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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8


얼어붙었던 대지를 따뜻한 미소로 녹이고 소생의 푸른빛을 점점이 수놓으며 봄이 다가오고있었다. 물기올라 생기를 띠여가는 초목들을 샘하듯 갈개는 바다바람이 왕모래를 휘뿌리며 불어쳤다.

하지만 태양이 가까와옴을 마음든든하게 느끼는 삼라만상은 서둘러 허울을 벗으며 활기를 띠여가고있다.

파도설레이는 바다는 한결 푸르러지고 해안으로 뻗어간 먼 산들에서도 단장에 늦어지는 제모습을 수집어하는양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여오른다.

봄빛은 거리와 공장구내에도 넘쳐흐른다.

처녀들은 무겁고 답답한 겨울차림을 벗어던지고 엷은 봄외투를 떨치고나섰다. 사나운 봄바람이 치장으로 둘러감은 알락달락한 머리수건을 흩날리며 옷깃으로 스며들건만 그런것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이들 나이엔 추위에 대한 위구보다도 자기 미모를 나타내고싶은 지향이 더 강한듯 하다.

작업장에선 비록 한나름으로 된 작업복차림에 기름때 얼룩진 장갑이며 눈덕밑까지 눌러쓴 안전모자 등으로 하여 가려보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작업장을 나서는 때면 차림새들이 갖가지로 야단스럽다.

그러기에 이 도시사람들은 《시내멋쟁이들은 모두 제강소 정문에서 쏟아져나온다.》고들 말하는것이다.

평량차운전공들인 백금순이와 윤명실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처녀들은 마치 춘삼월에 봄놀이라도 가는듯 한 즐거운 기분이였다. 일차림과 함께 점심도 한가방씩 싸들고 나타났다.

알락달락한 카프론머리수건에 백금순은 초록색봄외투까지 걸쳤다.

어제저녁에 그리도 흥성거리던 직장교양실은 조용했다. 남자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네들은 이런 일에서는 언제나 처녀들보다 굼뜨니까…

동무들사이에서 있었던 하치않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기다렸다.

아홉시가 훨씬 지나서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처녀들의 기분은 차츰 흐리여졌다. 장인숙은 나가보고 오더니 뜨아한 표정이다.

《벌써 간 모양이야.》

《5호로에도 가봤니?》

장인숙은 머리를 끄덕인다. 오목눈이 백금순은 눈살이 꼿꼿해진다.

《흥, 별나다야. 무슨 사람이 그렇니.》

둥그스름한 얼굴에 몸이 실팍한 윤명실이만은 아무말없이 잠자코있다.

어제저녁 조직할 때에는 여기에 모여서 같이 가기로 했던것이다.

《그럼 우린 가지 말자. 장소도 똑똑히 모르는데 어디 가 헤매겠니?》 하고 백금순은 못마땅한 소리로 옹알거린다.

《직장에서 조직한 일인데 안 가면 되니?》

《그럼 직장장동지한테 말하자꾸나. 어떻게 하라는가고?》

직장장도 장소를 모를건 뻔한 일이다. 공연히 처녀들이 끼이면 복잡해진다고 탓할지도 모르며 그보다 박동길이 후에 무슨 말을 들을수도 있다.

(공연히 비판받게 해서는 안돼.) 하고 장인숙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전에는 박동길이 엉뚱하게만 노는것이 재미있었다뿐이지만 오작사고에 대한 실토와 그뒤 겨울동안의 지원작업에서 열성스레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동과 더불어 남다른 호감을 품어오는터였다.

《애들아, 그럴것 있니. 우리끼리 가자. 장소는 내가 알아.》

백금순은 뾰로통해져서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인숙이를 쳐다본다.

《무슨 원천을 탐구한다고, 흥, 고생이나 실컷 하지 않나 보지!》

《일없다, 가보자.》

수더분한 윤명실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 가방을 들고 나섰다.

장인숙은 유쾌하게 지껄이며 가운데 서서 걷고있었으나 마음은 불안했다. 장소가 어디인지 알지도 못했거니와 들은 일도 없다. 다만 회의때 기사장의 물음에 창평쪽으로 가서 사구마을이라고 대답하던 박동길의 말을 기억하고있을뿐이다. 거기에 좀 보탬이 되는것은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새질》에 된벼락을 내리면서 이웃간의 의까지 상하게 해서 박운보형님도 집에서 정양하지 않고 사구에 있는 딸네 집에 가있다고 말하던 일이였다.

