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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운명의 갈림길


5


방은 아담했다.

담갈색바탕에 연두빛꽃무늬가 아롱진 도배지를 바른 벽에는 액자에 넣은 풍경화도 걸려있고 옷장도 훌륭한것이 놓여있었다.

쏘파용으로 된 침대우에 구김살없이 펴놓은 폭신한 모포밑으로는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듯 하얀 하불깃이 드러나있다. 창문곁의 묵직한 사기화분에서는 싱싱하게 자라는 란초에 철모르는 꽃이 한창 피여나고있었다.

원옥희가 가져다놓은 노란 늄주전자에서는 끓는 물이 김을 올리고 창문으로 늦겨울해빛이 포근하게 흘러들었다.

방안은 더없이 아늑했으나 방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워있는 박성국은 더없이 허전한 심정이였다.

여기는 그의 집이 아니였다. 멀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지금 유치원에서 밥을 먹으며 지내는 어린 딸이 아버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을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이처럼 허전한것은 그때문만이 아니였다.

실패를 두번이나 거듭하고나서 자기 능력에 대한 신심이 없어지는것이였다.

고열에 시달리는 동안엔 만사가 시들하고 갖은 의욕이 사라져버린듯 했으나 기력이 회복되여가자 지나간 일보다도 지금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되는것이였다.

자기 형편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여기서는 더 할 일이 없으니 연구소에 돌아가겠노라고 제기할 심산이였다.

점심무렵에 원옥희가 들렸다.

《동무들이 이런 때엔 사과가 좋다길래 제가 갔다왔어요. 병원에 들려 약도 타올겸. 좀 어떠세요?》

그 녀자는 머리수건과 외투를 벗어 옷걸개에 걸고 구럭에서 빨간 사과들을 꺼내 다반에 쌓아놓았다.

《체온계를 껴보세요. 열이 어떤지?》

《조금전에 재여봤는데 아주 정상입니다.》

《다행이군요.》

방싯이 웃으며 그렇게 말한 처녀는 곤로의 스위치를 끄고 뜨거운 물을 고뿌에 따라왔다.

《약을 드세요.》

《이젠 약이 질색입니다.》

《그래도 오늘까지 복용해야 한답니다.》

《필요없습니다. 이제 곧 일어나겠습니다.》

《괜히 조급해 마세요. 참, 열이 오를 때 보니 박동무도 성질이 급하더군요. 헛소릴치면서.》

《헛소릴합디까?》

《그럼요. 그것도 아주 똑똑히.》

《그래… 무슨 말을 합디까?》

《듣긴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무슨… 진동기가 튀였다고도 하고 또 누구더러 왜 빨리 오지 않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하고… 앓으면서도 일을 생각했던것 같아요.》

박성국은 허거픈 미소를 띠웠다.

마지막시험과 관련한 긴장한 흥분이 뇌리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원옥희가 나타나지 않은것을 이상하게 여기던터이므로 헛소리속에 평소의 생각이 튀여나간것이 쑥스러웠다.

《난 지금 부원장선생을 기다리고있습니다.》

혼수상태에서 한 실언을 무마해버리면서 불쑥 말했다.

《지금 몹시 바빠요. 로조작이 그냥 잘 안된답니다.》

《무엇이 걸렸습니까?》

《환원과정이 어려워요.》

《그러니 기계공학이 참견할 일은 못되는구만요.》

방심한듯 한 그의 말에서 원옥희는 그의 심정을 엿본듯 했다.

《전 전반과정을 모르겠어요.》

《어쨌든 내가 할 일은 더 없을겁니다.》

처녀는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놓으며 약을 권했다.

그의 말에 실망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박성국이 약을 먹는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은 녀자야.)하고 그는 처녀가 사라진 문쪽을 바라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오후엔 의사가 왔다간 뒤에 기사장이 들렸다.

《시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너무 락심하지 마시오.》

건강에 대해 걱정하고는 웃으며 위안했다.

《요즘 형편이 씨원치 못한 모양이더군요.》

《진통은 겪지만 나아지겠지. 하루이틀에 잘되는 일은 없으니까.》

한명택의 태도는 락관적이였다.

《로공정이 걸린다지요?》

《중요한건 로공정이요. 생산물의 질문제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

《경공업제품도 질을 높이자면 한두해로는 안되는데 이건 중공업에서도 제일 덩지 큰 야금공업이 아니요!

