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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16


이튿날, 연구사들이 아직 사업에 착수하기 전시간에 부원장은 본소로부터 돌아왔다. 과학원으로는 떠나지 않았다.

예열장치의 가동정형이 잘되여가는것을 알아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엇때문에 자기를 불렀는가 하는것도 말하지 않았다.

연구사들은 못내 궁금해하였으나 그의 표정이 하도 온화했으므로 물어불수도 없었다. 저녁때에 가서야 모든 사정이 명백해졌다.…

이날 지형민은 아침부터 줄곧 현장에 나가있었다.

송풍장치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연구사들이 어떻게 도와주고있는가 하는것을 료해하고 원료장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예열장치의 작업이 순탄하게 거듭되고있었다. 새로 설치한 자동평량기가 순조롭게 작용하여 예열과정을 거친 구단광들이 회전로에 끊임없이 흘러들고있었다.

새로 꾸린 성구직장장실에서는 로동자들, 기사들, 연구사들이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이야기판을 벌리고있었다. 이 며칠동안에 있었던 긴장한 일들을 두고 소감들을 나누는것이였다.

실패했을 때의 실망, 규격이 차이났던 자재며 식당에 가서 떠올랐다는 생각, 풋잠속에서 꾸었던 꿈, 시동하기 전의 예감이며 실패 혹은 성공의 징조…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흥미없이 들릴 이야기들이였지만 그들에게는 더없이 흥미있었던것이다.

모두가 일치하게 예열장치의 훌륭한 성능을 칭찬했다.…

저녁 7시경에 지배인이 부원장선생이 있느냐고 현장지령실에 전화로 물어보았다.

얼마후에 그자신이 차를 타고 6호로에 나왔다.

보통 그가 현장에 차를 타고 나오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차에서는 당비서도 함께 내렸다.

6호로에서는 그때 로체송풍이 한창이였다. 이즈음에 와서는 로안의 온도파동이 거의 없어져가고있었다, 최혜영이 매일 작성하고있는 조업그라프는 굴절이 심하던 구간을 지나며 차츰 평형에로 바로잡혀나가고있었다.

《부원장선생은 어디 계시오?》

로앞에 올라온 지배인은 때마침 시료를 뜨고나서는 로장더러 물었다.

《운전실에 있습니다.》

운전실에는 용해공들과 연구사들, 시료 가지러온 분석공이 있었다.

《부원장선생,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실험공이 가져온 분석표를 들여다보던 지형민은 영문을 몰라 두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우리 공장에 와서 지내면 어지간한 사정이야 소통하고 살아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지형민은 작은 눈을 깜빡이며 어정쩡해졌다.

《시치미를 떼시는군.… 아니, 선생 한분이 없다구 해서 여기 일이 안되는게 있소? 우린 뭐 맨바지저고리들이우? 연구사들도 제할일을 모르는 사람이우? 왜 그러시오, 과학원당조직에서도 다 생각이 있어 오라고 했겠는데 왜 올라가지 않고 그러시우!》

지배인의 어조에는 말로써 다 표현할수 없는 유감이 풍기고있었다.

《나도 방금전에 회의에서 돌아와 우리 비서동무가 말해주니 알았소. 글쎄 과학자들의 일이 뭐이 그리 급한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정 올라가지 못할 형편이면 여사타는 말이라도 해줘야지.… 일을 같이 하면서 같이 지내는 사이에 너무하지 않소!》

지형민은 난처한듯 눈길을 내리깥고 관자노리를 쓰다듬었다.

기염을 토하고난 지배인은 곁에 놓인 접철식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외투자락을 헤치고 주머니에서 물부리를 꺼냈다.

시종 미소어린 표정으로 서있던 당비서 심득수가 말했다.

《과학원당조직에서 우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 과학자들 집단에 무슨 돌발적인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해서.…》

최병기는 담배연기를 한뭉테기 훌 내불고는 미간을 찌프리며 제 말을 잇대였다.

