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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14


이날 밤엔 현장에서 밝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공들이 로에 오르내리더니 안전시설을 꾸미고 발판을 끌어왔다.

가설한 전등이 어둠을 밝히고 절단기들이 불을 뿜었다. 따낸 로체밑에서 달아오른 내화벽돌을 파내고 활차에 매달아 새 내열관을 끌어올렸다.

화기에 불그레해진 로동자들의 땀흐르는 얼굴이 언뜻거리는 로체우에서 박운보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정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로 직장에 나오기 시작한 로인은 송풍관제작도 자기가 맡아서 했었다. 그리고는 지금 그 조립을 지휘하면서 한손으로 기중기에 신호를 보내는것이였다.

용해공들은 로체안에서 송풍관을 받들어올리며 땀을 흘리고있었다.

현장에 나온 지배인은 뜨거운 로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간고한 로동의 정경을 경이를 품고 돌아보고있었다.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한것은 자정무렵에 나타난 관장의 모습이였다.

악기를 든 일여덟명 청년들의 앞장에 서서 현장에 나타난 관장은 로체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정신없이 바라보는것이였다.

이윽고 그는 단추도 채우지 않은 홑섶양복의 깃을 필럭이면서 로앞에 올라서자 뒤따라온 청년들에게 말했다.

《여기가 좋겠소!》

악사들은 보면대도 의자도 없이 클라리네트를 입에 대고 음계를 조절하는 관장주위에 적당히 둘러서더니 곧 힘찬 혁명가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두대의 트럼베트와 코르네트, 대고와 손풍금, 기타와 바이올린 등으로 구성된 갖춤새없는 악대였으나 그들이 연주하는 씩씩한 곡조는 일하는 사람들의 기세를 북돋아주고 사기를 고무하면서 밤의 작업장에 활기가 끓어넘치게 했다.

관장은 연주에 취해있었다. 어둠속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트럼베트의 쨋쨋한 소리에 어울려 정력적으로 리듬을 안받침하다가도 어딘가 낮은 곳에서 헤매는듯 한 현악기들을 도와 명랑하게 선률을 끌고가면서 기분좋게 안경을 번뜩이는것이였다.

미구하여 튜바와 소고를 들고 두세명의 소조원들이 더 나타난것으로 하여 연주는 더욱 활기를 띠였다.

《괜찮은데.》

최병기는 힘차고 명랑한 음악이 간단없이 울려퍼지는 작업장의 전투적인 분위기에 감동되여 혼자 중얼거렸다.

《괜찮아- 우리 문화회관 관장도 괜찮거던.》

예열장치의 설치작업도 이날 밤에 완공을 다그치고있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바다쪽에서 바람이 불어쳤다.

습기찬 바람은 메마른 땅우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흐린 날씨에 스산한 기분만 덧궂혔다.

아침나절에 현장에서는 예열장치의 종합적인 가동을 예견하고있었다.

지배인, 당비서를 비롯한 제강소사람들이며 연구사들까지 모여들어 연진실부근의 넓지 않은 마당이 사람들로 붐비였다.

마지막공정을 완결하느라고 여념없이 일하고있는 강기석에게로 원옥희가 찾아왔다.

《현장에서 새운걸 모르고 우린 밤새껏 기다렸어요.》

《어떻게 여기 다 나타났어?》하고 기석은 작업대의 층계우에서 옥희를 굽어보며 의아해했다.

《아버지가 오신걸 모르지요? 은하도 데리고 왔더군요.》

옥희는 얼굴을 붉히며 상글상글 웃었다.

《그-래? 허, 아버진 꼭 이렇게 바쁜 때에만 오신다니까!》

작년에 왔던 때를 생각하며 기석이도 웃었다.

《여기에 아주 오실 생각이 있는것 같아요. 제강소일군들과 토론해보자고 오셨다더군요.》

《결심을 내렸군.》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다되였는가고 소리쳐묻는다. 수리반장이 시꺼먼 로동장갑을 내저으면서 수리공 한명을 뒤에 달고 층계를 올라왔다.

《기석동무, 평량기를 어떻게 하겠나?》

옥희는 어설프게 미소하며 이쪽을 보았다.

《지금은 들어갈 시간이 없겠지요?… 괜찮아요. 저녁에 오세요, 연구사동무도 데리고…》

옥희는 이름을 밝히기가 부끄러운지 말끝을 맺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기석은 그 마음을 리해하고 쾌활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내 이르지.》

그리고는 돌아서서 수리반장을 따라갔다.

자동평량기가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새로 만든것이다보니 수리공들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게다가 예열장치속에서 하는 일이여서 고열작업에 습관되지 않은 연구사나 설계기사들은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강기석이 주동이 되여 수리를 다그치고있었던것이다.

