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15


혜영은 이날 종일토록 집에 있었다.

아침에는 의사가 왔는데 진찰해보고는 가루약을 몇봉지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한데는 없습니다. 신경이 몹시 약해졌는데 너무 과로한것 같군요. 며칠동안 푹 쉬십시오.》

혜영은 말없이 듣기만 했었다.

찌뿌둥하니 흐린 날씨에 오후부터는 이슬비가 내렸다.

현장에 나가볼가 하고 망설이는 때에 실장과 원옥희가 찾아왔다.

그들은 오전에 진행된 예열장치의 완공과 예열공정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데 옥희는 침착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이였다.

《모두들 예열장치에 얼마나 관심이 큰지… 부원장선생도 오전내내 거기 나가게셨소. 과학원에서 올라오라고 하는 모양인데 떠날 생각도 하지 않더군.》

리평은 웃으며 말했으나 듣고있던 혜영은 흠칠했다.

《과학원에서 무슨 일로 부른대요?》

불안한 심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심상하게 물었다. 했으나 리평도 원옥희도 모르고있었다.

《내가 본소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오늘중으로 떠나라고만 했지 다른 말은 없더군.》

리평의 말이였다.

어째서 부원장을 부르는지 몹시 궁금했다. 과학자집단의 사업을 총화짓기 위한 준비때문이나 아닌지… 그러면 혜영이도 미구에 떠나야 한다.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인지…

총화준비이야기를 서로 나누다가 두사람은 돌아가려고 했다. 허나 리평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원옥희를 먼저 보내고 잠시 앉아있었다.

《혜영동무하고 좀 의논할 일이 있소.》

미소를 지은 온화한 표정이였으나 서두는 정중했다.

《혜영동문 우리 연구실에 아주 옮겨올 생각이 없소? 집도 여기 있지, 아버지도 제강소에 계시지… 여러가지로 편리할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연해지려고 애쓰면서도 침착하게 물었다.

《그럴수 있나요?》

《혜영동무만 동의한다면 쉽게 해결될수 있소.》

그것은 그자신도 부모들도 바라던바였다. 허나 선뜻 대답은 하지 못했다.

《이전에 성원이 다 차서 안된다고 하더니… 어떻게 된 일인가요?》

《원옥희동문 오래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가게 될것 같소. 그러면 아무래도 사람이 부족한데 우리로서는 새 사람을 받기보다 서로 파악이 있는 사람이 오는게 나으니까.》

혜영은 까딱하지 않고 뒤말을 기다렸다.

《지금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오. 부모들과도 의논해서 차차 얘기해주오.》

《그런데… 옥희언닌 어디로 가는가요? 전 전혀 처음 듣는 소리군요.》

《물론 누구도 아직 말한 사람은 없소.》

《그럼 무엇때문에?》

리평은 여전히 웃음어린 얼굴로 한동안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하긴 이제 다 알게 될 일이니 숨길것도 없지. 옥희동문 얼마후에 결혼하게 되오.》

《결혼이요?… 남자는 어디 있어요?》

《우리 가까이에 있소. 박성국동무요.》

《박성국동지요오?-》

혜영은 더욱더 놀라면서 눈이 동그래졌다.

《왜 믿어지지 않소?》

《전 그저… 그 사람들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는데요.》

《좋지 않았지.》하고 리평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나간 일들을 더듬어보는듯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생각에 잠겨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래동안 같이 일해오면서도 모르고있던 품성의 어떤 측면을 어느 한 계기에서 문득 알게 되는 경우가 있소. 그런 경우로 하여 여태까지 좋게 생각해오던 사람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도 되고 혹은 좋지 않게 보아오던 사람에게 매혹되거나 존경심을 품게 될수도 있는거요.》

《그런 일이… 있었는가요?》

《우리 생활이라고 왜 단순하겠소. 새것을 탐구하고 창조하는 줄기찬 생활인데… 새것의 탄생이 진통없이 이루어지는 례가 있소? 사업에서, 생활에서, 사람들 호상관계에서 그리고 매 개인의 량심속에서 복잡하고 긴장한 투쟁이 벌어지고있지요.》

《…》

《지금 새로 만들어놓은 성구공정만 봐도 그렇지. 대형성구기는 강기석이라는 한 로동청년이 착상한것이지만 그것이 완성되여 지금같은 우월성을 발휘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합치고 힘을 들였겠소! 묵살되여버릴번 한 그 착상을 처음으로 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해나선 사람이 누구였소? 자기것을 버리면서 말이요.… 한 인간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창조의 결실을 스스로 가치없는것이라고 선포한다는건 결코 헐한 일이 아니요, 남들이 다 그렇게 인정하는 경우에도 선뜻 수긍되지 않는게 만든 사람의 심정이란 말이요.

