡그리 불태우시였던가.

바로 인민을 떠난 생의 목적이나 리념이 따로 있을수 없기에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시며 위대한 생애의 전기간 연 167만 4 610여리에 달하는 헌신의 강행군길을 달려 전국의 1만 4 290여개 단위를 찾으신 우리 장군님이시다.

당의 높은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여러 도들에서 당사업을 책임지고 하면서 나는 어버이장군님의 숭고한 인민사랑을 매일, 매순간 페부로 절감하였다.

뜻깊은 2월 16일을 맞으며 내가 체험한 하많은 이야기들중에서 일부만이라도 후세에 전하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가 없어 이렇게 붓을 들었다.


인민들의 건강을 첫자리에 놓으시고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건강하여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에 찾아가 검진을 받고 치료대책을 세운다.

더우기 세계적으로 국가수반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검진과 함께 정규적인 휴식이 공식화된 하나의 준칙으로 되고있다.

하지만 우리 장군님께서는 한초가 한시간이 되여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분과 초를 아껴 일하시느라 늘 눈에 충혈이 지셨지만 자신보다 인민들의 건강부터 먼저 생각하시며 주실수 있는 사랑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주체66(1977)년 6월 21일 깊은 밤 당시 함경남도의 당사업을 책임지고있던 나를 부르신 장군님께서는 도내 로동자들의 생활에서 제기되는것을 알아보자고 불렀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당시 흥남비료련합기업소에서는 시비년도비료생산계획을 미달하여 나라의 전반적인 농사에 지장을 주고있는 문제로 당에 걱정을 끼쳐드리였기때문이다. 그런데 비료생산과는 전혀 관련없는 로동자들의 생활을 두고 걱정하시며 밤깊도록 잠못 이르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인민사랑에 격정을 금치 못하면서 나는 일부 나이많은 로동자들이 이발이 든든치 못해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고있다고 허물없이 대답올리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왜 이제야 그에 대하여 말하는가고 하시며 일군들은 생산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로동자들의 건강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엄하게 타이르시였다.

내가 도에 있는 구강병원을 보강하여 구강병치료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겠다고 말씀올리자 장군님께서는 병원을 새로 지을바에는 현대적으로 잘 지어야 한다고, 당에서 도와주겠으니 안을 세워 제기하라고 이르시고나서 그러면 지금 당장 이발이 나빠서 치료받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고 걱정하시였다.

잠시후 내각과 보건부문의 일군들을 전화로 찾으신 장군님께서는 전국의 구강병전문가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짧은 기간내에 흥남지구 로동자들의 이발을 집중검진하고 치료사업을 조직할데 대한 지시를 하달하시였다.

하여 시비년도비료고지의 마지막돌파구를 열어제끼는 치렬한 전투가 낮에 밤을 이어 계속되고있던 때에 한쪽에서는 흥남땅이 생겨 처음으로 구강병집중검진과 집중치료사업이 벌어져 수많은 로동자들이 한날한시에 새 이발을 해넣는 전투가 벌어졌고 한쪽에서는 구강병예방원을 건설하기 위한 설계안이 작성되였다.

어버이장군님께서 파견해주신 구강병전문가들과 함께 설비명세안을 작성하던 나는 그 값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엄청난 현실앞에서 깜짝 놀랐다. 토론끝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이름있다는 전문구강병원들의 규모에 맞추어 당초에 예견했던 대수보다 줄인 설비명세안을 작성하여 장군님께 보고드리였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처음에 예견하였던것보다도 두배나 대수를 늘여서 설비구입문건을 비준해주시고나서 설비를 지체없이 사들여오도록 대책까지 세워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다른 나라에서는 왕들만이 사용하는 값비싼 설비들에 수수천년 《말하는 도구》로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아오던 로동자들이 앉아 치료를 받는 전설같은 화폭이 펼쳐지게 되였다.

인민들의 건강장수를 위해서라면 억만금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우리 장군님의 뜻이였고 계산법이였다.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인민들의 건강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하시였으면 머나먼 외국방문의 나날에 친히 치약견본을 가져다 불소치약을 생산해 인민들에게 공급하도록 하시였고 인민들이 하루에 급식할 소금량까지 몸소 정해주시였겠는가.

