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12


구단광연구실에서 최혜영이 다시 온것을 누구보다 기뻐한것은 원옥희였다.

함께 일하던 녀동무가 왔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였다.

혜영이를 생각하는 사촌오빠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때부터 그들의 일이 잘 되여지기를 못내 바라는 심정이였다.

최혜영은 예열장치의 도입과 동시에 진행하는 로체송풍장치의 과학기술적자료를 확인하며 그 성능을 측정하는 일을 맡아하고있었다.

옥희는 현장에 나갈 때면 일감을 만들어 함께 나가기도 하고 퇴근길도 함께 걷군 하면서 혜영이의 심정을 타진해보려고 왼심을 썼으나 좀처럼 기맥을 잡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혜영이가 이전과는 달리 맡은 일에 어찌나 열중하는지 생활적인 이야기를 나눌 경황도 없었다.

그것은 혜영이에게 있어서 고민과 더불어 희망이 뒤엉킨 자기반성의 안타까운 나날이였으니 맡은 일에까지 그처럼 마음을 쓰지 않았다면 걷잡을수 없게 된 자기자신을 지탱해나가지 못했을것이다.

사랑에 취한 흥분과 막연한 기대, 베풀어지는 호의 등으로 하여 생활이 충만되여있었던 어제날에는 하는 일이 오히려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들뜬 기분이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서는 일에만 마음을 붙이려고 작정하고있는 혜영이였다.…

예열장치공사가 바쁜 고비를 넘긴 어느 일요일 옥희는 혜영이를 이끌고 시예술단의 종합공연을 관람하러 갔다.

저녁해가 따뜻하게 비쳐드는 극장주변에서는 봄바람에 날려온듯한 청춘남녀들이 유쾌하게 떠들고있었다.

구경다니기보다는 책읽기를 더 좋아하며 더군다나 사춘기를 지난 총각처녀들과 들뜬 청년들이 설렁거리는 자리에는 휩쓸리고싶어하지 않는 옥희였지만 오늘 저녁엔 그 어떤 정서적인 만족이라도 얻을듯한 명랑한 기분을 나타내며 혜영이와 나란히 극장옆의 소공원을 거닐었다.

하긴 그동안 줄곧 일에서만 파묻혀지내던 그들의 형편에서는 그러한 기분이 자연스럽기도 했다. 혜영이도 저으기 밝은 미소를 짓고 이 도시 예술인들에 대한 인상을 나누면서 입장하기 전의 시간을 즐기였다.

그들은 객석의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는데 둘사이의 좌석은 비여있었다.

《이제 오겠지.》

혼자소리처럼 하는 옥희의 말을 무심하게 들었던 혜영이도 그 자리가 우연하게 비여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석동무가 오겠구나.)하는 직감이 들었던것이다.

옥희가 강기석이와 친척간임을 알고있었으며 따라서 자기와의 관계도 들었을수 있다고 생각해오던 혜영에게는 오늘 저녁의 이 자리가 의미없이 마련된것이 아님을 깨달았던것이다.

혜영은 몸도 마음도 긴장해졌다.

(이제 그 동무가 오면 어쩔가? 일어서서 나갈수도 없고 그냥 앉아있기도 괴로울거고.)

그러면서도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옥희를 고맙게 여겼다.

불안한 흥분에 싸여있은 혜영은 객석의 불이 꺼지는것도 깨닫지 못했다.

소개자가 무대에 나서고 객석에서 박수가 일어났을 때에야 시간이 퍼그나 지났음을 알았다.

(오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에 뒤이어 영문도 모르고 구경에 따라온 자기자신이 갑자기 불만스러워졌다.

무대에서는 노래와 춤이 흘러갔다.

눈에 생기가 넘치고 선이 뚜렷한 관북지방의 특유의 미를 가진 녀성들의 춤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고있었지만 혜영은 거기에 전혀 관심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 늦어지거나 못 올수도 있지.)

언젠가 청년공원에서 만나자던 약속을 어기고 못내 미안해하던 모습을 회상하면서 스스로 변명도 해보았지만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무대에서는 사이극이 진행되고있었다.

려행가방을 들고 나들이옷차림을 한 늙은이와 로파가 작업복을 입은 한 처녀를 가운데 놓고 대화를 나누는데 관중들은 좋아라고 웃고있었다.

간단하게 설정된 오해에 의해 빚어지는 값싼 웃음거리였다.

옆을 돌아보니 옥희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있다.

(옥희언니도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있어. 오지 않는 사람때문에 불안해하는 모양이야. 아까 3인무를 볼 때에도 저런 미소를 띠우고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자 혜영은 관람석에 앉아있는것이 더없이 따분해졌다.

중간휴식이 선포되였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핑게를 대고 돌아가겠노라고 했다.

《왜, 훌륭한 종목들이 많던데.》

옥희는 만류하려 했으나 혜영은 가겠노라고 고집했다.

그러자 원옥희도 심란해하면서 따라나왔다.