(사구마을에 가서 제강소에 다니는 박운보아바이 딸네 집을 찾으면 될거야.)

작년 여름에 박동길이 직장을 떠나 농촌에 가서 얼마간 있다온 일도 생각났다.

(모래원천이라는것도 아마 그때 돌아다니면서 보았던게지.)

그래 그는 동무들을 데리고 창평쪽으로 가는 시외뻐스정류소로 향한것이다.

이 시각에 박동길은 5호로의 용해공인 고봉준이와 함께 사구마을로 통한 농촌길을 걸어가고있었다.

날씨는 청명하고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지나는 들판에서는 뜨락또르의 발동소리가 퉁퉁퉁 경쾌하게 들려왔다.

빈 배낭을 댕그랗게 등에 진 그들은 발걸음도 가볍게 말없이 걸었다.

박동길은 이제 마을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두루 생각하느라고 말이 없었고 고봉준은 움돋는 가로수며 개가의 푸르러지는 기슭을 두루 돌아보면서 말이 없었다.

작년에 용해공으로 입직하여 한해가 지나는 사이에 키가 훤칠 자라고 어깨까지 벌어지기 시작하는 고봉준은 워낙 말이 없는 청년이였다. 얼굴도 잘생기고 일에서도 근면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터인데 한가지 결점은 말을 조금씩 더듬는것이였다.

그 버릇을 고치라고 동무들이 충고도 하고 경험있는 사람들이 이러저러하게 방도도 대여주군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씨무룩이 웃을뿐이다. 귀담아들었는지 고치려고 작정을 하는지 그 속은 누구도 알수 없었다.

어쩌다 마음이 내키는 때면 말도 꽤 하군 하지만 신이 나서 떠들거나 들은 말을 옮기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동길이도 동행자로서 그를 선정했던것이다.

사구마을과 관련해서는 여러가지로 석연치 않은 사연들이 있었으므로 이곳으로 이렇게 찾아오려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회의의 앙양된 분위기와 자기도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열망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제기를 하게끔 추동했던것이다.

하지만 정작 처녀들까지 따라나서려고드니 언짢았다. 장인숙이 극성을 부리는것이 더욱 싫었다.

조직하는 사업을 그냥 반대할수도 없어 아침에 모여서 떠나자고 우물우물해놓고는 고봉준을 데리고 한발 먼저 떠난것이다. 마을에 가면 개바닥에서 한배낭, 모래산에 가서 한배낭, 모래 한짐씩 퍼담는것이야 품이 들것도 없지.

그 자리에서 돌아설수도 있지만 모처럼 왔던 길에 난처한대로 아버지의 문병도 해야 한다. 어머니의 당부도 있으니…

누님이 점심은 한상 잘 차려줄터이니 얻어먹고 와버리면 그만이지…

그래 그는 점심을 싸지 않았을뿐더러 고봉준이보고도 빈 배낭만 가지고 나오라고 했던것이다.…

박동길의 그러루한 속타산은 마을근처에서 뜨락또르를 몰고오는 낯익은 운전수를 만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에 누님네 집에 와있을적에 낯을 익힌 운전수였다.

동길이또래의 젊은 친구인데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도와주는 박동길에게 자기네 농장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던것이다.

지금 거름을 싣고 들판으로 나가던 그는 동길이를 알아보자 뜨락또르를 멈춰세웠다.

운전칸문을 열어젖히고 퉁퉁거리는 소음을 누르면서 큰소리로 반긴다.

《여어, 제강소 로동계급이 어떻게 이렇게?》

그들은 유쾌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또 지원하러 오나?》

박동길은 씨무룩이 웃으면서 사연을 짤막히 이야기했다.

이 고장의 산성많은 토질에 대해서는 바로 그에게서 들었던만큼 운전수도 이 일에 노상 관련이 없는것이 아니다.

《되기만 하면 괜찮은데. 여기까지 철길도 들어올수 있고… 우리 고장이 더 번화해지겠군.》

이것저것 타산해보는듯 주변일경을 휘둘러본다.