그 숭고한 뜻에 떠받들려 사경에 처한 평범한 로동자들을 위해 군용비행기가 하늘을 날으는 세상에 없는 희한한 일이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도 례사로운 일로 되여버렸다.

설사 국가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인민들의 건강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절대로 허용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우리 장군님의 확고한 의지였다.

그것은 우리 인민들이 먹는 음료수에도 그대로 비껴있다.

지금으로부터 38년전 9월 어느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있던 나는 장군님께서 걸어오시는 전화를 받게 되였다.

함흥에서 성천강상류의 어느 한 지점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고 물으시는 장군님께 나는 그 수자를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그 수자를 몇번이고 되뇌이시더니 신중하신 어조로 만약 거기에 공장을 건설하면 함흥시 음료수공급에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고 다시 물으시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무렵 중앙의 어느 한 기관에서는 성천강상류지대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것을 계획하고있었다. 여러가지 경제적실리로 보아 공장건설부지가 가장 적합한것은 물론 국가적으로 중요대상인것만큼 일군들은 장군님께서 건설을 비준하여주시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강상류에 공장을 건설하면 앞으로 함흥시민들이 리용하는 음료수에 영향을 줄수 있다고 보시고 그 안을 보류하시고나서 나에게 문의하셨던것이다. 이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공장부지를 정하는데서는 원료보장조건과 수송조건 등 여러가지 조건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것은 그것이 인민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겠는가를 심중히 고려하는것이라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아무리 큰 리익이 나는 일이라도 인민들에게 해주는 일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이르시였다.

결국 먼 후날 인민들이 마시게 될 물에 한방울의 퇴수라도 슴새여들어갈것을 념려하여 국가가 수만금의 경제적손실을 보면서 공장부지를 옮긴 력사에 없는 일화가 태여나게 되였다.

어찌 함경남도만이랴.

인민들이 바란다면 하늘의 별도 따와야 한다고 하시며 가는 곳마다 현대적인 병원들을 건설해주시고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의료설비들을 다 들여다 마음껏 치료받도록 해주신 장군님의 다심한 손길에 떠받들려 이 땅에서는 60청춘, 90환갑의 노래소리가 끝없이 울려퍼지게 되였다.

진정 자신의 정신육체적과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인민만을 생각하신 장군님이시였기에 2011년 12월 함경남도를 찾으시였을 때에도 잠시라도 쉬실것을 말씀드리는 일군들에게 나는 아직 가야 할 곳이 많다고, 내가 가야 온 나라에 승리의 불길이 타번지고 인민들이 잘살수 있게 된다고 하시며 도리여 그들에게 쓰러지지 않도록 건강을 잘 돌보라는 눈물겨운 말씀을 남기고 또다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셨던것이다.


인민들에게 유족한 물질생활을 마련해주시려


언제인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장군님의 한생을 감회깊이 돌이켜보시며 자신께서는 지금도 펼치면 바다가 되고 쌓으면 하늘에 닿을 장군님의 한생의 업적을 합치면 인민뿐이라고 노래한 《인민사랑의 노래》를 들을 때면 한평생 인민을 마음속에 안고계신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어려와 눈물이 나오는것을 금할수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혁명령도의 전기간 《인민》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속에 안고사신 장군님께서는 쪽잠과 줴기밥으로 날과 달을 이어가시면서 늘 인민들에게 풍족한 식탁을 마련해주시려고 마음써오시였다.

주체70(1981)년 1월 설명절이 지난지 보름 남짓한 어느날 중앙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참가하였던 나는 저녁에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어느 한 식탁으로 나를 안내하신 장군님께서는 요즘 지방들에서 오리고기생산이 늘어나고있지만 가공방법은 신통한것이 없다고, 그래서 한번 오리고기만 가지고 상을 차려보라고 하였다고 이르시였다.

