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11


박성국은 자기네 연구소에 돌아와 진행한 사업을 보고하고 새로 추진하고있는 과제에 대한 의견도 듣고 또 자료실에 들어박혀 참고문헌도 연구했다.

닷새동안을 그렇게 분망히 보내고나서 곧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딸애를 만나보러 갈 생각도 간절했으나 단념했다.

예열장치의 제작이 완공되기 전에 돌아가야 할 촉박한 사정도 있었지만 한번 만나보고 오는것으로써 겨우 마음을 붙이고 지낼 딸애의 생활에 동요를 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북대봉산줄기와 아호비령산줄기의 분수령을 굽이굽이 에돌며 계곡들을 벗어져나온 렬차는 동조선만에서 불어오는 바다바람을 엇비슷이 가르며 동해선에 잡아들었다.

눈앞이 확 트이고 차창밖으로 가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자부터 차안의 분위기도 흥성거렸다. 길손들은 짐속에서 먹을것, 마실것들을 꺼내놓고 서로 권하기도 하면서 활기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렬차가 분기역에서 차갈이를 할 때 박성국은 바람이라도 쏘이려고 내렸다. 구내의 매점들과 홈의 여기저기서는 철도상업일군들의 활동이 분주했다. 그는 번거로운 곳을 피해 역홈의 한쪽을 천천히 거닐며 역사 저편에 펼쳐진 시내의 전경을 관망했다.

이른봄의 대기는 쌀쌀했으나 차안의 답답한 공기에 지쳐버린 그에게는 마냥 상쾌했다. 생각없이 걸음을 옮겨놓다가 누가 부르는듯 하여 돌아보았다. 과자봉지와 사과꾸레미를 든 젊은 녀성이 웃고있었다.

반가운 해후였다. 어째서인지 그 녀자의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지나가면서도 영 못 알아보는군요!》

그 녀자는 흰이를 드러내며 싱긋이 웃었다. 알릴듯말듯 무늬간 곤청색양복차림이 날씬한 몸매와 웃고있는 아름다운 얼굴모습을 그리도 잘 드러내보이고있다.

《그새 잘있었소?》 하고 그는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 차칸에 가세요. 자리도 좋고 사람들도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사람들이란 저쪽켠 의자에 앉아있는 몸이 실팍한 50가까운 장년사나이와 그 건너편에 자리잡은 커다란 외투를 입은 체소한 로인이였다.

그들의 곁에는 새파란 양복에 주홍색넥타이를 맨 젊은 사람과 애기를 안은 녀인이 앉아서 장정과 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있었다.

대화는 이쪽켠에까지도 잘 들렸다. 다만 박성국이 자리잡은 의자에 앉은 출장원인듯 한 사람만이 입을 하- 벌리고 잠이 들어 만사에 무관심이다. 그 건너편에 앉은 로파는 이야기를 듣다가도 가끔 당반우를 쳐다보거나 의자밑을 살피면서 짐간수에 등한치 않다.

자리를 잡은 후 주변사람들을 두루 낯익히고나자 서로 소식들을 나누었다.

최혜영은 지낸 이야기를 대충 하고는 이렇게 가게 되는 사연을 서둘러 설명했다.

《우리 연구소에서도 모두 그쪽 일에 훨씬 관심이 높아졌어요. 이전날엔 우리도 무엇인가 해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유능한 연구사들은 모두 자기 하던것만 하고 나같은축들이나 다른데 보내군 했지요. 하지만 그동안 잘못된 일을 총화도 짓고 모두들 확고하게 ㄱ철에 달라불었어요. 연구소에서도 그 일을 중심에 놓고 유능한 연구사들을 저쪽에 보내기도 하고…

난 원래부터 가있었으니까 가라더군요.》

박성국은 리해할만 하다는듯 머리를 끄덕인다.

《저쪽일은 어떻게 되여가요? 지금 무얼 연구하세요?》

《저쪽일은 아직도 여전히 간고하오. 모두가 로조업에서의 개선방도를 탐구하지요. 예열장치의 도입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소.…》

박성국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지금 설비의 제작이 한창일거라고 덧붙였다.

《그럼 우린 가도 할일이 없겠군요.》

《할일이 많소. 예열장치의 도입에 과학성이 담보돼야 하고 기술지표들이 설정돼야 하오. 그리고 운영과정은 매 요소마다에서 분석되고 종합되여 결론이 주어져야 하고… 할일이 정말 많소.》

혜영은 안도감을 느끼며 또 물었다.

《원옥희언니랑 잘 있나요?》

혜영이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녀동무이기에 옥희에 대해 물은것이지만 박성국에게는 그 이름이 따뜻한 감명을 던졌다.

그 녀자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으나 떠오르지 않는다.