《이건 아직 두고봐야 알 일이지.》

박동길은 당장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질것처럼 기대하는 그의 생각을 눅잦혀주려는듯 말머리를 돌렸다.

《글쎄 그건 그렇다치고…》

운전수는 리해할수 있다는듯 화제를 잇는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서 겨우 배낭을 지고왔는가?》

《분석시료가 필요한거니까.》

《시료는 시료고 내쳤던김에 아예 뜨락또르에 실어다 써보면 어때? 그러지 않아도 요즘 시내에 농약실으러 나갈 일이 있는데 나가는 길에 실어가면 좋지 뭐.》

박동길은 귀가 솔깃해졌다.

《실어다주기만 하면야 좋구말구.》

《제강소 로동계급이 해마다 우리를 지원해주는데 그만한 일이야 못해주겠나. 품을 놓아서라도 해줄 일인데… 반장만 승낙하면 당장 오후에라도 나갈수 있네.… 저기 작업실에 있을거야. 참 반장은 박동무 매부지?》

뜨락또르는 신나게 덜컹거리면서 들판으로 나가고 박동길은 탈곡장곁에 덩실하니 앉아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부엌에 여물가마가 걸려있는 넓다란 작업실로부터는 더운기가 후끈 쓸어나왔다.

늙은이들과 아낙네들이 물이 떨어지는 나무통을 들어옮기며 일하고있었다.

작업반장은 두팔을 걷어붙이고 소독용액으로 세척한 벼종자를 퍼내면서 열려진 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헹- 가을부터 기다리던 사람이 이런 때에 나타났군.》

허리를 펴지 않고 일을 계속하면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낙네 하나가 곁따라 내다보더니 《아이구, 작년에 왔던 제강소아저씨구만.》 하고 반색을 한다.

그러자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인사들을 건넨다.

《반장아저씨, 처남이 왔는데 나가보우.》

《아따, 반장이 아니면 일이 안될가봐 저러나.》

황기풍은 흉글흉글 웃을뿐 일손을 놓지 않았다.

박동길이 고봉준이와 함께 써레며 기계보습들이 정비되여있는 기계간들을 돌아보고났을 때에야 매부는 물묻은 손을 씻고 담배를 붙여물면서 퇴마루에 나섰다.

《왜 집엔 올라가지 않구 여기서 어정거리니?》

《할말이 있어요.》

《할말은 집에 가서 하지 뭐… 먼저 올라가라구. 내 이제 곧 올라갈테니.》

《글쎄 얘기를 하고가겠소.》

《이것 보래.》

황기풍은 저쯤에 서있는 고봉준을 보고 웃었다. 할수 없다는듯 작업실안을 향해 돌아섰다.

《용기들이 나면 소독을 잘해서 놓소. 기술지도원이 오면 또 징징거릴텐데.》

그리고는 소매를 바로잡으며 뜰에 내려섰다.

박동길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더니 《뜨락또르라…시내에 나갈 일이 있긴 한데.》 하고 중얼거린다.

《운전수동무를 만났댔어요. 반장만 허락한다면 오후에라도 나갈수 있대요.》

《그래? 그렇다면 할수 있지.》

선뜻 말하는것으로 보아 아침에 조직했던 작업계획을 변경시키기를 주저했던 모양이다.

《너를 보아서 그러는게 아니고… 제강소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있다는걸 알고있기에 하는 소리다. 아버님은 우리한테 와계시는 동안에도 늘 그 말씀이다.》

잠시 생각하고나서 덧붙였다.

《제강소를 돕는 일인데… 한대가 아니라 두대를 보내겠다.》

《있어요? 그렇게.》

《힝- 우린 뭐 앉아뭉개는줄 아니? 지난 가을에 뜨락또르 한대를 더 받았다. 참 네가 아는 그 금선이도 인젠 책임운전수다.》

《전금선이…》

회상과 더불어 어쩔수 없는 호기심이 박동길의 얼굴에 어려온다.