온 나라가 즐기던 양력설에도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을 두고 마음쓰시며 친히 오리고기가공품의 가지수도 하나하나 꼽아보신 장군님께서는 한개 도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나에게 맛을 보이고 인민들에게 그대로 봉사하게 하시려고 차리신 상이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오리고기가공방법을 개선하여 가공품의 질도 높이고 가지수도 더 늘이며 도처에 불고기집도 내오고 가정들에서 오리고기를 조리하는 법도 알려주어서 인민들이 오리고기를 더 맛있게 먹을수 있도록 해주라고 나에게 거듭 당부하시였다.

그 당부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하나를 먹여도 더 맛있게 해먹이려 마음쓰는 친어머니의 사랑 그대로였다.

어찌 오리고기음식만이랴. 민족전통음식인 국수와 전골, 떡, 김치, 메기탕, 닭내포국, 자라료리 등 급양봉사망들에서 봉사하는 하나하나의 음식들마다에 우리 인민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안겨주시려 마음쓰신 장군님의 로고가 뜨겁게 슴배여있다.

함흥시에 자리잡고있는 신흥관에도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이 깃들어있다.




주체70(1981)년 7월중순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밤 12시가 지나서 이곳을 찾아오시였다.

저를 반갑게 맞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집만 봐도 국수맛이 절로 나겠다고 하시며 왔던 김에 국수맛까지 보고가자고 이르시였다.

내가 망설이자 장군님께서는 손님들에게 해주는 그대로 가져오라고, 우리가 나온다는것을 알리지 말라고 한것도 사실은 그래서였다고 하시였다. 몸소 국수의 량은 적지 않은가, 육수물은 단가, 꾸미와 양념은 제대로 쳤는가 세심히 살펴보시며 하루에 내는 국수량과 국수감도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나신 장군님께서는 사람마다 식성이 다른데 농마국수 한가지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사람들은 가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색다른 음식을 맛보자고 식당에 찾아오군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어찌다 식당에 왔다가 입에 맞는 음식이 없어보시오.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결코 스쳐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들의 식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들도 끼마다 그 식성을 맞춰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온 나라 인민들의 식성과 구미까지 헤아려보시며 식생활에서 그리운것이 없도록 해주시려 장군님께서는 삼태성도 깊이 잠든 새벽 3시까지 인민들의 정서와 기호에 맞게 신흥관의 비품과 봉사설비도 바꾸어주도록 하시고 여러가지 음식들을 봉사할수 있는 원자재보장체계까지 세워주시였다.

인민들에게 그리운것이 없게 하여야 한다, 그 숭고한 인민관에 떠받들려 그후 신흥관만이 아닌 온 나라의 급양망들에서는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 농마국수, 메밀국수, 떡, 빵, 은정차, 빙수를 비롯한 갖가지 음식들과 청량음료들을 봉사하게 되였다.

당만을 믿고사는 인민들이 고난의 행군시기 식량때문에 고생하는것을 보시고 남몰래 피눈물을 흘리시며 바쳐오신 장군님의 천만로고는 또 얼마나 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것인가.

전선시찰을 이어가시는 길에서도 산이 많고 랭해가 심한 우리 나라에서는 감자농사를 많이 하는것이 식량문제를 풀기 위한 중요한 방도로 된다는 결론을 찾으신 장군님께서는 주체85(1996)년 5월 31일 량강도를 찾으시였다. 당시 량강도당 책임일군으로 사업하던 나를 통하여 지난해 감자농사정형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감자농사를 해야 우리 나라에서 먹는 문제를 풀수 있다는것을 명심하고 감자농사를 잘해보자고 뜨겁게 호소하시였다.

이태후인 주체87(1998)년 1월 또다시 량강도를 찾으신 장군님께서는 나에게 감자농사를 잘하여 우리 나라를 아시아의 감자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다수확감자종자해결, 재배방법개선, 필요한 시설마련 등 그를 위한 대책들을 하나하나 세워주시고도 내가 직접 대표단을 데리고 다른 나라에 가서 감자농사경험을 배워오도록 하시였다.




그해 10월 찬바람부는 북방의 대홍단군을 또다시 찾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나에게 당은 농업생산을 추켜세우기 위해 감자농사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자신께서 감자농사의 사령관이 되겠다고 하시며 온 나라에 감자농사혁명의 불길을 지펴주시였다.