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있었으나 사람들은 자꾸 모여들기만 했다. 모두가 완공된 뒤의 시운전을 기대하는것이였다.

강정민이도 사무실에서 일군들을 만나지 못하고 이곳으로 찾아나왔다.

기대를 품은, 흥겨운 기분에 싸여있던 사람들은 이런 정황에 그가 나타난것을 반가와했다. 낯익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지배인과 비서를 만나서 오게 된 사연을 간단히 말했다.

최병기도 못내 기뻐했다.

《잘 오셨습니다, 좋은 때에… 아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겠수다?》

《천천히 만나지요.》

《그 사람은 아마 아버지가 오신줄도 모르고있을거요, 여기서 밤을 새웠으니까.…

어째 이거 오래 걸리는군.》

최병기는 완결작업이 진행되고있는 작업장쪽을 살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눅잦히려는듯 물주리에 담배를 붙여물고 사람들앞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강정민은 알만 한 사람들과 두루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기사장은 굳이 찾지 않았다. 지난 여름에 제강소에 왔을 때 자기를 달갑지 않게 대하던 기사장의 태도는 그의 기억에 깊이 인박혀있었으므로 더 상대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것은 물론 스쳐지날수도 있는 사소한 일이였다. 하지만 이전같지 못한 처지로 하여 제강소에 들어설 때부터 생각이 많았던 강정민으로서는 그 일을 쉽게 잊어버릴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전날엔 남다른 호의를 베풀며 서로 각근하게 대하던 사람이였던만큼 그 자극은 아프게 남아있었던것이다.

그러한 강정민이였던것만큼 사람들사이를 지나가다가 기사장과 눈길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알은체를 했다.

한명택은 뜻하지 않는 곳에 그가 나타난것을 놀라와하면서도 주름잡힌 눈꼬리에 선량한 웃음을 띠우고 다가왔다.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오고싶어서 왔소, 내라고 오지 못할 곳은 아니니까!》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며 심사가 편안치 않은 대답에 한명택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듯 어줍어하면서도 짐짓 관심을 품고 물었다.

《여러날 계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될것 같소, 일자리까지 잡아야 하겠으니.》

《여기로 아주 오시렵니까?》

한명택은 문뜩 그렇게 물으면서 이슬비에 젖은 강정민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렇게 작정을 했소.》

《그건…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명택은 생각을 미처 종잡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얼버무렸다.

《잘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기사장동무의 신세를 톡톡히 져야 할것 같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호기로운 어조와 상대방을 거들떠보는 웃음띠운 눈길에는 말과는 다른 무엇이 두드러져있었다.

그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던 한명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눈길을 떨구었다.

이 순간 그는 늘 호인으로 처신하면서도 가슴속에 의리도 정의감도 없이 지낸 자기의 사람됨을 새삼스럽게 뉘우치는것이였다.

《제 신세야… 무슨 지겠습니까만… 와서 함께 지낸다면 저도 기쁘겠습니다.》

범상한 대답이였지만 더듬거리며 한숨섞어 하는 그 말에는 그의 이즈음 생활의 고뇌와 번민이 어려있었다. 또한 그 짧은 말속에는 강기석에 대한 깊어지는 리해와 은근한 사의도 어려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연을 알지 못하는 강정민은 한마디의 인사말로 받아들였다.

《좌우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후에 또 만납시다.》하고 그는 그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한명택이 물었다.

《지금 어디서 묵고계십니까?》

《여기 그럴만한 집들이 있소.》

《물론 그러시겠지요. 한데 저… 바쁜 일이 없으시면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좀 와주십시오. 앉아서 이야기도 나눌겸 저녁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고맙소만 저녁일이 어떻게 될려는지 알수가 없구려. 기석이도 아직 만나지 못했고 또 두루… 일이 있을것 같아서…》하고 강정민은 적당히 넘겨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반시간쯤 지나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수 없게 된 사람들이 예열장치아래로 천천히 빠져나왔다. 평량기에 대한 고장퇴치를 끝냈던것이다.

최병기는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뜨겁게 잡아주면서 수고를 치하했다.

태호와 수리공들은 모자와 옷들을 벗어버리며 이슬비에 단몸을 식혔다.

《옷들을 입소, 감기 걸리오.》

최병기가 하는 소리였다. 수리반장이 담배를 찾는것을 보고 제 주머니에서 꺼내며 내밀었다.

《강동무, 아버지를 만나보오. 여기 와계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또다시 뚜벅뚜벅 앞뒤로 거닐었다.

