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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사랑의 기슭


6


혜영은 사흘전에 도착했었다.

여기 구단광연구실에서 새로운 구단광의 연구시험사업이 성과적으로 진행되는것과 관련하여 도와주기도 할 겸 배우기 위해서 온것이였다.

연구소에서는 같은 분야인 북부금속연구소에 사람을 파견할 일이 생기자 바쁜 과제도 없고 그곳에 집이 있는 혜영이를 지명했던것이다.

혜영이 어머니는 벌써 작년에 휴가왔을 때부터 딸 시집보낼 걱정을 앞세웠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유순한 성미에 밖에 나다니는 일도 적었지만 은근히 사위감을 물색도 하고 당부도 했었다.

아버지도 걱정은 하고있었지만 그런 일에는 손을 쓸줄 모르는 성미였다.

《제노릇을 할수 있는 젊은이면 돼!》 하는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였으나 그것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르고있었다.

다른 많은 부모들처럼 딸의 신랑감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아볼수 있다고 장담하면서도 정작 그 일에 손을 댄적은 없었다. 일이 바쁜것도 사실이였지만 성미가 워낙 그랬던것이다.

한편 혼기에 이른 젊은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혜영이도 자기 안목, 자기 척도로써 배우자를 물색하였고 그럴만한 대상자를 선택했던것이다.

(하긴 자기자신의 안목이나 척도가 없는때문인지 아니면 부모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크고 두터운때문인지 갓쓰고 하늘소타고 다니던 시대의 우리의 고조, 증조할아버지, 할머니들처럼 부모들이 정해준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천생의 배필로 인연을 맺는 축들도 있긴 하지만…)

혜영은 행복한 희망을 품고 이번 길을 떠나왔었다.

집에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그를 반겨맞아주었다.

구단광연구실에는 기계공학연구소의 박성국이라는 연구사도 며칠전부터 와있었는데 혜영은 이미 그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곳에서 벌려온 연구시험사업은 경과가 퍽 좋았다. 기초실험에서 성과를 거둔 그들은 중간공장의 시험로에서도 련일 좋은 실적을 올리고있었다.

과학원에서 파견되여온 지형민부원장이 그들의 사업을 지도하고있었다.

연구사들도 줄곧 중간공장에 나가 일했다. 성구공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로에 장입하고 조업하는 전과정을 로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관찰하고 연구하는것이였다.

온 집단이 흥분된 분위기에서 일하고있었다.

박성국이도 사뭇 만족이였다. 야금과 관련되는 설비와 장치들에 관심을 가지고있는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고있는 새 구단광에 대한 연구실험이 잘되여간다는 소식을 듣고 과제를 설정하려고 찾아온터였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그는 서부지구금속연구소에 자주 다녔었다.

박성국은 거기서 자기가 설정한 과제를 훌륭하게 완성했으나 ㅈ강에 대한 연구사업이 공업적인 단계에서 난관에 부닥쳐 전망이 료원해졌으므로 아쉬운대로 손을 떼고말았던것이다.

혜영이와도 거기서 알게 되였었다.

연구소의 《신입생》인 혜영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길쑴한 얼굴에 탐색하는듯 눈길이 예리한 이 박식한 연구사를 존경했으며 젊은 나이에 일찌기 상처한 그의 처지를 못내 동정했었다.

이곳에 와서도 함께 중간공장을 돌아보았으며 새 구단광-ㄱ철의 형성원리와 환원행정에 대하여 기계공학전문가인 그에게서 오히려 배우는 형편이였다.

박성국은 옷차림이 단정했고 깨끗한 와이샤쯔에 엇비듬히 흰줄무늬가 간 산뜻한 넥타이를 길게 매고다녔다.

그 빈틈없는 차림새에는 그의 성미와 더불어 남들에게 홀아비로 축잡혀보이지 않으려는 은근한 자존심이 나타나있는듯 했다.

혜영이와 함께 중간공장을 돌아볼 때만은 그우에 작업복상의를 걸치고다녔다.

《헤영동무, 우린 참 좋은 때에 좋은 일 하는 곳에 왔소. 이건 참 해볼만 한 일이요.》

박성국은 흥분하여 말하는것이였다.

《난 여기서 의의있는 과제를 설정할것 같소. 혜영동무도 함께 일하느라면 훌륭한 야금연구사로 자라날거요.》

《제가 언제 그렇게 돼요?》

혜영은 웃었으나 박성국은 언제나처럼 심중했다.