사실 옥희는 관람권 한장을 미리 강기석에게 주고 공연이 훌륭하니 꼭 구경오라고만 말했었다.

생각이 깊은 옥희로서는 그들을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만나게 하려고 혜영이가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하여 원옥희로서는 선량한 의도에서 마련한 관람조직이 어색하게 되여버렸을뿐아니라 혜영이에게는 오히려 불만과 불안만을 더하여주었다.

강기석이 이날 관람에 가지 못했던것은 무슨 큰일이 있어서가 아니였다.

예열장치공사가 마지막고비여서 직장동무들이 모두 쉬지 않았기때문에 함께 나와 일하다가 일찌기 돌아가지 못했던것이다.

만일 거기에 혜영이도 온다는것만 알았다면 기어코 왔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옥희의 의도를 알수도 없었거니와 혜영이가 이곳에 와있는줄도 모르고있었다.

이튿날 점심때 기석은 박성국이와 토론할 문제가 있어서 구단광연구실로 향했다. 박성국이 현장에 나오게 되여있으므로 후에 토론할수도 있었지만 옥희를 만나서 어제저녁 관람에 가지 못한 사정도 얘기할겸 겸사해서 갔던것이다.

그리로 가면서 기석은 연구사와 길이 어긋나지 않았을가 하는 걱정을 했지 혜영이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랬던만큼 문을 열었을 때 첫눈에 뜨인 혜영이를 보자 어리둥절해졌다.

혜영은 출입문가까이의 책상앞에 앉아있었다. 들어서는 사람을 무심히 돌아보던 그 녀자는 뜻하지 않은 상면에 놀라 흠칠했으나 저편의 기쁨에 빛나는 눈길을 지탱하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을 돌려버렸다.

방안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숨가빠지는 그 따분한 분위기를 견딜수 없어 뛰쳐나가기라도 했을것이다.

《이거 또 미안하게 됐구만.》하고 박성국이 난처한듯 웃었다.

강기석이 찾아온 까닭을 알고있는 다른 연구사들도 동료를 변명하듯 한마디씩 했다.

《좀 쉬면서 기다리지 왜 찾아왔소.》

《그러지 않아도 지금 바빠하는중인데.》

기석은 유쾌한 인사들에 미소를 지었을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옥희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면서도 어제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장소도 장소지만 혜영이 있는데서 말할수가 없었으므로 오히려 오빠가 그말을 꺼낼가봐 저어하고있었다.

기석이도 그것을 눈치채고 말은 하지 않았으나 관람을 조직한 옥희의 심정까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옥희의 심정을 고맙게 여기면서 어제저녁의 일을 생각해보니 아쉽기가 그지없었다.

《조금만 앉아서 기다리오.》하는 권고에 한쪽켠 의자에 걸터앉았다.

연구사들은 예열로안에서의 매개 장치들의 팽창계수를 론의하는중이였다.

강기석은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혜영이쪽에 주의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산뜻한 작업복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녀자의 모습은 좀 파리해보였으나 전보다 오히려 아름다왔다.

(어떻게 되여 또 왔을가. 왜 나한테는 알리지 않았을가?)

이쪽을 외면한채 눈길을 돌리지 않는 옆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해쑥해진 뺨이며 펜을 쥔채 움직이지 않는 손에서 그 녀자의 팽팽한 마음이 느껴져 심장은 서서히 고동치고있었다.

꿈속에서도 잊을수 없었던 혜영이, 바쁜 고비만 지나면 다시 찾아가 반드시 만나리라고 마음먹었던 처녀가 지금 바로 눈앞에 앉아있었다.

만나서 서로 웃고 함께 거닐면 하치않은 지난 일들은 뜨거운 속삭임속에 용해되고말것이였다. 그런데도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하게 마치 두려운 존재처럼 돌아보기도 저어하며 옹색하게 앉아있다.…

박성국이 이쪽을 돌아보면서 말을 건넸다.

《어떻소, 강동문 공업을 잘 아는데 이게 련속공정에서 말썽이 없을것 같소?》

재질의 강도며 평균중량을 계산한 수자들을 내보인다.

허심한 그 물음에 기석은 오히려 난처해한다.

《이 분야는 연구사동지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동무 의견을 좀 말해보오.》

그들은 실무적인 문제에 파고들면서 토론을 벌린다.

혜영이만이 자기 자리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 녀자는 지금 로체송풍과 관련되는 기술자료를 검토하던 참이였다.

송풍량과 연소효률을 따져보다가 계산하던 문제를 다 풀지 못한채 손도 생각도 온통 마비되여버렸다. 온 신경이 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쏠리고 귀에 익은 강기석의 목소리를 온몸으로 듣고있었다.

이때 그 누가 그 녀자를 여겨보았다면 긴장으로 하여 굳어진 표정과 고통으로 하여 흐리여진 그 눈빛을 보고 깜짝 놀랐을것이다. 허나 지금 거기에 주의를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토론이 끝나고 기석이와 박성국이 나가버리자 모두들 자기 자리로들 돌아가 일에 달라붙었다.

