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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3월 19일
 

《우리는 수령복이 있습니다》 (2)


 2. 인간중의 인간을 모시였습니다

 

위인은 장군이기 전에 위대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덕이 없는 장군은 검이 없는 무사와 같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역풍을 이겨나가는 우리 조국의 승리는 어찌보면 위대한 인간의 승리이며 위대한 인덕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국에 돌아와 생활하는 나날에 위대한 인간이신 우리 장군님의 덕에 매혹되였습니다.

장군님의 덕과 인간상은 의리속에 돋보였습니다. 의리는 위인의 인격적향기이고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작년 7월 로병대회때에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을 만나뵈왔습니다. 한없이 인자하시고 부드러우신 그분들을 만나뵙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서툰 시에서 쓰기도 하였지만 인생의 고엽으로 말라버린 저를 푸르싱싱한 청엽으로 소생시켜주시고 영예를 주신 은인들이 아니십니까.

온 세상이 떠받드는 위대한 수령님을 또다시 뵈옵고보니 4월 탄신절날에 친히 병원에 있는 저를 찾으시여 어버이의 믿음과 사랑을 주시고도 무엇인가 부족하신것만 같아 자신의 존함을 모신 금시계를 손목에 손수 끼워주시고 40여년동안 그렇게도 품고싶었던 조선로동당원증을, 그것도 몸소 수표하시여 직접 수여하여주어버이수령님의 그 인정, 그 의리가 가슴에 사무쳐올라 저는 고개를 숙이고 감사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였습니다.

저는 로병대회가 열린 이날 우리의 장군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왔습니다.

그처럼 준수하신 모습으로 웃음을 지으시는 그분께서 저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정겹게 바라보실 때 저는 바로 이분이 저를 구원하여주신 은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으로 목이 메였습니다.

남쪽의 쓸쓸한 양로원을 거쳐 남해가의 한 농가에 얹히여 살고있던 이 로병을 모래불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듯이 알아내시여 조국의 품에 데려오시려고 몇년동안이나 마음을 쓰시고 수백번의 가르치심을 주신 은인이라고 우러르니 저는 그 깊으신 의리와 사랑앞에서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대표단이 남쪽 대표단과 마주앉아 회담을 할 때마다 저를 데려오는 문제를 성사시키라고, 세계의 량심을 불러일으키며 리인모송환투쟁을 벌리라고, 안해와 딸이 편지를 보내여 평양에 살아있다는것을 알려 용기를 내게 하라고, 어느해 정초에는 올해 무슨 일이 있어도 리인모를 꼭 데려와야 한다고, 리인모가 생명이 위급하다는데 그냥 남쪽에 있으면 죽을수도 있으니 빨리 조국에 데려다 살려야 한다고, 리인모를 데려오지 못하면 자신께 보고도 하지 말라고, 리인모가 처자와 만나 한지붕밑에서 살면서 손자, 손녀를 앞세우고 모란봉에도 오르고 평양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보아야 마음을 놓겠다고 하신 인자하신분이 아니십니까.

제가 막상 돌아올 때에는 리인모가 온다는데 우리 당의 간부들이 판문점에 나가 마중하며 온 개성시민들과 평양시민들이 모두 떨쳐나서 환영하라고, 명의들로 치료대를 뭇고 명약도 아낌없이 다 쓰라고, 리인모가 살 집도 좋은 집으로 주고 료리사도 붙여 구미에 맞는 음식을 대접하라고, 리인모가 완쾌되면 로병대회주석단에도 수령님곁에 앉히고 전승기념열병식장에서도 주석단에 오르게 하자고, 백두산에도 가보고 고향에도 들려보라고, 고향의 인민학교를 리인모인민학교로 명명하라고 세심하게 보살펴주신 우리 장군님이시였습니다.

더우기 제가 놀란것은 지난해 7월 피아노를 선물로 받던 때였습니다.

해방후 저의 안해가 학생들에게 음악공부를 가르쳐주면서 하루는 풍금을 사달라고 하였을 때 저는 이제 돈을 마련하면 사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 약속을 40여년동안이나 지키지 못하여 늘 마음이 괴로왔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저의 이 마음까지도 헤아리시고 친히 피아노를 선물로 보내주시여 제가 풀어주지 못한 안해의 소원까지 풀어주시였습니다.

저에게 이불을 일식으로 보내주신 장군님의 은정도 더없이 뜨겁습니다.

제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느 한 나라에 있는 해외동포들이 장군님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성껏 지어드린 귀한 이불을 받으시고는 저를 먼저 생각하시며 남쪽감방에서 언제 한번 이불이나 제대로 덮어보았겠는가고, 자신보다 리인모가 덮어야 한다고 따뜻이 이르시며 자신께서 쓰셔야 할 그 이불을 친히 저에게 보내주신 자애로운 우리의 장군님이시였습니다.

며칠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장군님께서는 제가 조국에 돌아온지 1년이 되는것과 관련하여 이런 뜻으로 교시하시였다고 합니다.

… 우리 당이 1년전에 왜 리인모를 데려오자고 하였는가. 리인모로 말하면 34년동안이나 옥중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 전사이다. 아무리 정세가 긴장하준전시상태라고 하여도 리인모를 데려와야 우리가 혁명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것으로 된다. 우리를 믿고 30~40년을 싸워온 동지인데 우리가 그를 구원하여주지 않으면 누가 구원하여주겠는가. 혁명가들에게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의리는 생명과도 같은것이다. 나는 그전에 외국의 한 책을 본 일이 있는데 나뽈레옹이 모스크바를 쳐들어갈 때 많은 프랑스병사들이 죽거나 포로가 된 이야기가 씌여져있었다.