나는 성국동무를 잘 아는 처지지만 그땐 참 머리가 수그러졌댔소.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밥맛을 잃고 밤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에 싸여 사람이 반쪽이 되였댔소.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의 착상을 지지하고 또 도와도 주었단 말이요.

성국동무라고 왜 명예에 대한 갈망이나 집단의 평가에 마음을 쓰지 않겠소. 자기를 극복하고 량심과 정의감을 더럽히지 않았지. 자기 존엄을 지켰단 말이요.

생활에서 인간적인 존엄을 지킨다는것은 결코 헐한 일이 아니요. 그건 권력에 의한 위엄도 아니고 행세군들의 거드름도 아니요. 굴할줄 모르는 기개, 더럽혀지지 않는 량심이라 할지.… 그건 명예처럼 빛나는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명예를 담보하는것도 아니지만 시련속에서도 인간을 굳세게 해주고 처지에 아랑곳없이 인간을 인간답게 빛내여주는것이요.》

《…》

《결함은 물론 있는 사람이였지.》하고 그는 시작했던 화제로 돌아가면서 계속했다.

《하지만 자기를 극복하고 공명이나 리익을 떠나 량심과 정의감을 지키면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것이요. 옥희동무도 아마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귀중하게 간직했던 모양이요.》

혜영은 눈길을 떨구고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까닭모를 설음이 북받칠듯 했으나 한숨과 더불어 잦아들었다.

원옥희가 박성국에게서 보았고 귀중하게 간직했다는 아름다운것에 대한 이야기, 인간을 인간답게 빛내여주는 존엄에 대한 이야기… 언젠가 강기석이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한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이, 그의 사람됨이 방금 들은 말과 비슷했다.

…그때도 비가 왔었다.

지금처럼 봄비 내리는 따스한 방안이 아니라 가을비가 뿌려치는 원료장의 휑뎅그렁한 경간사이였었다.

그것은 혜영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충고와 하소연을 털어놓았던 날이였고 강기석의 모습도 전혀 새롭게 느껴지던 저녁이였으나 그밤과 그 이후의 강기석은 그전보다 더욱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때까지의 강기석은 성실하고 인정겹고 재능있는 청년으로 혜영이에게 호감을 주었다면 그밤의 강기석은 굳세고 두렵고 리해할수 없는 청년으로 혜영이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생활이 멀어질수록 떠나온 대안이 그리워졌고 리해할수 없이 두렵던 존재는 은근하고 살틀하게 처녀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난관과 갖은 비난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던 의젓한 그 자태는 꿈속에서도 떠올랐고 그를 랭대했던 자신을 돌이켜보느라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여 자책과 련민, 사랑과 희망을 안고 처녀는 다시 돌아왔으며 지금은 그들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한마디만 떼면 부축해줄 손이 있었고 한걸음만 내짚으면 뜨겁게 안아줄 품이 있었다. 하지만 처녀의 눈뜬 자아가 제동했고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벌어진 사이는 격간이지만 굽어보니 심연이였다. 하여 건널수도 없고 단념할수도 없는 기슭에서 혜영은 몸부림치고있었다.

저녁어스름이 찾아드는 창밖에서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시름없이 내리는 봄비는 움돋은 나무뿌리를 적시고 부풀어오른 대지에 스며들면서 시름많은 처녀의 가슴에 우수만 더하여준다.

창밖을 내다보며 물끄러미 앉아있는 혜영은 현관에서 떨거덕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래방문이 여닫기더니 얼마후엔 웃방문이 열렸다. 얼굴을 돌린 혜영은 문가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누가 또 널 찾아왔다.》

《누군데요?》

《문병을 온 사람같다.》하고 부엌쪽으로 나가면서 현관에 대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보시우.》

그러자 곧 문가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몸이 좀 어떻습니까?》

꿈속에서 들려오는듯 한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흠칠 몸을 떨었고 저도 모르게 세타의 깃을 여몄다. 그리고는 얼결에 한 그 동작에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돌려버렸다.

강기석은 방안에 들어서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좀 어지러웠을뿐이예요.》

《다행입니다. 우린 은근히 걱정했습니다.》

혜영은 잠자코 있었다. 어째서인지 우리라고 한 말속에 강기석이라는 사람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졌던것이다.