《전금선이 아니라 최금선이다. 금년가을엔 잔치를 차려줄란다. 칠성이하고… 우리 작업반에 처음 생기는 부부뜨락또르운전수들이다. 좋은 배필이지.》

《좋은 배필이군요.》

흥심없이 뇌이고는 집안형편을 묻는다.

《아버지건강은 어때요?》

《괜찮다. 발을 쓰기가 이전같지 못해서 그러지 두루 다니기도 한다.》

《언제쯤 돌아가시겠대요?》

《가긴 어딜 가! 여기가 좋은데. 제관일을 조금씩 해주면서 과수원에서 원두막도 보아주고 강에 나가 낚시질도 하고… 그만큼 일했으면 인젠 좀 쉬여야지.》

말하면서도 탈곡장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품이 일에 마음을 쓰는 사람의 체모가 그대로 나타난다.

《너까지 장가보내면 어머니도 모셔올란다. 와서 아이들이나 돌보아주면서 여기서 지내는게 아마 편할거다. 네 누이도 그 소리구.》

생각지도 않았던 이러한 말들에 박동길은 기분이 상했다.

마을길을 걸어올라오니 집에는 조카 하나가 놀고있을뿐이다. 말소리를 듣고 사이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가 비뚜름하게 내려다본다.

《무슨 일루 왔느냐?》

그를 대신해서 매부가 온 사연을 말했다. 령감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놀러온것이 아니고 일때문에 왔음을 루루이 설파하면서 뜨락또르를 보내기로 한 사연까지 알렸다.

그동안에 박동길은 어머니가 싸보내던 《회령술》두병을 꺼내 방구석에 밀어놓았다.

박운보는 문턱너머로 피꿋 넘겨다보았을뿐 거기에는 그닥 관심치 않고 사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뿐이다. 다 듣고나서는 어째서인지 고봉준이쪽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리고는 담배를 붙여물고 눈길을 내려깔더니 말이 없다.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고 더는 한마디 묻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송구해하던 고봉준은 얼굴이 벌개져서 꿰여진 양말짝밑으로 드러난 발바닥만 끔벅끔벅 굽어보고있었다. 일하러 온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차리고 나섰던걸 후회하는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여가는데 누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앉아있기가 따분해진 박동길은 고봉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뒤산에 올라가 이 일대의 산천구경이라도 시키려는것이였다. 물오른 싸리나무와 진달래가 망울진 관목숲사이로 난 등성이길을 오르면서 물었다.

《이 고장엔 처음이지?》

《주… 중학교때 모내기하러 왔댔어요. 저… 저쪽 산너머 2작업반에.》

고봉준의 대답을 듣고나자 더는 아무런 설명도 할 필요가 없어진듯 했다. 그래 그는 방금전의 따분하던 일을 변명이라도 하듯 웅얼거렸다.

《우리 아버진 고집불통이야.》

《매부는 사-사람이 좋더군요.》

《호인이지.》

《이제 뜨락또르 두대를 모-올고 들어가면 직장에서 깜짝 놀라겠지요?》

《뭘 그까짓걸 가지고.》

대수롭지 않게 말은 했으나 돌아가서 보고할 일을 생각하면 사뭇 흥겨워지는것이였다.

집에서는 그들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박운보가 사이문 저쪽에서 사위를 불렀다.

《이 사람, 자네 그래 뜨락또르를 정말루 보낼 차분가?》

《정말이지 않구요!》

《자넨 사람이 호박같이 지내 무른게 탈이야.》

《왜요. 아무래도 나갈 일인데 제강소일을 도와주면 좋지요. 동길이가 맡아하는건데.》

《그래 자넨 그 허풍선이녀석의 말을 믿나?》

터무니없는듯 탄하는 말에 황기풍은 어리둥절해졌다.

《자넨 글쎄 농사만 했으니 알도리가 없겠지만 나야 제강소에서 늙은 사람이 아닌가. 로에 모래를 쓸어넣어 쇠를 구워낸다는게 있을법이나 한 소린가. 당치도 않은 소리…》

로인은 기가 막힌듯 끌끌 혀를 찬다.

《그래도 새로 무얼 실험이랑 해본다던데요.》

《실험?》

박운보는 기가 막힌듯 흠흠거린다.

《모래를 쓸어넣다니! 흥, 설사 모래를 쓴다 해두 바다가나 수남천기슭에 쌔구버린게 모랜데 무엇하러 여기까지 찾아오겠나.