《꼭 그렇게 되오. 지금 하고있는 연구사업이 완성되자면 적어도 5~6년 아니, 10년쯤은 걸릴거요.

그만한 기간이면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전문가가 될수 있소.》

《그렇게 오래 걸릴가요?》

《그쯤해도 빠른셈이지. 자그마한 기계 하나를 연구하재도 몇년은 쉽게 지나가는데 이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거던. 우리 나라 야금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방대한 사업이란 말이요.》

《그럼 성국동진 이 사업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일할 작정인가요?》

《과제가 설정되기만 하면 몇년이 아니라 몇십년이라도.》

태연한 대답에 혜영은 아연해졌다.

《그럼 어린애는 어떻게 해요. 다섯살짜리 아이가 있다면서요? 그리고 생활은…》

《생활걱정을 다하다간 아무 일도 못 치오. 과학자는 과학을 위해 모든걸 바쳐야 하오. 고대희랍의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는 1년반이나 포위된 시라쿠스성에서 로마인들을 쳐부실 기계들을 수많이 연구해냈는데 도시가 함락된줄도 모르고 발명에만 열중해있었소. 나중에 적병들이 달려들어 땅바닥에 그려놓은 기계의 도면을 짓밟았을 때에야 깨달았지만 결국 원쑤들의 창에 찔려 죽었소. 뉴톤은 85세까지의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 그쯤 돼야 명예도 빛나는거지.》

혜영은 어쩔수 없다는듯 웃었다.

그가 례증한 력사적인 인물들은 세속적인 관념을 초월한 과학의 명인들이지만 자기는 일신상의 문제에 등한할수 없는 평범한 녀성인것이다.…

그리하여 혜영은 등한할수 없는 일들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충동에 따라 강기석에게 전화를 걸었던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기쁨, 그 흥분된 심정의 진동은 두줄기 전화선을 타고 혜영이의 가슴에 울려왔던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였다.

몇시간후의 뜻깊은 상봉을 앞두고 기분은 걷잡을수없이 들뜨는것이였다.

혜영에게는 아직 바쁜 일이 없었다.

여덟시가 지나서 보던 자료들을 천천히 거두었다. 함께 일하는 녀동무에게 그것을 돌려주면서 긴하지 않은 이야기를 몇마디 나누다가 가방을 들고나섰다.

퇴근무렵이여서 도로에는 행인들이 많았다. 시간은 넉넉했다, 걸어서 갈수도 있었으나 전차를 타기로 했다.

조금 늦어진다 해도 그는 얼마든지 기다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강기석의 성품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짐작이였다.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혜영은 결코 그의 사람됨을 잘 안다고 확신하지 못했을것이고 이렇게 만나러 가지도 않을것이였다.

서둘지 않고 바빠하는 사람들에게 타기를 양보했다.

행복의 예감으로 가슴이 설레고 심신에 여유가 생기는 환경이면 사람은 너그러워지는것이다.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던 손님들은 아름다운 처녀를 돌아보군 했으나 혜영은 고즈넉한 미소를 짓고 방심한듯 서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은근히 강기석이를 생각했다.

처음 렬차에서 만나던 일이며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연구소까지 함께 가주던 일…

혜영이를 그러루하게 도와준 청년들은 이전에도 많았었다. 때와 경우는 각이했지만 그렇게 베풀어지는 친절에서 처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호감을 나타냈거나 하다못해 유쾌한 이야기라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청년은 그러지 않았을뿐더러 이름조차 물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후에 제강소구내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런 연고로 하여 더욱 반가왔었다.

그뒤 기사장으로부터 그가 재능있는 기사이며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가 의의있는 기술혁신안을 완성하고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호감과 더불어 못내 호기심을 품었던것이다.

성실하고 너그러운 젊은이에게 재능까지 안받침되여있는 례는 드문 일이다.

혜영이의 많지 않은 경험에서도 재능있다는 젊은 축들은 대체로 편협하거나 고집스러웠으며 원만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삐여지는 재간이 없기십상이였다.…

가까이 사귀면서 더욱 강기석에게 마음이 끌리였고 믿음을 느꼈다. 평범한 말에도 깊은 생각이 박혀있었고 로동속에서 성장하면서 큰뜻을 키워오는 사람됨이 헤아려졌다.

처음 자기를 대하던 때처럼 덤덤하게 아니, 어찌보면 자기와 함께 다니는것이 내키지 않는듯 정중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하다.

