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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4월 2일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서 영생하는 재북인사의 빛나는 삶

   - 재북인사 조헌영선생에 대한 이야기 -

 

옛글에 《락화난상지》라는 말이 있다. 한번 진 꽃은 다시 필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참다운 삶이 꽃펴나는 공화국에서는 위대한 태양의 빛발이 있어 곡절많은 인생길을 걷던 사람들도 재생의 봄빛을 받아안고 민족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을 누려가고있다.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서 오늘도 애국지사의 영원한 삶을 누리고있는 재북인사 조헌영선생의 인생행로를 통해 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믿음의 정치, 광폭정치의 일단을 엿볼수 있다.

 

 

1900년 3월 27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난 조헌영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후 일찌기 젊은 나이에 정계에 나섰다. 1920년대에는 신간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일본의 도꾜에서 있은 3. 1운동기념식거행 및 삐라살포사건으로 감옥살이도 했다. 그후 1930년대부터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약방을 경영하며 민간료법연구를 하였다. 극우익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는 해방후 남조선에 기여든 미군을 《해방자》로 보는 숭미사상이 있었다.

《반공》리념을 가지고있던 조헌영선생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게 된것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였다.

당시 인민군대가 미제의 무력침공을 물리치고 단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 거기에는 애국적정계인사들을 비롯하여 주의주장이 서로 다른 친미보수진영에 속하는 《국회의원》들도 나와있었다.

그때 《남북협상파》, 《소장파》들과는 달리 6. 25직전까지 《반공》을 부르짖다가 6. 28서울해방과 더불어 졸지에 끈떨어진 뒤웅박신세가 되였던 조헌영선생을 비롯한 극우익보수정객들의 경우에는 생각이 많았다. 그들은 인민정권기관에 찾아가 자기들의 운명을 의탁하긴 하였으나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지은 죄가 너무나도 큰것으로 하여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었다.

조헌영선생을 놓고보아도 8. 15해방후 남조선에서 《미국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거쳐 우익정당인 《한국민주당》 조직부장직에 있었으며 초대 《국회의원》때 《미군장기주둔요청안》을 기안하기도 하여 우익계출판물들까지도 《〈한민당〉의 정치로선은 조헌영의 로선이다.》라고 하였다.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조헌영선생이 전 남조선《내무부장관》 김효석, 전 남조선《과도립법의원》 의원이며 제2대 《국회의원》이였던 장련송 등과 함께 평양에 왔을 때 그들의 련공애국의 마음을 귀중히 여기시며 몸소 연회상까지 마련해주시였다.

지난날 《반공》일선에 섰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손잡고 나가자는 수령님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앞에 일행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공화국의 품에 안긴 조헌영선생은 가정을 이루고 훌륭한 살림집에서 행복하고 보람찬 삶을 누리였다.

조헌영선생은 주체45(1956)년 7월 2일 모란봉극장에서 있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집행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선출되여 토론을 하였으며 주체65(197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 20돐을 맞으면서 기념론설을 《통일신보》에 발표하는 등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사상과 리론을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에게 깊이 인식시키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공화국에서는 고려의학연구를 계속하고싶다는 그의 의향에 따라 그가 의학과학원에서 마음껏 연구사업을 할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보장해주었다.

그는 의학과학원에서 고려의학발전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범은 세상에 나왔다가 가죽을 남기고 죽는데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가 민족앞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면 짐승과 다를것이 없다고 하면서 중병으로 병석에 있는 기간에도 연구사업을 멈추지 않았고 주체54(1965)년 10월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도 연구사업을 계속하였다.

조헌영선생은 주체67(1978)년부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 겸 서기국장의 중임을 맡아 일하게 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국의 부강번영과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애국적열의와 헌신성을 높이 발휘한 그에게 높은 정치적신임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 25돐에 즈음하여 그에게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표창과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70돐때에는 행사에 참가할 대표단의 명단에 손수 그의 이름을 넣도록 해주시고 또다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시계표창과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였으며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의 자리에도 세워주시였다.

그는 생전에 작은 가슴에 받아안기에는 너무도 많은 훈장들과 기념메달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조국과 민족앞에 씻을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버이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을 받는것이 송구스럽고 그 은덕이 너무도 고마와 눈물지었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로둔한 이 늙은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렇게 높이 내세워주시고 우대해주시며 큰 영광을 베풀어주시니 이 심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정녕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은 온 민족을 한품에 안아 보살펴주시고 미래에로 이끌어주시는 민족의 자애로운 태양이십니다.》라고 격정을 터놓았다.

그는 인생전환의 나날에 지닌 련공애국의 일념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생을 마치는 날까지 통일성업에 헌신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헌영선생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남쪽에 있는 가족, 친척, 친우들에게 알리는 부고를 내도록 해주시며 은정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오늘도 천연화강석묘비에 새겨진 그의 돌사진은 절세위인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영생의 모습으로 빛나는 선생의 애국적인 삶을 길이 전하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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