혜영이만이 여전히 굳어진 자세대로 까딱않고 앉아있었다.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던것이다.

이윽고 그 녀자는 책과 종이를 한쪽에 밀어놓더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현장에서는 기중기차며 중기계들이 동원되여 따낸 로체에 송풍관을 설치하고있었다.

기사장이 작업을 지휘하는것이였다.

로체우에서는 용접면을 든 제관공들이 일하는데 용해공들이 그들을 돕고있었다.

혜영은 기중기차를 에돌아가서 설치작업을 관찰하다가 거기서도 오래 서있지 못하고 다시 축로공들이 일하는 곳으로 갔다.

마음을 안정할수 없었고 어디에 가나 주의를 집중할수가 없었다.

조립형편을 돌아보던 그 녀자가 다시 연구실에 들어와 책상앞에 앉아있는데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혜영은 선듯 일어서지 못했다.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렸다.

옥희가 자기를 눈여겨보는것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천천히 복도에 나섰다. 사무실은 텅 비여있고 걸개에서 내려놓은 송수화기가 책상우에 놓여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고 한동안 물끄러미 서있을뿐이였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도 바라던 때에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닥쳐온것이다.

《혜영동무, 안녕하십니까?》

인사는 새삼스러웠으나 목소리는 다정했다.

《안녕하세요.》

흥분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언제 오셨소? 난 전혀 안 오는줄 알았는데.》

가벼운 말속에 무거운 뜻이 갈앉아있는듯 했다.

(내가 온줄은 모르고있었구나. 그러니 어제 저녁일은… 괜한 오해였어.)

그런 생각으로 하여 마음은 더욱 뒤숭숭해진다.

《여기 온지는 열흘쯤 됐어요.》

《그런데 어째 전혀 알리지 않았소?》

《…》

《알릴 필요가 없었는지?》

《…》

말소리는 끊어지고 수화기에서는 숨소리만이 거칠게 들리는듯 하다.

《곧 돌아가는가요?》

그 물음에도 역시 딴 뜻이 깃들어있는듯 했다.

《아- 니요.》

당치않다는듯 새침한 대답이였다.

그러자 강기석은 저으기 활기에 넘쳐 명랑하게 말하는것이였다.

《난 무척 기다렸소. 아니, 이거 가까이에서 이렇게 전화로만 얘기 하겠소?》

《…》

《혜영동무, 일이 끝난 뒤에 만납시다. 9시부터 9시반사이에… 난 기다리겠소, 이전에 우리가 만나던 청년공원… 생각나오?》

어떻게 생각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혜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알았어요,》 혹은 《가겠어요.》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그들사이를 가리웠던 안개의 장막은 걷히고 봄이 태동하는 들판과 망울짓는 꽃들과 물기오른 나무가지들이 설레이는, 재생의 기쁨에 약동하는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질것이다.

하지만 송수화기를 꼭 잡은채 괴로움에 싸여 서있는 혜영은 대답이 없었다. 그 한마디속에 자기의 량심이, 자기의 지난날이 그리고 온 인격이 달려있는듯 하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절할수는 더욱 없었다.

《시간이 없어요. 오늘일을 다하지 못했어요.》

그것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마음만 있다면 일을 앞당기고 시간을 미루면서라도 만날수 있었던것이다. 그저 그 말을 할수 없었을뿐이지.…

《시간은 나도 바쁜 사람이요. 그럼… 몇시에 일이 끝나오?

내가 정문에서 기다럴테니.》

《…》

까닭모르게 북받쳐오르는 설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혜영동무, 혜영동무…》

안타까이 부르는 소리에 가슴이 터질듯 했다.

말없이 송수화기를 걸어놓고 방을 나섰다.

전화의 종소리는 그를 뒤따라오며 요란하게 울렸으나 혜영은 쫓기듯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달음쳐갔다.

방안에 들어서고보니 사람들이 있었다. 혜영은 한순간 오지 않을 곳에 잘못 온듯 멍청하니 서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있은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던들 그 녀자는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고야말았을것이다. 책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혹은 펜으로 몇자씩 적기도 했으나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심장은 아프게 조여들건만 머리속은 텅 비여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는것도, 누군가 방안으로 드나드는것도 전혀 모르고있었다.

《혜영동무, 돌아가지 않을래?》

원옥희가 하는 말도 귀가로 스치고 지나갔을뿐이다.

《아직 할일이 많아?》

원옥희는 꼿꼿하게 앉아있는 혜영이의 어깨너머로 책상우를 기웃이 넘겨다보며 물었다. 이쪽은 무심히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소스라쳐 일어섰다.

《아니, 벌써 이렇게?》

어둠이 드리운 창문을 쳐다보고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혜영동무, 내가 도와줄게 없어요?》

옥희의 물음에 어째서인지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현장으로 종종걸음쳤다. 허나 곧 측정기구를 가져오지 않은것을 상기하자 돌따섰다.

이전페지차례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