별게 없다니… 이건 저녀석이 모래를 뜨락또르에 실어서 다른데로 가져가자는거야. 누구하고 무슨 꿍꿍이를 했는지 알수가 없지. 허랑방탕하고 실속없는 녀석이니까.

내 아까는 옆에 다른 젊은이도 있고 해서 참았네.… 사람되기는 그른 녀석이야.》

로인은 흥분하여 숨을 거칠게 쉬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몬다. 그리고나서는 준절하게 타일렀다.

《싹 걷어치우라구. 자네 망신을 하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거던… 그 녀석은 제할대로 내버려두고 아예 참견하지 맡게. 뜨락또르라니!》

작업반장은 혼란에 빠져 눈만 슴벅거릴뿐 대답이 없다. 곰곰히 되새겨보니 장인의 말이 그럴상싶다.

(모르면 과오를 범한다더니 이런걸 두고 하는 소린가?)

때여불인 장판바닥을 넋없이 들여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안해가 들어오자 점심차비를 시켰다. 처남이 동무까지 데리고 오래간만에 찾아온데다 두루 생각하는바가 있어 제가 나서 서둘렀다.

이윽고 동길이네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엔 벌려놓은 일들이 한창이였다. 뜨락에는 닭털이 푸시시 널려있고 부엌간에서는 김이 문문 서리여 문틈으로 타래쳐나갔다. 흥성한 분위기에 들뜬 조카놈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외삼촌, 외삼촌, 엄마가 떡쌀을 안쳤다.》

팔을 걷어붙이고 떡구유를 닦아내던 황기풍이 동길이를 뜨락 한쪽으로 끌고가며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일이 좀 꼬이는구나.》

기분이 좋아 싱글거리는 처남의 눈길을 피해 짚검불이 나딩구는 울바자어름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뜨락똘은 오늘 시내에 못 나갈것 같다. 아무래도 아침에 지시했던대로 퇴비를 밭에 내야겠다.》

《아니, 어떻게 돼서요?》

《글쎄 그렇게 됐구나. 시내에 나가자면 정비도 좀 해야겠구, 또 계획도 계획인만큼…》

《…》

뜨락또르를 믿고 왔던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고보니 분하기 짝이 없다. 리해가 되지 않는 매부의 구구한 설명이 동길이를 격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일을 어찌겠니, 후날에 다시 오든지… 좌우간 좀 쉬다가 떡이나 쳐서 먹고 가거라. 어머니한테도 좀 가져가고. 네 누이가 지금 서둘고있다.》

《내가 뭐 떡먹으러나 온줄 알아요?》

그의 얼굴은 소낙비를 앞둔 하늘처럼 흐려있었다. 어머니한테까지 가져간다고… 다른 동무들이 들었으면 꼴이 잘되겠다! (모래원천이요 뭐요 하더니만 누님네 집에 떡먹으러 갔댔구만.)

그렇게 생각할건 뻔하지.

짐짓 좋은 동기에서 시작한 일이 웃음거리로 되여버릴것을 생각하니 속에서 불이 일것만 같다.

《우린 가겠어요. 여기서 어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그가 뿌리치고나서는 바람에 고봉준이도 할수없이 따라섰다. 일껏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흐뭇해하던터에 이렇게 되고보니 싱겁기 그지없다. 매부도 누이도 따라내려오면서 만류했으나 보람이 없었다.

동생이 그렇게 가버린것이 마음에 걸려 안해는 남편더러 지청구였다.

《당신은 오늘따라 무슨 처사를 그렇게 해요. 안될 일이면 진작 안된다고 할거지.》

《글쎄 잘한다는노릇이 그렇게 됐소그려.》

《동무까지 데리고왔다가 오죽하면 그냥 가버리겠어요.》

《공연히 밸써서 그러지, 다 된 점심이야 왜 안 먹고 가!》

황기풍이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대접하려던 사람들은 가버렸으나 떡쌀은 시루속에서 익어번지며 뜸이 들어 푸시시하다. 퍼내서 치는수밖에 없다. 화풀이라도 하려는듯 웃옷을 벗어던지고 힝-힝- 떡메질을 했다.

