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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3월 21일
 

민족단합과 통일에 바친 애국의 삶 (1) 

- 몽양 려운형선생과 그 자녀들이 받아안은 가슴뜨거운 사랑의 이야기 -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사를 돌이켜보면 그 갈피마다에는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공헌한 사람들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그들모두에게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시고 그 혈육들까지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펴주신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이 새겨져있다.

그 가운데는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 생을 바친 려운형선생과 그 자녀들이 받아안은 가슴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

 

*                  *

 

해방후 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선생은 위대한 김일성동지께 하루속히 서울에 오시여 혼란된 정세를 수습하시고 나라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실것을 간절히 요청하는 편지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편지의 구절구절마다에서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모대기는 한 애국지사의 간절한 심정을 읽어가시였다. 편지의 마지막부분을 읽어가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순간 밝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려운형은 인차 평양으로 오겠다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자기를 만나주시옵기를 간절히 요청하였던것이다.

려운형선생은 해방전에는 조국해방을 위해 헌신해왔고 해방후에는 서울에서 조선인민당을 조직하고 진보적활동을 적극 벌려온 애국자로서 남조선인민들속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다.

남조선정세를 언제나 깊이 파악하고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한번도 만나본적은 없었지만 조선인민당의 당수인 그와 그의 활동에 대하여 잘 알고계시였다.

일찌기 청년시절에 독립의 뜻을 품고 3. 1운동에도 참가하여 만세도 불렀고 동방민족의 자결권을 위한 국제회의장에 달려가서 약소민족의 설음도 하소했으며 민족주의에 뜻을 두고 《상해림시정부》에도 찾아갔는가 하면 또 선진사상에 기대를 걸고 공산주운동가들도 찾아가 만났던 몽양이였다. 또 한때는 민족해방의 진로를 찾으려고 동남아일대를 편답하면서 이름난 민족운동자들과 무릎을 마주하고 반침략투쟁방도도 모색했고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민족자결문제를 두고 의논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통치의 암담한 시기에 아시아와 유럽을 무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벌린 려운형선생은 그 어디에서도 조선민족해방의 진로를 찾을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도 해빛을 그리며 어둠속을 헤매던 몽양이 비로소 조선독립의 려명을 찾은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영웅적항일혁명투쟁을 벌리신다는 소식에 접한 때부터였다. 그는 무릎을 치며 이제야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절세의 영웅이 저 백두산에 오르시였으니 조선의 맥박이 뛰게 되였다고 기뻐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천보전투에서제에게 큰 참패를 안기시였을 때 자기가 사장으로 있는 신문 《중앙일보》에 이 특별보도를 크게 싣게 하고 편집인들과 함께 집에 돌아와 그이의 무훈을 축하하는 축배까지 들었다.

그래서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걸출한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님만을 굳게 믿고 따를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려운형선생이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하시던 시기에 벌써 애국활동을 벌리는 그를 높이 평가하시였고 주체25(1936)년 5월 조국광복회를 창건하실 때에는 그를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의 공동발기인으로 내세워주시였다.
  려운형선생은 해방후에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인민당 당수의 직책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리였다. 이 과정에 미군정과 리승만역도를 비롯한 반통일세력들로부터 갖가지 회유기만과 방해책동을 받았으나 민족자주정신을 잃지 않고 주견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오로지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만이조선인민들이 나아갈 앞길을 명확히 밝혀주실수 있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숭배심은 오랜 세월 걸출한 영웅을 찾아헤맸던 파란많은 체험을 통해 얻은 확고한 신념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때나 만나주시겠다는 내용의 회답서한을 보내시였다.

려운형선생이 평양에 찾아온다는것은 미군정과 리승만역도를 비롯한 반통일세력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눈초리를 돌리고있는 당시의 정황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38°선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그것을 넘어선다는것은 생명의 위험도 무릅써야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하여 그 어려운 행로를 마다하지 않았던것이다.  (계속)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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