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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3월 19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에 대하여 하신 교시

(발취)

 

《다 죽게 되였던 리인모동무가 다시 살아나게 된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사회주의조국이 있고 한없이 깊고 따사로운 당의 사랑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리인모동무의 병상태가 좋아진데는 김정일동지의 로고가 깃들어있습니다. 김정일동지는 하루에도 몇번씩 리인모동무의 병상태를 알아보고 필요한 모든 대책을 세워주었습니다. 리인모동무는 은혜로운 사회주의조국의 품과 한없이 따사로운 당의 사랑과 혁명동지들의 지성어린 손길이 있었기때문에 다시 살아나게 되였다는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리인모동무에게 내가 수표한 조선로동당 당원증을 수여하겠습니다. 리인모동무는 해방직후 우리 당에 입당한 로당원입니다.》

 

리인모동무는 견결한 공산주의자입니다. 리인모동무는 40여년간 원쑤들의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지조와 절개를 지켜 용감하게 싸워이겼으며 조선의 공산주의자, 조선로동당원의 고결한 혁명정신과 강의한 의지를 온 세상에 과시하였습니다.》

 

리인모동무의 고향이 풍산인데 풍산사람들이 원래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 풍산사람들이 투쟁을 잘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곳 인민들의 방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전에 풍산과 삼수, 갑산 지방에 천도교인들이 많았는데 그들가운데는 애국적인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곳 천도교인들을 책임지고있던 사람은 조국광복회 회원이였습니다.》

 

리인모는 조선혁명군 국내공작소조가 파발리중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오빠시〉라는 별명을 가진 악질순사부장을 처단하였을 때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견자의 한사람이다. 이 사건의 영향밑에 풍산지방의 선각자들은 적색독서회를 조직하고 반일투쟁을 시작하였다. 리인모도 그 독서회에 망라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32년과 1933년 두차례에 걸쳐 약 1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최근에 리인모를 직접 만나 알아본데 의하면 그는 우리와 련계를 지어보려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중요한 작전구역인 이도강에 두번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남만부대의 소부대가 동흥진을 습격하였을 때에는 거기에도 다녀올만큼 그의 참군시도는 열광적인것이였다. 그런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직선을 찾지 못해 그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때 만일 리인모가 우리를 만나는데 성공하였더라면 그의 인생행로가 완전히 달라졌을것이다.》

 

《리인모는 감옥밥을 두번 먹고나서도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풍산지구혁명위원회 성원으로서 파발리분회와 황수원언제로동자돌격대, 안산후치령생산유격대 등의 조직들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리인모는 국내혁명운동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였지만 일본땅에 국광복회조직을 늘이는 사업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공적을 쌓았다. 1940년 여름에 그는 주병포의 지령에 따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가지고 일본 도꾜에 건너가 풍산출신의 고학생들로 조직된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를 혁명적으로 개편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리인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그를 세계적으로 이름난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만들어준것은 조국광복회조직이였고 그 조직의 씨앗을 삼천리 방방곡곡에 뿌리기 위해 천신만고를 다한 백두산의 투사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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