기석은 주변을 돌아봤으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6호로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 말소리들이 일시에 그치고 조용해진 가운데 회전하는 로의 우람찬 동음이 고르롭게 퍼져갔다.

예열공정을 거쳐 진행되는 작업과정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래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윽고 지배인이 비주름히 웃음을 띠우고 누구에게랄것없이 말했다.

《자, 인젠 돌아들 가오. 운행이 괜찮소. 물론 앞으로 더 완성해야겠지만… 첫 제품은 오늘 밤에나 나오기 시작할거요.》

사람들이 몰켜서있는 뒤쪽에서 강기석은 아버지를 만났다. 거기에는 딸애를 안은 박성국이도 옥희도 있었다.

《수고했구나.》

강정민은 못내 흡족한 표정이였다.

《은하야, 누군지 알겠니?》

박성국이 그렇게 물었으나 은하는 눈이 동그래서 땀과 검댕이로 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있는 기석이를 말끄러미 쳐다만 보는것이였다.

《너를 할머니네 집에 데려간 아저씨다. 그것도 몰라?》

《아니야, 그 아저씨 아니야.》

은하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에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연구사동지, 은하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십시오. 피곤하실텐데…》

《난 괜찮소. 오히려 강동무가 수고를 했지.》하고 박성국은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우리야 수리작업이나 도왔지, 예열장치의 기본행정은 연구사동지들이 다하지 않았습니까! 며칠째 밤잠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일이 돼가는걸 보니 피곤한줄도 모르겠소.》

박성국은 유쾌하게 대답하고는 딸애를 이끌고 앞에서 걸어갔다. 뒤에서 가던 강정민이 기석에게 말했다.

《인젠 좀 시간이 있겠구나.》

《오후엔 쉬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며 기석이가 대답했다. 강정민은 만족한 표정이였다.

《잘됐다, 여러가지루.…》

사람들의 흐름에 섞여서 걸어가던 기석은 아버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비서동지를 만나보셨습니까? 로장동지랑…》

《만나보았다.》

《기사장동지도 만났어요?》

《만났다. 만나고싶은 생각은 없었다만 그렇게 됐지. 날더러 저녁에 집에 와달라더구나. 하지만 난 갈 생각이 없다.》

시답지 않아하는 태도에 기석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어째서요?》

《그 사람과 마주앉아 무슨 얘기를 하겠니! 아무 흥미도 없다.》

《저번에 왔을 때의 일때문에 그러십니까?》

기석은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강정민은 꺼리는 기색도 없이 생각을 털어놓는다.

《사람의 인품이나 속심이 반드시 큰일에서만 나타나는건 아니다. 때로는 말로 번지기조차 어려운 하치않은 일에서 사람됨이 뼈속까지 드러나보이는 경우도 있는거다.》

《그렇지만 리해도 하고 양보도 해야지요. 아버지도 늘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인정이란건 오지그릇과 같은것이여서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그건 그렇다만… 경우가 그렇지 않아.》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기석은 웃으면서 아버지에게로 다가선다.

《늙으면 노여움이 많아진다는데 아버지도 늙어가는게 아닙니까? 한때의 잘못을 잊지 않고 용서도 하지 않는다면 제 생각엔 누구보다도 용서받을수 없는 사람이 아버지같은데요. 더군다나 당앞에서, 인민들앞에서 말입니다.》

《…》

《저는 그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기석은 자기가 지내 과하게 말하지나 않나싶어 아버지의 심각해진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리해를 도우려는듯 부드럽게 계속했다.

《기사장동진 요즘 두루 비판도 받고해서 우울해지고 생각도 많아진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정을 잘 몰라서 그랬을수도 있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말 한마디라도 잘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것이 힘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흐음-》

강정민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뿜었다. 아들이 자기보다 더 크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언짢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던것이다.

《하긴 고독을 체험하는 사람일수록 인정에 민감한 법이지.》

아버지로서의 체면을 잃지 않고 난처한 국면을 굼때여버리려는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 생각엔 오늘 저녁에 기사장동지네 집에 가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아버지 혼자 가시기 무엇하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글쎄, 그래도 무방하겠지만 옥희네 집은 어쩌느냐.》

《사실대로 말하면 리해할겁니다. 또 거기야 뭐 우리가 가지 않은들 별일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가족들끼리 모여앉는게 나을겁니다.》

《하긴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렇게 아퀴를 지은 강정민은 헤여져 직장쪽으로 걸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강철로동계급속에서 자라난 녀석이 다르구나. 이젠 제법 의젓해졌단 말이야.)

그러자 몰라보게 성장한 아들에 대해서, 아들을 이렇게 키워준 생활에 대해서 깊은 감동에 싸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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