《전쟁때나 몹시 급한 때라면 몰라도 이젠 일이 한고비 넘어섰는데… 사람의 일생에 한번밖에 없는 환갑날이야 집에서 가족들, 한기관사람들과 모여앉아 지내야지 객지에서 어디 됐습니까! 더군다나 부원장선생은 큰 기관의 책임일군인데…》

그제사 다른 사람들도 모두 영문을 깨달았다.

놀라움과 존경의 유감스러움이 엇섞인 착잡한 눈길들이 어줍게 웃고있는 지형민의 수그린 얼굴에 집중됐다.

《우리 지배인동문 너무 섭섭한 나머지 선생의 환갑을 자기 성미대로 축하하는것 같습니다.》

심득수의 말에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무겁던 분위기는 한결 즐거워졌다. 지배인도 비서의 말에서 표현된 자기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지 벙글써 웃었다.

《좌우간 무심히 보낼수는 없는 날인데 집에 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합시다. 준비한건 없지만 어쩌겠습니까. 내 이자 집에 전화를 걸구 그래서 우정 차를 가지고 왔소.》

《난 방금전에 여기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지형민은 못내 송구스러워했다.

《이러지 마시우, 환갑날까지 구내식당에서 쇠게 해서 안됐습니다만 몰랐으니 어쩌겠소. 허물하지 마시구 같이 갑시다.》

지형민은 도움이라도 바라듯 당비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비서도 지배인과 같은 립장이였다.

《같이 갑시다. 준비한건 없을겁니다. 무심히 지낼수 없는 우리들의 성의로만 받아주십시오.》

용해공들도 연구사들도 한결같이 권했다. 지형민은 망설이며 생각을 더듬다가 이윽고 눈길을 들었다.

《고맙소. 동무들, 지배인동무, 비서동무, 고맙소.

그렇지만… 내 심정을 리해해주시우. 나는 일이 바쁘거나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환갑날을 여기서 보내는게 아닙니다.

내게는 오늘같이 기쁜 날이 없었고 나처럼 뜻깊게 환갑을 쇠는 사람이 없는것 같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구상해오시고 현명하게 이끌어주시는 야금공업의 주체화를 위해 투쟁하는 길에서 하나의 몫을 감당하고있는 우리 사업이 완성되여가고 오늘은 저렇게 ㄱ철이 장쾌하게 쏟아져내리는걸 보니 내 한평생도 빛이 나는것 같고 기쁘고 행복한 심정을 이루 다 말할수 없습니다.

내가 하면 무얼했겠소! 동무들이 하는 일에 방해나 되지 않았다면 고작이지. 야금부문 기술자로, 과학일군으로 한평생을 크나큰 신임과 사랑만을 받아오면서도 어버이수령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일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오늘은 이렇게 새 야금법이 한걸음 완성되여가는걸 보니 로앞에서 떠나고싶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노력해온 일이 적으나마 우리 수령님께 기쁨을 드럴수 있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한평생이 보람크게 느껴지고 이 환갑날도 행복하기 그지없소.

나는 그저 이 한밤을 로앞에 앉아서 지새우고싶은 심정이외다.》

운전실안은 전에없이 정숙했다. 사람들은 오랜 야금일군의 그 진정어린 말을 가슴깊이 새겨듣고있었다. 지배인도 더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시료통을 들고선 분석공도 돌아갈 일을 잊어버리고 그냥 서있었다. 송탄의 고르로운 진동음도 그치고 로의 머리부에서는 느리게 넘어갔다. 서서히 돌아가는 로에서는 뻘건 철알이 불꽃을 날리며 쏟아져내렸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선생의 심정이 리해됩니다.》

당비서의 말에 고무된듯 지형민은 회포에 싸여 지그시 앉아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하고싶은 말도 가슴에 그득해집니다.