한창 점심상을 차리고있는 판에 난데없이 보지 않던 처녀 셋이 나타났다.

《이 집이 작업반장아저씨네 댁인가요?》

황기풍은 얼굴의 땀을 문지르며 문밖에 나섰다.

《우린 제강소에서 왔어요. 박동길동무 오지 않았댔나요?》

제강소에서 왔다는 소리에 박운보가 웃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이- 아버님, 여기 와계시는군요. 안녕하세요?》

장인숙은 스스럼없이 인사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으음, 어떻게 이렇게… 어험! 어험!》

뜻하지 않았던 상면에 난감해져서 헛기침을 깇는다.

《어서 들어들 오지.》

세 처녀를 두루 돌아보면서 박운보는 그렇게 얼버무린다. 혼사를 두고 사이가 벌어졌던 연고가 마음에 켕겨서인지 장덕칠이네 딸을 대하기가 거북했던것이다.

《좌우간 방에 들어들가기요. 먼길을 왔는데.》

아주머니가 나와 손을 잡아이끌고 주인이 호기롭게 웃으며 청했다. 명실이는 수집은듯 눈길을 내려깔고 백금순은 동무의 눈치를 살폈다.

《잠간 들어갔다 가자꾸나.》

장인숙은 활기있게 속삭이며 앞장서 들어섰다.

아래방구석에 몰켜앉아서는 번거로운 점심차비를 눈치채고 주눅이 들어버렸다.

《동길동문 이제 오나요?》

《한데 대관절 무슨 일루 오셨소, 우리 마을에…》

웃옷을 대충 걸친 주인이 하도 허물없이 대하는 바람에 마음이 놓였다.

《우린 모래가지러 왔어요. 여기 어디에 산성이 높은 모래원천이 있다고 해서.》

장인숙은 짤막히 사유를 밝혔다.

《로에 모래를 쓸어넣어 쇠를 굽는다는건 도시 모를 소린데…》

밭은 지식에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주인이 넉장좋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장인숙은 그런 의문은 리해할수 있다는듯 생긋 웃고나서 설명했다.

《우리 제강소에서는 지금 야금의 새로운 방법을 시험하고있어요.》

회의때 들은 강기사의 말을 아는껏 섬겨댔다.

《규산질과 점토질, 혹은 아르미나성이 강한 용재를 써보는데 원가가 낮은걸 찾다나니 여기 모래도 그런 실험용으로 써보자는거예요.》

규산질이요 아르미나성이요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황기풍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기 힘으로써는 더 어찌할수 없음을 깨닫고 구원이라도 청하듯 사이문쪽을 바라보았으나 웃방에 주둔하고있는 제강소의 로병은 형세가 글렀음을 깨달았던지 참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모래원천이 있다는건 동길동무가 제기했어요. 직장에서 조직한 사업이예요.》

자기네가 여기로 온것이 어디까지나 사업때문이라는것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장인숙의 말은 협동농장 작업반장을 완전히 제압하고말았다.

웃방에서는 기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동길이 일이 안됐는걸… 어쩐다?》

걱정에 싸여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안해가 들어오면서 일깨운다.

《점도록 그렇게 앉아만 계시려우?》

상을 놓고 행주를 치기 시작하자 처녀들은 비실비실 일어섰다. 황기풍은 팔을 벌려 문을 막아서며 사람좋게 웃었다.

《허, 이런 법이 있소? 모처럼 오신분들인데 점심들을 하셔야지.》

《우린 일하러 가야 해요. 점심은 싸가지고 왔어요.》

《글쎄 앉아들 있으라구, 일이야 내가 도와주지 않으리. 귀한 손님들인데 자- 어서.》

떡그릇이 들어오고 고기국이 들어오는 바람에 처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외면들 했다.

《우리 농장살림도 괜찮다우. 제강소에선 부업선을 가지고 명태를 많이 잡아들인다지만 그대신 우리한텐 양어장이 있다우. 집집마다 닭을 치구 돼지를 기르는건 더 말할것도 없구.》

안주인은 그중 쉽게 말을 들음직해보이는 인숙의 손목을 끌어 상머리에 앉힌다. 사이문이 뻐꾹 열리고 아래방 동정에 내내 마음을 기울이던 제관공이 참견해나섰다.

