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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3월 30일
 

민족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애국지사

                                        - 재북인사 오하영선생에 대한 이야기 -

 

사람들은 누구나 조국과 민족앞에 부끄러움없이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사를 놓고봐도 평생 《애국》을 부르짖으며 뛰여다녔지만 종당에는 사대매국으로 얼룩진 치욕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다면 참된 애국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우리는 애국지사이며 조국통일상수상자인 오하영선생의 삶을 통하여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1879년 4월 5일 황해북도 평산군에서 태여난 오하영선생은 30대초반에 개성신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원산감리교 목사로 되여 종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일제가 패망한 후 남조선에 기여든 미국을 《해방자》로 보면서 남조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회장도 하고 미군정청 남조선《과도립법의원》에도 참여하면서 숭미반공의 길을 헤매이며 이것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이라고 믿고있었다.

하지만 오하영선생은 1947년 9월 미국이 조선문제를 유엔에 끌고간것으로 하여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위기가 심화되고 《유엔림시조선위원단》과 리승만의 《단선단정》음모책동을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 고조되는 속에 김구, 김규식선생들이 《단선》을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내고 평양에서 열리는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는것을 목격하면서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께서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국통일문제를 토의하는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를 소집하여주시고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할 애국애족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그이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실 민족의 태양이시라고 생각하였다. 하여 그는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여 《민족자주련맹》 감찰위원장도 하고 《통일독립촉진회》의 상무위원으로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2대 《국회의원》선거때에는 《북진통일》반대, 평화통일구호를 들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이 일으킨 6. 25전쟁당시 영용한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되자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 최동오, 엄항섭, 윤기섭 등과 함께 인민군대를 환영하고 공화국을 지지하는 확고한 립장에 서서 전쟁승리를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다가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상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애국적인 정치인들과 함께 용약 입북의사를 밝히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39(1950)년 9월 17일 관계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남조선 애국적정계인사들의 입북을 안전하게 보장할데 대하여》라는 지시를 하달하시면서 서울에 있는 안재홍, 오하영선생을 비롯한 입북의사를 표명한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을 다 데려와야 한다고, 그들은 한때 친미반공의 일선에서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리승만괴뢰도당과 결별하고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라고 하시였다.

급변하는 전쟁형세에 대처하여 전쟁피해와 적들의 학살만행으로부터 남조선의 애국적정계인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수령님의 한없이 숭고한 인간애, 열화같은 동포애를 온몸으로 느끼며 북행길에 오른 오하영선생일행은 비로소 공화국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되였으며 그이의 고매한 덕망을 매일, 매 시각 온넋으로 느끼며 보람차고 참다운 애국의 삶을 누릴수 있었다.

주체45(1956)년 5월 23일 오하영선생은 여러 재북인사들과 함께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에서 만나뵙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건강을 일일이 물으시고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여 오늘에야 여러분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였다고 하시며 남반부의 정치정세와 경제형편,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도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하시였다.

오하영선생은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수령님, 과거에 리승만에게 붙어서 민주력량을 탄압했고 전쟁시기에는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했으며 지금도 〈반공〉을 하고있는 사람들과도 손잡을수 있습니까?》 이렇게 마음속 생각을 말씀드렸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고 어제까지 우리를 반대하였어도 오늘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념원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들과 손잡고나갈것이며 그가 세운 공로와 재능에 따라 통일이 실현된 후 세워질 련합정부에도 참가시키고 그의 재산과 사회적지위를 보장하여줄것이라고 하시며 재북인사들에게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여주기를 바란다고, 년령이 많은분들이므로 건강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선생일행과 식사를 같이하시면서 모두 집을 떠나 객지에서 고생이 많겠다고 걱정하시며 차례로 술도 부어주시고 손수 접시에 료리들을 떠놓아주시였다.

오하영선생은 민족분렬의 고통을 겪는 온 겨레를 한품에 안으시고 그토록 마음쓰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엄한 모습을 우러르며 통일애국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칠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였다.

주체45(1956)년 7월 2일 오하영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되던 날 이 단체의 최고의원으로 선거되였다.

선생이 공화국의 품속에서 가정을 이루고 고급살림집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며 남조선과 해외의 각계각층 동포들을 련공애국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던 해인 주체46(1957)년 10월 25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또다시 선생을 비롯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들을 접견해주시였다.

이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기본사명과 임무, 그 수행방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료해하여주신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서는 아까울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오하영선생일행이 제기한 여러가지 문제들도 다 풀어주시였다.

날이 갈수록 더 큰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수령님의 은정이 고마와 여생을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애국사업에 다 바치며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삶의 순간순간을 보람찬 애국충정으로 수놓아가던 선생은 그만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오하영선생이 앓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의 병치료을 위해 귀중한 약재와 보약 그리고 지성어린 선물도 보내주시였다.

선생은 림종을 앞두고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였다.

《내 나이 80고령이지만 나는 이제 겨우 열살을 살고 가는셈이요. 입북후 10년간이 나의 참된 인생의 전부였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인생의 진창길에서 헤매던 이 사람을 이끌어 통일성업에 한몫 이바지하라 하셨는데 너무도 해놓은 일 없이 가는것이 그지없기 죄송하오. 동서고금에 견줄이 없는 어버이수령님을 그네들이 내몫까지 잘 받들어모셔주오.》

그리고는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러 그이의 건강을 간절히 기원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이 바로 주체49(1960)년 9월 2일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비보를 받으시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며 오하영선생은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서도 우리를 지지하였다고, 그는 량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일할수 있었는데 일찌기 사망하였다고 하시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이름으로 평양방송에 부고를 내보내고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할데 대해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후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해 애국적헌신성을 발휘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애국지사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고 주체75(1986)년 9월에는 그의 유골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배려해주시였다.

그리고 주체79(1990)년 8월에는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참으로 오하영선생이 걸어온 인생행로는 우리 공화국의 품, 절세위인들의 품이야말로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품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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