이에 대하여 남조선신문 《중앙일보》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량강도 대홍단감자연구소방문은 북의 밭농사구조변혁의 신호탄이였다.》고 대서특필했다.

감자농사혁명만이 아니였다. 온 나라의 토지정리와 개천–태성호물길공사, 두벌농사, 콩농사 등 이 땅에 펼쳐진 전변들은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시려 낮과 밤을 이어가신 장군님의 불멸의 헌신속에 마련되였다.

사람들이여! 경제가 발전했다고 하는 나라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 거창한 변혁들은 우리 장군님 조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때로는 구운감자 몇알로 끼니를 에우시고 때로는 생무우를 소금에 찍어드시며 자나깨나 인민에게 풍성한 식탁을 안겨주실 일념으로 이 땅의 찬눈비를 다 맞으시며 안아오신 인민사랑의 고귀한 결정체임을 부디 잊지 마시라.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지막으로 비준하신 문건도 평양시민들에게 공급하게 될 물고기와 관련한 문건이였으니 진정 우리 장군님은 인민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을 다하신 인민의 위대한 어버이이시였다.


인민들의 문화정서생활을 꽃피우시려


오늘 우리 인민은 경치좋은 곳마다에 꾸려진 문화정서생활기지에서 현대문명을 마음껏 향유하며 휴식의 한때를 즐겁게 보내고있다.

그 행복을 마련해주시려고 우리 장군님께서는 불편한 야전렬차를 집무실로 정하시고 조국의 방방곡곡을 찾고 또 찾으시며 인민사랑의 전설들을 끊임없이 수놓아가시였다.

나는 지금도 주체64(1975)년 7월 2일을 잊을수가 없다.

이날은 날씨가 몹시 무더워 숨쉬기조차 가빴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인민들에게 더 훌륭한 경기장을 안겨주기 위해 불볕이 쏟아지는 한낮의 더위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함흥경기장건설장을 찾아주시였다.

이날 모형과 건설장을 서로 대조해보시면서 이만 하면 그 어느 경기장에도 짝지지 않겠다고 기쁨의 미소를 지으시던 장군님께서는 관람석 맨아래 계단에서 주석단쪽 관람석과 그 반대켠쪽 관람석을 번갈아바라보시더니 문득 나에게 지붕은 주석단쪽에만 씌우는가고 물으시였다.

내가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대답을 올리자 장군님께서는 다시 경기장관람석의 단수와 수용능력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내가 경기장을 너무 요란하게 건설한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글쎄 장군님께서는 이왕이면 좀 더 통이 크게 했더라면 좋았겠다고 못내 아쉬워하시며 앞으로 함흥경기장에 지금 주석단부분에 지붕을 씌운것처럼 다 지붕을 씌우는것이 좋겠다고 절절히 이르시였다.

뜨거운 해볕이나 비를 맞으며 경기를 관람하게 될 인민들을 생각하시여 하시는 지적이였다.

그 말씀을 접하면서 나는 장군님의 마음속에는 오직 인민만이 자리잡고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시울을 적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나에게 로동자들이 힘들게 일하다가 와서 구경할 경기장인데 편안히 앉아서 볼수 있게 잘해주자고 거듭 당부하시고나서 또다시 현지지도의 길을 떠나시였다.

력사에는 인민을 위한다는 정치가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우리 장군님처럼 무엇을 하나 해도 인민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한 정치가는 없었다.

하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찌기 김정일동지는 인민대중의 리익에 대한 철저한 옹호자일뿐아니라 대변자이라고 격정에 넘쳐 말씀하신것 아닌가.

함흥경기장만이 아니였다. 나는 지금도 함흥대극장을 건설하던 나날들을 잊을수 없다.

함경남도의 당사업을 맡아보면서 나는 함흥극장이 다른 도들의 극장보다 작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현재의 극장만으로 함흥시 근로자들의 높아진 문화적수요를 충족시킬수 없다고 하시며 나에게 좋다고 하는 설계는 모두 참고하여 독특한 형식의 새 극장을 설계하도록 하시고 터전도 함흥시 중심부의 제일좋은 자리에 잡도록 하시였다.