《별난 동무야.》

전차에서 내려 광장을 가로질러 청년공원쪽으로 걸어갔다.

바다를 향해 멀리 뻗어간 공원의 일경이 어둠속에서 보인다.

거리의 소음이 이곳에선 희미하게 들린다.

포석으로 다져진 넓지 않은 길을 따라 어린애의 손을 잡은 늙은이가 가고있다. 그들을 앞지르며 청년들이 성급하게 지나친다.

길가에는 잎이 돋아나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섰다. 어둠속에 서있는 그 나무들도 바람없이 푸근한 이 봄날저녁에 누구인가를 말없이 기다리는상싶다.

공원입구의 분수터.

사이 뜨게 놓여있는 긴의자들에서는 젊은이들이 쌍쌍이 속삭이고있다.

혜영은 먼발치로 그 주변을 천천히 걸어갔다. 마치 이곳에 우연히 들렸던것처럼, 총각들과의 속삭임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는듯이 살피지도 않고 멈추어서는 일도 없이 에돌아서 걸어갔다.

한바퀴 돌고나서 외등의 먼빛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가까스로 여겨보니 아홉시 오분을 조금 더 지났다. 어둠속에서 누가 자기를 살펴보고있는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해졌다.

평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사태에 대한 분별있는 추리와 판단이 이런 경우엔 전혀 불가능하다. 처녀의 자존심, 거기에 직감과 반응이 작용할뿐이다.

그래도…

혜영은 애써 흥분을 눅잦히였다.

급한 일이 있었을수도 있고 혹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마음을 달래며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 그 주변을 다시 돌아보려고 반대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비록 그 녀자의 거동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강기석은 원료장공사터에 나가 박동길이네가 해놓은 일을 확인하고나서야 제관장으로 향했다.

혜영이와 약속한 아흡시는 벌써 지났지만 초조감은 오히려 뒤로 밀려간듯 하다.

박동길이 제멋대로 하는 작업을 제때에 바로잡아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하여 마음이 무거웠던것이다.

제관품을 수정한데서 큰 무리는 없을것이였지만 설계대로 되지 않은 결과를 두고도, 허영심에 들떠 얼렁뚱땅 일하는 동길이를 두고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로동속에서 맺어진 박운보아바이와의 의리를 보아서도 그러했지만 겉으로나마 형님형님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동길이였기에 더욱 진실하고 굳건하게 이끌어주고싶었던것이다.

제관장에 와보니 밤교대에 나온 기능공들이 제관품을 수정할 경우를 놓고 방도를 토론하고있었다.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제품이여서 류출구의 방향만 돌려놓으면 될것이였다.

공정을 토론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락착이 되였으니 우리는 일을 시작하겠네. 강동무는 돌아가보게.》

덤덤히 서있던 박운보가 그렇게 말했다. 기석은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청년공원은 제강소후문에서 멀지 않은 공지 저쪽에서 시작된다.

어수선한 생각에 싸여 바쁘게 달려갔으나 공원입구의 분수터곁에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열서넛에 나는 소년을 이끌고 돌아가는 로인을 지나쳐가자 긴의자에 앉아있는 쌍쌍의 젊은이들이 눈에 띄였다.

행길쪽으로 난 포석도로를 다시 바라보았으나 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화강석으로 나지막하게 테를 두른 놀이터주변을 두바퀴나 돌아보고서야 어째선지 오늘 저녁에는 분수가 뿜어오르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나무가지들사이를 불어지나는 밤바람이 쌀랑했다. 놀이터복판에 서있는 어린이들의 군상에는 푸르스름한 외등빛이 어려있다. 분수가 사방에서 뿜어오르고 대돌아래로 물이 고여 찰랑거리던 때엔 즐겁고 명랑한 분위기를 이루어주던 군상도 지금은 쓸쓸해보였고 벌거벗은 아이들은 추위에 떨고있는상싶었다.

이 모든 정경은 한산한 기분과 더불어 괴로움을 자아내는것이였다.

긴의자에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이들을 다시 돌아본 그는 이곳에 홀로 서있는것이 창피해졌다.

그러자 처녀가 여기서 30분은 고사하고 단 5분도 기다리기 어려웠으리라는것,… 기다리는 그 1분1분이 그 녀자에게는 더없는 모욕으로 되였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기다리다가 돌아간 모양이군.)

그는 허전한 기분에 싸여 생각하면서 무거운 걸음을 지향없이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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