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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이끼속에 묻혀있던 개성의 령통사

 

민족분렬의 아픔을 이 땅 그 어디에서보다 강렬하게 느끼는 분계연선도시 개성은 한때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수도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오늘도 이곳에는 지나온 우리 민족사의 갈피갈피를 생동하게 들여다볼수 있게 하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게 있다.

조선민족의 슬기로움과 문명함을 스스로 자부하게 하는 그 하나하나의 유적들과 유물들에 비껴있는 우리 당의 민족유산보호정책의 정당성과 생활력은 사람들의 심금을 얼마나 뜨겁게 울리는것인가.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있다가 로동당시대에 비로소 자기의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게 된 개성의 령통사도 그중의 하나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께서는 혁명령도의 전기간 민족유산보호사업을 중시하시고 여기에 힘을 넣으시여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온 세상에 빛내여주시였습니다.》

개성시 룡흥동 오관산 남쪽기슭의 경치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령통사는 고려시기부터 우리 나라에서의 불교의 성지로 동방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던것이 16세기말에 완전히 불타버리고 불탑들과 력사유물들은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있었다.

한없이 숭고한 애국, 애족, 애민의 뜻을 지니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오래동안 산속에 묻혀있던 령통사터를 조사발굴하도록 이끌어주시고 수만㎡의 령통사터발굴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조국보위와 사회주의건설에서 큰 몫을 맡고있던 인민군장병들을 령통사복원공사에 불러주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우리 조국이 류례없는 시련을 겪던 시기였다.

그러나 선조들이 창조한 유산들을 민족의 넋을 지켜가는데서 더없이 귀중한 재부로 여기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령통사복원사업을 자그마한 애로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할수 있도록 온갖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절세위인의 숭고한 애국의 뜻을 높이 받들고 인민군장병들은 혁명적군인정신, 결사관철의 정신을 발휘하여 6만여㎡의 부지면적에 연건평이 4 000여㎡에 달하는 20여동의 덩지 큰 건물들에 대한 복원공사를 짧은 기간에 끝내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령통사가 자리잡은 오관산남쪽 령통골일대는 고려태조 왕건의 4대조상들이 살던 곳이다.

제일 처음 왕건의 대조부인 성골장군 호경이 살았고 대대로 내려오면서 고조부 강충, 증조부 보육, 조부 작제건이 이곳에서 살았다.

918년 태봉국의 궁예정권을 뒤집어엎고 고려를 세운 왕건은 증조부 보육이 쓰고살던 나무암자를 헐고 919년에 숭복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국사급절을 만들었다. 국사급절이라는것은 임금들이 다니던 절을 말한다.

숭복원은 그후 흥성사, 령통사로 이름이 바뀌였는데 다같이 《복을 이루는 절》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한편 령통사는 신령스러움이 통하는 절이라는 뜻도 가지고있다.

령통사는 건립후 왕들의 행차가 빈번했고 왕건과 그의 아버지 왕륭, 11대왕 문종, 17대왕 인종, 19대왕 명종 등 고려의 력대왕들의 초상을 걸어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곳이였다.

특히 령통사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불교의 한 류파인 조선천태종불교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이 20여년간 이곳에서 불교학설을 연구한 사정과 관련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수도인 개성에만도 70여개의 절을 건설하였는데 대표적인 절만 보더라도 령통사주변에 화장사, 현화사, 총지사, 귀법사, 오룡사 등이 있었다.

이렇듯 령통사는 고려왕실의 적극적인 비호밑에 끊임없이 륭성번영의 길을 걸어오다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배불양유정책으로 점차 쇠퇴되여 16세기말에 불타 없어지고말았다.

그때로부터 400여년간 력사의 풍운속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던 령통사는 한없이 숭고한 애국, 애족, 애민의 리념을 지니신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원상그대로 훌륭하게 복원될수 있었다.

령통사는 예로부터 주변경치가 아름다와 송도에서 으뜸이라고 일러왔다.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동청룡, 서백호에 배산림수하면 만고의 명당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즉 동쪽에는 청룡이, 서쪽에는 백호가 지켜주며 뒤에는 명산을 등지고 가까이에는 물이 흐르는 곳이 되여야 한다는 뜻이다.