그런데 나뽈레옹이 망하고 다른 왕조가 집정한 후 프랑스포로들을 데려가라고 하였으나 나뽈레옹때의 포로들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프랑스포로들의 운명이 이와 같이 비참하게 된것은 결국 령도자를 잘못 만났기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나는 리인모를 데려올 때 그전에 보았던 이 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면서 어떻게 하나 그를 꼭 데려와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어렵기는 하였지만 투쟁을 벌려 리인모를 데려왔다. 세계에는 옥중투쟁을 한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남조선에서와 같이 30~40년을 옥중에서 지조를 지켜 투쟁하면서 인생의 전부를 보낸 그런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투쟁한 동지들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하며 그들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 당이 전사들에게 베풀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이 얼마나 혁명적의리가 깊으신 뜨거운 교시입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장군님을 위함이라면 이 로병이 한줌의 흙으로 변해도 장군님을 받드는 고임돌로 굳어지고싶은 일편단심으로 살고있습니다.

우리의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혁명적의리가 깊으시고 사랑과 인정이 두터우시였습니다.

저는 조국에 와서 《빛나는 삶의 품》이란 영화문헌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장면들을 보며 저는 김정일동지의 인간상에 매혹되여 저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 장군님을 강하신분으로만 알았는데 그분께서는 정말 인정이 많으시고 눈물이 많으신 부드럽고 정다운분이시였습니다.

한 일군이 뜻하지 않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지방에서 현지지도를 하시던 그분께서 전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시며 사품쳐흐르는 강물우에 놓인 철교의 침목을 하나하나 아슬아슬하게 더듬어 건느시며 그날 밤중으로 평양에 도착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께서 키우신 전사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하여 갑자기 불어난 깊은 산 계곡의 강물우에 아아하게 놓여있는 철길을 몸소 걸어넘으시는 그분의 초상은 그대로 사랑의 조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남달리 눈물이 많으시였습니다.

세속에 이르기를 참된 영웅에게는 눈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도 눈물이 많지만 김정일동지는 눈물이 더 많다고 교시하시였다고 합니다.

한 전사가 병상에서 돌아갔을 때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비보를 들으시고 황황히 오시여 싸늘한 전사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부비시며 내가 왔는데 빨리 일어나라고, 이렇게 눈을 감자고 나에게 그렇게도 정을 남겨두었는가고, 앓으면서 그렇게도 나의 애를 태우더니 가서도 나를 울게 하는가고 하시며 우시고 또 우시였습니다.

저는 이런 영화장면을 보면서 용장일수록 눈물이 많다는 느낌이 들어 《장군님!》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인정이 메마르고 덕이 없으면 울지 못하는 법입니다. 정이 많고 사랑이 많아 남달리 가슴아파할줄 아는 위인만이 그렇게 울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민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제일 귀중히 여기시는것은 우리 장군님의 애민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민에 대한 사랑은 우리 장군님의 천하지대본이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정신은 우리 장군님의 정치적신앙이라고 봅니다.

사상도 인민대중중심의 사상이고 제도도 인민대중중심의 제도이며 정치도 인민대중중심의 인덕정치, 광폭정치인것이 제가 안겨사는 품입니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말은 우리 장군님께서 처음 쓰신 명제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남쪽에서 신세를 진 마음이 착한 김상원농민의 집에는 4남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집에서 살고있을 때 학비때문에 오고가는 걱정어린 말을 늘 들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지금 우리 집에는 중학생인 손자애와 손녀애, 대학생인 손녀가 있는데 제가 1년세월이 되도록 그애들이 집에 들어와서 학비때문에 울고불고하는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놀라는 이 무료교육제도에도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의 이민위천의 사상, 인민대중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꽃펴나고있지 않습니까.

제가 남쪽에 있을 때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었는데 그때 엄청난 치료비때문에 저도 걱정이 컸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재야인사들의 걱정이 더 컸었습니다.

인정은 있어도 금전이 딸려 걱정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바늘방석에 누워있는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북에 와서도 몇달동안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며 치료비때문에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안해에게 치료비때문에 집에 부담이 많겠다고 말했더니 안해가 하는 말이 무상치료제이기때문에 돈 한푼 내지 않으니 걱정말고 치료나 잘 받으라는것이였습니다. 정말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랑과 고마움은 사람을 울게 하는 혜택이였습니다.

저는 이런것을 두고 수령을 잘 만난 수령복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장군님의 겸허하신 성품에 대하여서도 느낀바를 한마디 쓰려고 합니다.

지난해 전승 40돐경축 열병식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주석단에서 장군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뵈옵게 되였습니다.

원래 저는 그날 원수복을 입으신 장군님의 모습을 뵈올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뵈온 장군님의 복장은 원수별이 새겨진 장군복이 아니라 옛날 제가 풍산에서 살 때 입던 닫긴형의 수수한 옷차림이였습니다.

우리 장군님의 소박한 옷차림을 보는 순간 저는 또한 그 겸허하심에 경탄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소박과 겸손은 미덕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장군님이시야말로 《위대한 평민》이시였습니다.

그러니 인민들이 왜 우리 장군님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미덕의 힘은 강합니다. 위대한 사랑과 미덕을 지니시였으니 어찌 만사람들이 장군님품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장군님은 인간중의 인간이십니다.

우리 인민이야말로 인간중의 인간을 령도자로 모신 수령복이 있는 인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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