《어서들 앉으라구. 어려워들 말구.》

엄하면서도 인정어린 그 말에 처녀들은 모두 다소곳해졌다.

아이놈은 좋아라고 누나들의 사이를 뛰여돌아가면서 수저를 쥐여준다.

웃방에는 다른 상을 차리고 가시아버지와 사위가 마주앉는다.

황기풍은 복새통에 버림받은듯 방구석에 서있던 《회령술》병모가지를 다정하게 잡아들었다, 한잔씩 붓고는 무슨 생각엔지 빙그레 웃고있다.

《아버님도 이젠 제강소에서 할일을 다한것 같수다.》

박운보는 붓는대로 한잔 더 들이킨다.

《나도 글쎄 화학을 정 모르는 축은 아니지요. 산성이요, 알카리성이요, 린이요, 질소요, 칼리움이요… 화학을 모르고서야 요새 농사를 짓나요. 온통 화학천진데…》

날개죽지 하나를 어적어적 뜯고나서 계속한다.

《하지만 규산질이 어떻소 뭐가 어떻소 하는 소리는 쇠통 모르겠거던요.》

박운보는 근엄한 표정을 지을뿐 응대가 없다. 가시아버지의 표정을 피꿋 살펴보고난 작업반장은 자기 말의 효력을 확인한듯 천천히 잇대인다.

《아버님도 이제 다시 제강소에 간대야 성쌓고 남은 돌처럼 남의 발길에 걸채이기나 할터인데… 요전날도 말씀드린것처럼 여기서 과수원이랑 두루 보아주면서 편히 지내시우. 늘그막 여생이란 심신이 편안해야지요.》

박운보는 술잔을 올려놓고 상머리에서 물러앉는다. 이쯤이면 초벌다짐을 받은셈으로 치부한 사위는 떡그릇을 마저 요정내고는 자리에서 움씰 일어섰다.

생각지 않았던 점심을 분에 넘치게 대접받은 처녀들은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들 있었다.

황기풍은 쭈그러진 회색모자를 머리에 올려놓고나서 투박하게 마디진 손으로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인사는 무슨 인사, 나하구 같이 내려들 가자구. 제강소 로동계급이 좋은 일을 하는데 우리도 할수 있는껏 도와야지. 앞으로도 도움될만한 일만 있으면 백사불구하고 해주겠다니.》

동생과 그의 동무의 점심때문에 걱정하는 안해는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나서며 한마디 던졌다.

《이제 올라오자면 말을 들을것 같소? 먹을 복도 성미같이 타고나는거요.》

그리고는 터벌터벌 마을길로 내려갔다.

그들이 뜨락또르를 준비시켜가지고 모래산으로 올라가는데 동길이와 고봉준이 내려오고있었다.

점심을 먹지 못해 꼬부라진 허리에 모래짐까지 무겁게 지고 싸우고난 사람들같이 뿌루퉁해 걸어오면서 뜨락또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황기풍은 차를 세우고 벙글거리는 얼굴을 운전칸문으로 내밀며 큰소리로 말했다.

《일이 좀 우습게 됐다만 타거라.》

박동길은 길가에 비켜서서 적재함우에서 웃고있는 처녀들을 바라보더니 지고있던 모래짐을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반시간쯤 지나서 모래실은 뜨락또르들이 떠날 차비를 다했을 때 매부가 동길이를 한켠으로 이끌었다.

가시어머니에게 전할 인사를 몇마디 해주고는 적재함우에서 동무들과 이야기하는 장인숙이를 가리키며 혼자소리처럼 뇌인다.

《뉘 집 딸인지 마음에 드는구나. 일 잘하고 활달하고 례절이 깍듯하거던…》

박동길은 픽- 코웃음치며 돌아서긴 했으나 매부의 말을 무시할수도 없었다.

다른건 그만두고라도 그네들이 아니였더면 뜨락또르는 고사하고 점심까지 굶을번 했으니까.

(일이 별나게 꼬이는군!) 하고 그는 장인숙이 꺼내주는 점심곽을 받지 않을수 없었던 조금전의 일을 상기하면서 속으로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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