《몸이 불편한 때에 안됐지만 난 문병도 할겸 만나서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의 태도는 부드러웠으나 혜영은 자세를 가다듬고 딱딱하게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우린 이미 모든걸 서로 다 알고있는데.》

벽쪽을 바라보면서 마치 자기자신을 두려워하는듯 한 근심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강기석은 조용히 듣고나서 굳세게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린 서로 더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말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건 공연한 일이예요.》

망설이면서 그렇게 말을 뗀 그 녀자는 마음을 정한듯 생각에 잠겨 계속했다.

《우리가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한 후부터 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동무에 대해서도, 우리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때부터 난 동무를 단념하려고 했어요, 물론 생각처럼 쉽게 되진 않았지만. 그렇게 마음먹었고 또… 동무도 아마 모르진 않을거예요.

우리들의 관계는 그때부터 끝났던거예요. 그후의 일들은 미련이예요. 감정의 서글픈 타성이지요.》

그리고는 흥분하기 시작하는 자신을 다잡으려는듯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강기석은 창문가에 서있었다. 녀자의 말을 들으며 비내리는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것이였다.

《나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일시적인 기분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잘못일수도 있지요. 결함이 없고 실책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들처럼 생활에 대한 안목이 높지 못하고 경험이 많지 못한 젊은 나이에는 결함이나 실책을 얼마든지 범할수 있지요. 옹이는 나무의 흠집이지만 그것이 나무를 장식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과도 같은 자연미를 더하여주기때문이겠지요.…

물론 우리들사이에 그런 일이 있은 뒤에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고 몹시 괴로왔습니다. 하지만 한편 그것은 나를 분발시켰고 힘이 되였소. 그런 속에서도 나는 혜영이를 기다렸소. 믿고싶었습니다.

혜영이는 나에게 여전히 귀중한 사람이니까!》

처녀의 눈에 광채가 어리고 두볼이 홍조에 물들었으나 그것은 순간이였다.

그뒤엔 마치 락조가 사라진 저녁하늘처럼 어두운 눈길로 벽우의 한점을 초연히 바라보는것이였다.

《그렇지만 강동무가 사랑한것은 이전날의 나였지 지금의 나는 아니예요. 동문 나를 다 알지 못했어요. 외모나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을 보고 괜찮은 녀자라고 생각했던거예요.

난 언제나 자기를 실제보다 더 훌륭하게 보이려고 마음썼으니까요. 저라는 인간이 다 드러난 지금엔 이런걸 털어놓기도 쉽지만 그땐 자기를 자꾸 가리우고 장식했어요. 아름다운 허울이였지요.

지금 동무앞에 있는것은 심장에 병들고 가리울것도 없이 자기를 드러낸 보잘것없는 녀자예요.》

강기석은 그 녀자쪽으로 돌아서서 가까이로 다가가려고 했으나 석고조각상처럼 굳어진 표정에 놀라 방가운데 서버렸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어스름으로 하여 그 녀자의 얼굴은 정말로 병든 사람처럼 해쑥해보였던것이다.

《혜영동무, 왜 그렇게 말하오?》하고 청년은 걱정에 싸여 물었다. 두사람의 거치른 숨소리가 서로의 심장을 압박하는듯 했다.

《하긴 아무렇게 말해도 일없소. 진실은 언제나 해빛처럼 귀중하니까. 나에겐 이전날의 아름답고 명랑하기만 하던 혜영이보다 병들고 신경질적인 지금의 혜영이가 훨씬 더 귀중하오.》

가슴에 넘치는 사연을 더 어찌할바를 몰라 기석은 입을 다물었다. 했으나 털어놓지 못한 심정은 열정이 어린 눈에서 빛나고있었다.

혜영은 이마에 잔주름이 가득해지면서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발… 전 괴로와요. 부디 혼자 있게 해주세요. 부탁이예요.》

더는 한시도 부지할수 없는듯 힘없이 머리를 수그린, 고뇌로 하여 이지러진 그 녀자의 표정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강기석은 은근하게 말했다.

《돌아가겠소! 혜영이가 괴로와한다면 언제나 곁에 있고싶은 심정이였지만 지금은 돌아가겠소. 하지만 앞으로의 더 뜻깊은 상봉을 위해 가는것이지 아주 가는건 아니요.

