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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04(2015)년 3월 19일
 

력사유적 표충비

 

표충비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켜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정몽주(1337―1392년)의 충절을 찬양하여 세운 비이다. 비석은 비각안에 있다.

표충비비각은 정면 4간, 측면 2간의 합각지붕으로 2익공두공을 얹고 모루단청을 곱게 입혔다.

비각안에 있는 두개의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든 바닥돌과 거북받침, 비머리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비몸으로 이루어져있다.

두단으로 이루어진 8각형바닥돌의 밑단은 좀 넓고 길며 두텁지만 웃단은 거북받침의 몸통만큼 짧고 좁으며 얇다.

바닥돌우에는 10t이 넘는 통돌을 가공하여 만든 거북받침이 놓여있다.

네발을 힘있게 디디고 목을 쑥 내민 거부기는 구성이 째이고 조각솜씨가 매우 훌륭하다. 길다란 목, 툭 튕겨나온 눈, 크게 벌린 아가리, 안으로 오그라든 뾰족한 4개의 앞이, 균형잡힌 어금이, 옆으로 나온 배에 새긴 선들, 힘있게 디딘 4개의 발과 그 발톱들, 균형이 잡히면서도 두껍고 큼직한 잔등, 목부분의 힘있고 굵직한 선 등은 거부기의 굳센 기질과 특징적인 자세들을 사실적으로 유감없이 나타내고있다. 특히 북쪽거부기의 잔등무늬는 야외에 세우는 기념비로서의 사명에 맞게 세부적인것을 피하고 대담하면서도 굵직하게 돋우새기였다.

거부기의 잔등우에 새겨진 련꽃모양의 비몸자리돌도 높은 조각기교를 보여준다.

15세기이전 비석들의 비몸자리돌에는 일반적으로 련꽃잎을 한잎한잎 라렬하였다면 여기에서는 비몸자리돌주위에 련이은 련꽃잎을 돋우새겨 전체가 한송이의 련꽃으로 보이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련꽃끝을 일정한 간격으로 크게 또는 작게 안으로 살짝 말려들게 함으로써 련꽃무늬조각에  흐름을  조성하였다.  두  비석의  거부기의  자세는  길이  및  너비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조화롭다.

두 비석의 비머리돌들은 다같이 합각식지붕형식으로 되였으며 그 처마밑들에는 꿈틀거리는 네마리씩의 룡들이 돋우새겨져 비석의 기념비성과 장식성이 두드러지고있다.

북쪽비석의 비몸 앞뒤면에는 행서체(한자글씨체의 한가지)로 비문이 새겨져있다. 앞면 웃부분에는 《어제어필선죽교시》(《왕이 짓고 쓴 시 〈선죽교〉》라는 뜻)라는 글이 옆으로 새겨졌고 그 아래에는 조선봉건왕조 영조왕(1725―1776년)이 지은 14자의 시가 새겨져있다. 뒤면에는 영조왕이 1740년 9월 개성에 왔다가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의 비문 여섯줄이 세로 새겨져있다. 앞뒤면비문의 주요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충성을 높이 찬양한것이다.

남쪽비문의 비문 역시 거의 같은 내용으로 되여있는데 여기에서는 고종왕(1852―1919년)이 1872년에 개성에 와서 시를 짓고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고 하였다.

표충비는 조선봉건왕조통치배들이 당시 뒤흔들리고있던 봉건통치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고려왕조에 충성다한 정몽주의 절개를 본받아 조선봉건왕조에 충성다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목적에서 세운것이기는 하나 여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재능과 지혜가 깃들어있다.

오늘 표충비는 우리 선조들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으로 훌륭히 보존관리되고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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