환원구단광, 생구단광 하던 때의 일들도 회상되고 일시적후퇴때 콕스가 떨어져 애를 먹던 일도 떠오릅니다. 지금같으면 아마 그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겁니다.…》

《…》

《…》

《…난 그때 무산에 가서 포탄과 수류탄을 만들 과업을 받고 선발대로 들어갔댔지요. 광석도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탄광도 있었습니다.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수입연료가 없었지요. 앞일이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들어오는 후퇴대렬을 헤치고 쌍포로 향했습니다. 허나 미처 나가지 못했지요. 적들이 들어오는 판이였으니까요. 할수없이 도중에서 어느 제철소구내에 찾아가 가까스로 몇차판 수집했지요. 그때 복새판에서 그 차판을 끌어가던 이야기를 다하자면 끝이 없지요.…

공부도 했고 기술도 아노라고 자처했지만 기존지식에만 의존하다나니 남들이 해오는 방법으로밖에는 쇠를 녹일수 없는줄로만 생각했더랬습니다.

그후에도 주체사상, 자력갱생에 대해 배우면서도 진수를 깨닫지 못했었지요.

68년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의 북부지구를 현지지도하실 때 야금공업을 주체화할 방도를 깨우쳐주시면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제나라 땅에서 쇠를 녹여 화승대도 만들고 철알을 부어 외적과 싸웠다는 내용의 교시를 전달받고는 참 많은것을 생각했댔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전날 력사도 배웠지만 다 헛배웠지요. 오늘에 필요한것, 앞날을 위해 필요한것을 찾아낸것이 아니라 그저 지식으로 쌓아놓기만 했던겁니다.

우리 수령님의 원대하고 심원한 사상과 헤아릴수 없이 깊은 지식을 배우자면 참… 끝이 없지요!》

로앞에서는 작업이 계속되고있었다. 6호로아래에 세워둔 승용차에서는 기다리기에 지친 운전사가 푹신한 안장에 파묻혀 잠들어버렸고 회전하는 로를 따라 로체공들이 초병마냥 순회하고있었다. 린접한 로들에서도 불길이 이글거리며 작업은 한창이였다.

오랜 야금일군들이 인생행로에서 잊을수 없었던 지난날을 뜻깊게 돌이켜보는 이 시각에 새 세대 야금공은 인생의 보람 큰 앞날을 마련하고있었다.

이날 저녁 박동길은 두고두고 별러오던 일을 단행했으니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원료장에 가서 장인숙이를 찾았다. 그곳 휴계실에서는 손풍금과 기타의 흥청거리는 반주에 맞추어 처녀들의 노래소리가 울리고있었다.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도 장인숙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불빛이 환한 철기둥옆에서 멋적게 서성거리며 한식경이나 기다렸다.

련습을 마치고 흩어지는 동무들이 웃고 떠들며 익살궂은 롱을 던졌다. 만만한 백금순이까지도 코소리로 옹알대고 웃으며 지나갔으나 배심좋게 견디여냈다.

장인숙은 쏘아보는 눈길속에 파들거리는 미소를 감추고 새침해서 나타났다. 동길은 말할게 있노라고 푸접없이 몇마디 하고는 앞장서서 나갔다.

원료장마당을 지나서는 구내도로를 등지고 해안쪽으로 걸어갔다. 처녀는 같림목에서 망설이며 못마땅한듯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리여 타박타박 뒤따랐다.

침목들이 우둘투둘한 구내선로를 따라가다가 정광무지로 다져진 언덕을 지나 훤하게 트인 바다가에 나섰다.

저편에서는 불을 밝힌 굴착기가 단조로운 작업을 반복하고 보수직장앞으로 구부러진 철길로는 무개화차를 끈 기관차가 지나갔다.

박동길은 부드러운 모래무지에 자리잡고 앉으면서 흥분으로 하여 가슴을 설레이고있었다. 처녀는 어스름한 공지를 담차게 둘러보면서 그곁에 가만히 서있었다.

바다바람이 불어왔다.

무역짐배들이 닻을 내린 바다쪽에서 거센 파도소리가 어둠속에 퍼져가고 기슭에 달려드는 물갈기를 번지며 모래톱에 기여올랐다.

비가 온 뒤의 하늘은 아직 흐려있었으나 흩어져가는 구름들사이로 드러나는 별들은 유난히도 반짝이였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오래도록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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