부디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오.》

그리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 녀자는 까딱 움직이지도 않고 어두워지는 방안에 오래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한동안이 지나서 번민에 무거워진 머리를 추켜들었을 때 찌프린 미간에는 심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으나 자기 생각을 뒤쫓는듯 커다랗게 뜬 두눈에는 희미한 광채가 어리고있었다.


×

이날 저녁 늦은시간에 심득수가 함께 돌아가려고 지배인실에 들어서니 최병기는 일을 마치고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있었다.

예열공정을 거쳐서 장입된 원료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는것이 확정되였으므로 심득수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무거운 생각에 잠긴듯 한 지배인의 표정을 여겨보면서 그곁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일들이 하나하나 풀려가는데 어째 기쁜 기색이 없습니다.》

비서가 건네는 말에 최병기는 시무룩이 웃었다.

《기쁘면 춤을 추겠소? 결과는 괜찮은데 모든 계통이 정상화되자면 아직도 할일이 많지요.》

《할일이 많지요.》하고 비서도 선선히 공감했다.

《도처에 벌려놓은 일들이 많은데 한곬으로 몰아가면서 완성을 하자면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시험생산에만 열을 올리다나니 종업원들의 생활을 비롯해서 돌아보지 못한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닌것 같습니다.》

《나도 지금 그 생각이요.》

최병기는 가슴이 답답한듯 숨을 몰아쉬더니 뜨직뜨직 말했다.

《오늘 점심후에 난 문화회관에 나갔댔소.

특별히 무슨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쪽일에 너무 관심이 없었던게 두루 마음이 걸려서 형편도 알아볼겸 관장을 만나서 얘기라도 나누구싶었소. 한데 관장은 오후에 안 나왔더군. 난 생각하기를 어제밤에두 늦게까지 수고를 했으니 집에서 쉬는줄로만 알았소. 마침 집이 그앞에 있다길래 한 동무를 앞세우고 찾아갔더랬소.》

최병기는 담배만 태우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난 그래두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고 음악이요, 회관이요 하고 그러루한 일에만 정신이 팔려 다니길래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드랬소. 한데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그만 우두커니 서버리고말았소.

방 한가운데는 앓는 아주머니가 머리를 동이고 누웠는데 부엌에서는 이 사람이 아궁이를 고치고있더란 말이요. 아이들은 자그만치 딸들만 다섯이라오. 얼굴에 주근깨박힌 큰딸이 흙을 이기면서 웃고있는데 이 사람이 쌓고있는 부엌이라는게… 객주집도마상이란 말이외다! 일할줄은 영 모르더군.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엉거주춤 일어선채 나를 외면하고있더군.…

난 원래 일할줄 모르는 사람들하고 녀자처럼 손이 하얀 사람들은 곱게 보지 않는 성미지만 거기서는 그 사람의 흙묻은 손을 잡고 사죄를 하고싶었소.

팔을 걷고 들어서서 부뚜막을 쌓아주고싶은 생각이 울컥했지만 참고 돌아섰소. 말도 건네지 못했소.…

후방과에 전화를 걸어 당장 도와주라고 일렀고 방금전에 제대로 다 해놓았다는 보고도 받았소.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개운해지지 않는구려.》

심득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하는듯 말없이 방안을 뚜벽뚜벅 거닐었다.

《비서동무, 우리 주택사정이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그 동무에게도 우선적으로 널직한 주택 한세대를 해결해줍시다.》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던 심득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 지난 가을에 탑식아빠트가 완공됐을 때 관장의 몫으로 한채 배당됐지요. 한데 관장동무가 양보했습니다. 회관에 새로 배치된 직관원이 제대군인인데 집이 없어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고 걱정하면서 자기 몫을 주었습니다.》

최병기는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그는 게면쩍은듯 눈을 슴벅거리며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하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구만.》

범상하게 던진 그 한마디속에는 지나간 일에 대한 회오도, 책임에 대한 높은 자각도, 앞날을 두고 하는 결의도 어리여있는듯싶었다.

담배불을 끄고 꽁초를 재털이에 털어버리고는 물주리를 손에 쥐고 무심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두사람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제강소일대의 여기저기엔 불빛들이 휘황하고 밤교대의 작업이 도처에서 들끓고있었다. 그것은 이전날에도 있었고 래일에도 계속될 평범한 로동의 정경이였으나 지금은 어쩐지 새삼스러운 감동을 자아내는것이였다.

그 로동속에서 생활의 불편과 부족을 묵묵히 참아가며 나라의 존엄과 재부를 마련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하고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말없이 구내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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