이쪽으로 떠나오는 날 역두에 나와 바래워주던 침착한 태도와 살틀한 심정만이 지금도 정겹게 느껴질뿐이다.

끝없이 뻗어간 두줄기 평행선처럼 사귀여질것 같지 않던 그들의 관계도 유클리드기하학의 절대성이 부정된것처럼 새로운 발견에 의해 전변을 가져오고 전혀 다른 측면으로 발전되게 되였다. 하지만 맺어진 그뿐으로 다른 구상은 없었다. 두사람 다 아직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리평이도 또한 권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차요적인 문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지금 하고있는 사업이 중요하며 그것이 완성된 뒤에야 개인적인 생활도 설계될것이다. 그전까지는 모든것이 그대로 있어야 하며 두사람의 관계도 굳이 밝히지 않을것이였다.

(참 좋은 동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두고오는 딸애와 더불어 한가닥 서글픈 정서가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자 자기자신이 불만스러워 얼굴을 흐린다.

《옥희언닌 여전히 바쁘겠지요? 》 하고 혜영은 거듭하여 묻는다.

《여전히 바쁘오.》

자기 생각에서 헤여나면서 박성국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무엇인가 그 녀자의 일을 더 묻고 더 말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심정이였다. 하지만 혜영은 원옥희에 대해 더는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박성국이 이전부터 그 녀자에 대해 호감을 품지 않았고 그들사이가 언제나 랭랭했던것을 상기했기때문이였다.…

기슭의 높고낮은 산봉우리들에 막히며 해빛부신 바다의 풍경은 뒤로 뒤로 밀려가고 다시 들판과 마을과 전주들이 차창밖으로 흘러온다. 그들은 려행의 인상을 나누며 옆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몸집이 실팍한 사나이는 면도자리가 퍼런 동그스름한 턱을 슬슬 문지르며 빙그레 웃고있다. 애기어머니와 청년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듣고있다.

결혼, 가정, 생활에 대한 일화이다. 어디서나 흔히 벌어지는 화제다.

《혼사란게 대체로 그러루하게 되는거지요.》

뚱뚱보는 세상물정에 달통한 사람의 느슨한 어조로 말깃을 단다.

《일은 바로 그렇게 되였수다.》 하고 로인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루는 내가 목재를 다듬고있는데 경영위원회에 있는 조카가 들렸습니다. 와서 하는 소리가 그 소리거던요. 출장가서 지내는 동안에 두루 이야기가 되다나니 거기 있는 사람의 외조카와 혼담이 벌어졌는데 총각이 괜찮더라는거요. 거기 일용품공장에서 일하는데 숙이와 혼사를 정하자는거요. 나두 딸가진 애비라 나이차가는게 걱정스럽던 때에 반갑더구만.

우리 애는 제 사촌오빠를 몹시 따르지만 정작 제 일생에 관한 일이고 보니 선뜻 대답은 없더란 말이요.… 그때까지 보아둔 총각도 없었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글쎄 총각네 집에서 어머니며 외삼촌이 한짐씩 들고 이고 들이닥치거던, 선을 보고 제판 약혼을 한다는거요. 이런 변이라구요! 모두들 총각이 괜찮다고들 쑥덕거리니 우리 애도 다르게는 고집을 부릴수 없는 형편이였다우. 약혼한 뒤에 시일을 오래 끌면 재미없다면서 결혼식도 엄벙덤벙 치렀수다.

우리 애는 인민학교 교원이였는데 늘 명랑한 성미에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니 아이들이 따르고 선생들두 좋아했다우. 그런데 덜컥 시집을 가고보니 모든것이 마음같이 되는가. 그곳 식료공장에서 통계원으로 일하는데 늘 사무실에 들어박혀 문서질만 해야 되니 마음싸지 않거던.

게다가 남편이란 사람이 외관은 미끈한데 속은 꼬장꼬장하고 좀 막힌 사람인게야. 노래두 즐기지 않지. 책은 석달가야 한장도 들여다보는 일 없구 메말라서 이야기할 재미두 없다는데, 글쎄 살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벌써부터 하소연이요.

저번에두 집에 와서 한 둬주일 지내다 갔소. 눈물만 짜는구려. 야단이지. 그러니 애빈들 어떻게 하오!》

《괜찮습니다. 이제 제대로 돼갑니다. 아들딸 낳고 살아가느라면 정이 들고 다 잘될겁니다.》

뚱뚱보는 사과 한알을 들고 손으로 문지르면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빙그레 웃는다.

박성국은 흥미없는듯 그쪽에서 얼굴을 돌려버렸다.

《괜찮다니 도대체 무엇이 괜찮단 말이요?》

눈을 번쩍이며 뚱뚱보의 태평스런 어조에 불만인듯 혼자소리로 내뱉는다.

