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북인사 조헌영선생에 대한 이야기 -
옛글에 《락화난상지》라는 말이 있다. 한번 진 꽃은 다시 필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참다운 삶이 꽃펴나는 공화국에서는
1900년 3월 27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난 조헌영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후 일찌기 젊은 나이에 정계에 나섰다. 1920년대에는 신간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일본의 도꾜에서 있은 3. 1운동기념식거행 및 삐라살포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했다. 그후 1930년대부터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약방을 경영하며 민간료법연구를 하였다. 극우익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는 해방후 남조선에 기여든 미군을 《해방자》로 보는 숭미사상이 있었다.
《반공》리념을 가지고있던 조헌영선생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게 된것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였다.
당시 인민군대가 미제의 무력침공을 물리치고 단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 거기에는 애국적정계인사들을 비롯하여 주의주장이 서로 다른 친미보수진영에 속하는 《국회의원》들도 나와있었다.
그때 《남북협상파》, 《소장파》들과는 달리 6. 25직전까지 《반공》을 부르짖다가 6. 28서울해방과 더불어 졸지에 끈떨어진 뒤웅박신세가 되였던 조헌영선생을 비롯한 극우익보수정객들의 경우에는 생각이 많았다. 그들은 인민정권기관에 찾아가 자기들의 운명을 의탁하긴 하였으나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큰것으로 하여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다.
조헌영선생을 놓고보아도 8. 15해방후 남조선에서 《미국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거쳐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 조직부장직에 있었으며 초대 《국회의원》때 《미군장기주둔요청안》을 기안하기도 하여 우익계출판물들까지도 《〈한민당〉의 정치로선은 조헌영의 로선이다.》라고 하였다.
지난날 《반공》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손잡고 나가자는
그후 공화국의 품에 안긴 조헌영선생은 가정을 이루고 훌륭한 살림집에서 행복하고 보람찬 삶을 누리였다.
조헌영선생은 주체45(1956)년 7월 2일 모란봉극장에서 있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집행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선출되여 토론을 하였으며 주체65(197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 20돐을 맞으면서 기념론설을 《통일신보》에 발표하는 등
공화국에서는 고려의학연구를 계속하고싶다는 그의 의향에 따라 그가 의학과학원에서 마음껏 연구사업을 할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보장해주었다.
그는 의학과학원에서 고려의학발전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범은 세상에 나왔다가 가죽을 남기고 죽는데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가 민족앞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짐승과 다를것이 없다고 하면서 중병으로 병석에 있는 기간에도 연구사업을 멈추지 않았고 주체54(1965)년 10월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도 연구사업을 계속하였다.
조헌영선생은 주체67(1978)년부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그는 생전에 작은 가슴에 받아안기에는 너무도 많은 훈장들과 기념메달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조국과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전환의 나날에 지닌 련공애국의 일념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생을 마치는 날까지 통일성업에 헌신하였다.
오늘도 천연화강석묘비에 새겨진 그의 돌사진은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