주체68(1979)년 11월 19일 이날도 어느 한 단위를 현지지도하시고 새벽 3시가 지나서 렬차에서 내리신 장군님께서는 나에게 언제부터 함흥극장설계도면을 한번 보려고 했는데 마침 시간이 생겼다고 하시면서 오늘 사업은 함흥극장설계도면과 함흥시건설전망도를 보는것으로부터 시작하자고 하시였다.

이윽고 설계도면이 전시된 어느 한 회의실에 이르신 장군님께서는 수많은 설계도면을 한장한장 세심히 보아주시고나서 평양대극장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하는데 함흥에는 로동자들도 많으니 오히려 작으면 작았지 크지 않다고 하시며 오랜 시간에 걸쳐 공사와 관련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하지만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가 열리는 1980년에 도내 랭동공장건설을 비롯한 중요건설대상들이 수많이 제기되는 사정과 관련하여 나는 극장건설을 일시 뒤로 미루려고 하였다.

주체69(1980)년 3월 13일 평양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렬차에서 나를 부르신 장군님께서는 함흥극장이 비생산건물이라고 하여 건설대상에서 빼놓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생산을 높이는것도 다 근로인민대중을 잘살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는것만큼 생산을 많이 내는것과 함께 근로자들의 문화생활을 보장하는데도 커다란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로동계급을 위해서라면 아낄것이 없다고 하시며 당중앙위원회에서 쓰고있던 수십대의 화물자동차를 보내주시고 함흥강철공장의 한개 전기로에서 나오는 강재를 전적으로 극장건설에 쓰도록 해주시였으며 일군들을 파견하시여 마감자재와 조명설비, 음향설비까지 다 해결해주시였다.




이 세상에 제나름의 멋과 력사를 자랑하는 극장들이 많지만 이렇듯 절세위인의 위대한 인민사랑에 의해 태여난 극장이 있었던가.

함흥시만이 아니라 우리 조국땅 방방곡곡에 수풀처럼 일떠선 현대적인 극장과 영화관, 유원지, 공원, 휴양소들 그리고 해마다 성황리에 진행되는 대황소상 전국민족씨름경기와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 그 하나하나에도 우리 인민들이 문화정서생활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시려 바치신 장군님의 로고가 뜨겁게 깃들어있는것이다.

정녕 이 세상의 모든것은 인민을 위해 필요하며 인민을 위한것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이 우리 장군님의 확고한 의지였다.

언제인가 나를 몸가까이 불러주신 어버이장군님께서는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인민생활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만족이 있을수 없다고 하시며 오랜 시간에 걸쳐 도내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방도들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 인민생활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만족이란 있을수 없다.





바로 이 지론을 삶의 철리로 간직하시고 위대한 생애의 전기간 조국의 가는 곳마다에 인민을 위한 현대적인 문화정서생활기지들을 마련해주시고 인민들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으시며 더 큰 행복을 안겨주시려고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느라 우리 장군님께서는 언제 한번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서 생활해보지 못하시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선군혁명이 승리하는 날 나를 추억할 때 령장이라고 하기 전에 음악과 생활을 누구보다 사랑한 인간이였다고 먼저 추억해주시오!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우리 장군님도 인간이시였다.

그이이시라고 왜서 생신날, 명절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쇠고싶지 않으시였으랴.

하지만 자신과 가정보다 먼저 인민을 생각하시였기에 희망안고 이 길을 가고가리라는 노래를 부르시며 인민사랑의 길을 이어가시였다.

정녕 그렇듯 인민을 위해서는 돌우에도 꽃을 피우시면서도 자신을 위해 남기신것은 눈비에 젖어 색날은 단벌야전솜옷 한벌뿐이였으니 장군님 같으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는 동서고금에 없다.

위대한 장군님의 인민사랑의 력사는 오늘 경애하는 원수님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지고있다.





위대한 수령님들을 모시듯이 인민을 받드시며 인민사랑의 대서사시를 수놓아가시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계시여 이 땅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인민의 웃음소리만 끝없이 메아리칠것이다.

(필자는 조국전선 의장)

 

[녀성독창과 방창] 인민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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