령통사가 바로 지리풍수적으로 그러한 곳에 위치하고있다고 말할수 있다.

동쪽에는 청룡인 시루봉이 솟아있고 서쪽에는 백호인 재봉이 있으며 뒤에는 명산이고 이 일대의 주산인 오관산이 병풍마냥 둘러서있고 앞에는 맑고 시원한 화곡천이 령통사를 유유히 감돌아 16세기 유물론철학자이며 송도3절의 하나인 화담 서경덕이 살던 화곡동으로 흘러들고있다.

18세기 지리학자 리중환이 쓴 《택리지》의 《산수총론》에서는 《예로부터 산형이 뛰여나면 산이 둥글고 산이 뛰여나면 물 또한 맑으며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곳에 산이 이루어져야 그 산이 힘을 낸다고 하였다. 이런 곳이 우리 나라에 4개가 있는데 첫째로 송악의 오관산이요 둘째로 문화의 구월산이고 셋째로 한성의 북악산이며 넷째로 진황의 계룡산을 들수 있다.》고 하였다.

령통사주변은 지금도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꽉 들어차있어 한낮에도 해빛이 들지 않을만큼 수려하다.

하기에 옛사람들은 령통사의 산악미, 계곡미, 수목미를 가리켜 령통3미라고 불렀던것이다.

령통사에서 제일 일러주는것은 령통사대각국사비이다.

이 비는 고려시기 천태종불교철학의 창시자인 의천의 비다.

의천은 고려 11대왕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여나 우리 나라 불교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불교학설을 창시하고 그의 시조가 되였으며 1 000여종에 4 769권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대장경을 간행함으로써 당시 아시아불교에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의천은 승려로서의 이름이고 대각국사는 그가 죽은 후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추증한 시호이며 본명은 왕후이다.

의천은 1055년 9월 28일 만월대왕궁에서 태여나 아버지 문종왕의 어명을 받고 11살에 령통사에 들어와 승려가 되였으며 많은 불교서적들을 탐독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송나라에 1년 2개월간 다녀온 후 천태종불교를 창시하고 1101년 10월 5일 4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 령통사에 묻혔다.

령통사대각국사비는 의천이 죽은 때로부터 24년이 지난 1125년 고려 인종왕시기에 세워졌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당시 봉건관료이며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이다.

비의 앞면에는 의천의 래력을 새겼으며 뒤면에는 의천의 묘실을 꾸리고 비를 세우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비는 거북받침, 비몸, 비머리로 되여있는데 특히 비몸을 받치고있는 거북의 형상이 아주 생동하다.

비는 조형예술적으로 아주 잘 형상되였을뿐아니라 당시 고려의 력사를 연구하는데서 사료적가치가 있는것으로 하여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로 되고있다.

령통사에서 또한 일러주는것이 불전인 으리으리한 보광원 앞마당에 솟아있는 령통사5층석탑이다.

탑의 높이는 6. 48m이며 한단으로 된 기단우에 화강암을 잘 다듬어 5층으로 쌓았다. 탑몸은 차례줄임을 비교적 크게 주고 몸돌의 높이를 크게 주었다.

령통사5층석탑은 고려초기의 높은 건축술을 보여주는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이밖에 보광원, 중각원, 숭복원, 보조원, 영녕원, 경선원 등 령통사의 복원된 하나하나의 건물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려시기 인민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재능에 대하여 감탄을 금할수 없게 한다.

승려 리선재의 말에 의하면 2005년 10월 령통사가 복원된 후 현재까지 이곳을 찾은 남조선사람들과 해외동포들은 수천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민족공동의 귀중한 재부인 령통사를 원상그대로 복원하도록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해하면서 조국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실현해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할 결의들을 피력하였다.

력사의 이끼속에 영원히 묻힐번 하였던 령통사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수령이 위대해야 민족의 력사도 빛을 뿌릴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깊이 절감하게 된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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