《무지한 일이지.》

《생활엔 그런 일들이 흔히 있지요.》

혜영은 흥심없이 듣다가 시답지 않게 뇌였다.

《생활에 흔히 있다고 해서 다 괜찮은건 아니요. 그건 남녀의 사랑을 자연계에서의 암수의 결합처럼 보는, 인간의 존엄을 모독하는 저속한 속물근성이요.

그래, 그 두 젊은이의 인연이 맺어지게 된 요인은 무엇이요? 물론 사랑은 아니지. 친척들간에 벌렸다는 혼담은 요구의 한계에 불과한것이지 결정적인것으로는 되지 말아야거던. 한평생을 함께 살 반려를 선택하는것이니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여야지!

그들에게는 리상도 포부도 없고 정서도 취미도 없었단 말이요? 실혹 피상적이고 일면적이라 해도 아름다운것, 훌륭한것에 대한 공감과 동경, 자기 판단이 없었단 말이요? 물론 안목이 넓고 체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소개나 방조가 있을수도 있지. 하지만 어떤 경우에나 운명을 결합하는 당사자들의 리해와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름다운것이 못될뿐아니라 행복할수도 없소. 우리는 정신활동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인간들이며 행복이란 물질적욕구의 충족에만 있는것이 아니기때문이지요.》

혜영은 입가에 고즈넉한 미소를 띠우고 차창밖을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강기석이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우리 둘사이엔 그래도 리해와 공감이 있었지.)

그렇게 뇌이는 마음속에 한가닥 그늘이 비껴간다.

건너편에서는 애기가 울고 렬차원이 지나가면서 누구에겐가 대답한다.

《도착시간은 17시 38분이예요.》

뒤쪽 어디에선가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뚱뚱보는 반쪽이 남은 사과를 손에 든채 로인을 향해 웃고있었다.

《글쎄 다 제대루 돼갑니다. 지내보시라는데두요. 나도 젊었을적엔 련애결혼을 제창했수다만 별게 없습니다. 한창 련애할 때에는 어정거리는 걸음발까지도 다 고와보이고 마음에 들었는데 한해두해 살면서보니 늘어지고 게으르다구야. 방안을 제대루 거두나 음식을 제대루 만드나… 눈이 감기지요. 고쳐주려고 애도 썼지만 이젠 그만 시들해졌수다. 생활이란 그저 그런거지요. 그러니 아바이두 너무 걱정하지 마시우.》

애기를 달래던 녀인은 그의 말이 재미있어 상글상글 웃고 로인도 위안이 되는듯 빙그레 웃는다.

《젠-장, 어리석은 소리만 줴치는군.》 하고 이켠에선 박성국이 사뭇 흥분하여 중얼거리며 그쪽을 외면해버린다.

혜영은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렬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채 말이 없었다.

(그래, 정말 어리석은 소리야.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이란 상상할수 없어. 오히려 결혼하지 않는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는 처녀의 마음은 우수에 잠기는것이였다.

(난 그 동무 아니면 다른 어떤 남자도 사랑할수 없을거야.…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그 동무를 찾아간담? 무슨 체면에? 그래도 그 동무가 열렬하게 부른다면? 변함없이 사랑한다면? 그때엔 내 량심에 꺼리끼는 모든걸 털어놓아야 해. 그의 성격, 그의 운명에 두려움을 느꼈던 일도… 그걸 다 말하면… 그래도 나를 용서한다면… 아, 그러면 그때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번이 아니게 그를 괴롭힌 그러한 생각을 하노라니 가슴이 타들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하여 그 녀자는 모든것을 운명에 맡긴다는듯, 번민에 찬 머리를 의자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철장을 울리며 렬차가 쉬임없이 달리고 목적지가 차츰 가까와오는것도 괴로와졌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데두요.》

저켠에서 뚱뚱보가 흥겹게 말하는 소리.

《글쎄 일이 어떻게 될려는지 원…》

위로를 받으면서도 불안을 금치 못하는 로인의 중얼거림.

기차는 산굽이를 돌아가며 기적을 울렸다.

억척같은 힘을 자랑하는듯 한 고르롭고 경쾌한 긴 화음은 들판 멀리로 울리여간다.

갖가지 기대와 희망을 지닌 길손들을 태우고 끝모르게 뻗어간 두줄기 철길우를 달리고있었다.

농사차비에 분망한 협동벌을 지나고 풍어기 휘날리는 포구를 바라보며 종착역에로 달리고있다.

렬차가 달려가는 그곳에 마을과 도시들이 있었고 생활이 들끓는 제강소도 있었다.

이전페지차례다음페지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pinterest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naver로 보내기
kakaostory 로 보내기
flipboard로 보내기
band로 보내기
←되돌이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