그것도 여태까지 전혀 해보지 않던 새로운 야금법이란 말이요. 쉽게 될 일이 아니지.》

박성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생각만 한게 아니라 그런 립장을 고집했고 그런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평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귀에 설게 들렸다.

이 사업에 참여한지 1년도 되지 않는 동안에 너무나도 많은것을 보았고 체험했던것이다. 그는 기사장의 말을 반박하지도 공감하지도 않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명택은 자기가 공연한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모두가 질을 높이겠다고 궐기한 분위기에 맞추어 빈말로나마 《해보자》, 《도와주겠다》, 《그 방안도 좋다》하고 적극성을 시위하며 돌아가던 자기가 이 연구사를 이전만큼 생각하고 속심을 그대로 내보인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당조직에서는 신념이 없는 경향을 비판하는데 후에라도 사상이 똑똑하지 않다는 말을 들을것 같은 불안을 느꼈던것이다. 그래 그는 적극적인 사상을 나타낼수 있는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로공정을 완화시키자면 원료예비처리를 잘해야 하는데… 우린 요즘 경화과정을 잘해보자는 구상을 익히고있소.》

《흥미있습니다.》

《시험소동무들 보고 적극적으로 완성하자고 말했는데 얼마후엔 실적이 나타날거요.》

처음 시험소 기사들이 제기했을 때엔 그 방법이 완성된다 해도 큰 의의가 없을것이라고 말까지 했던터이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방패처럼 내들었다.

그러면서 경화장때문에 다른 제철소들에도 다녀보고 금속공업부에도 제기하여 조속히 완성해야겠다고 결심을 피력하는것이였다.

그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있는데 또 한사람이 찾아왔다.

인사를 하며 들어서던 청년은 기사장이 있는것을 보더니 문가에 멈추어섰다.

박성국은 누군지 알수 없어 의아해졌다.

《어떻게 여길 다 왔나?》

기사장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청년은 어색한 미소를 띠우고 어물거렸다.

《몸이 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옆에서 듣고있던 한명택이 참견했다.

《문병을 다 오구. 괜찮군. 보수직장 기술준비원동무요.》

기사장은 소개하면서도 처남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박성국은 일어나앉으면서 올라오라고 권했으나 태호는 그냥 서있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한명택이 완화시켰다.

《박동무의 미거에 감동해서 제강소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관심이 크지요.》

박성국은 미소를 지었고 태호는 어색해서 얼굴을 붉혔다.

《난 병이 다 나았습니다.》하고 박성국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전… 좀 토론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명택은 못마땅한듯 태호를 쏘아봤으나 그쪽은 매부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질제고와 관계되는 문제인데 착상이라기보다 의견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겁니다.》

《무슨 씨먹지 않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앉혀놓고…》

《괜찮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박성국이 웃으며 권했다.

《전 전기를 절약하고 연료를 절약할데 대하여 두루 연구해보다가 한가지 문제를 착안했는데…》

안태호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상대방의 표정을 살폈다. 착안이라는 말을 해놓고보니 어색했던것이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박성국은 진지한 어조로 그의 의기를 북돋아주었다.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제 생각 같아서는 회전로페열을 리용하여 찬바람대신에 더운 바람을 쏴주거나 그 열을 원료장쪽으로 끌어가서 원료를 예열할수도 있을것 같았습니다.

저는 야금행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기때문에 용해공들과 토론해봤는데 그 동무들은 도입하는 과정이 까다로울수 있겠지만 도입만 하면 큰 작용을 할수 있다는겁니다. 찬밥만 먹던 사람이 하루 세끼 더운밥, 더운국을 먹는것과 같은 효과를 낼수 있다는거지요.

질도 높아지고 시간도 단축되고 로행정에서도 변화를 가져온다는겁니다.…》

《로행정도 모르는 사람이 로행정을 변혁할 방도를 연구했구만. 응, 하하하.》

기사장은 어처구니없다는듯 웃었다.

안태호는 얼굴이 뻘개져서 눈길둘바를 몰라했다.

박성국이도 빙그레 웃고있었다. 했으나 그는 청년이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되여서 변호하듯 한마디 했다.

《일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좋은 방도를 생각할수 있지요. 유명한 야금전문가들과 교수, 박사들이 20여년동안 연구해도 해결하지 못했던 염기성제강법을 완성한 시드니 토마스도 독학으로 화학을 공부하던 25살의 행정재판소 서기였지요.

뭐 먼 실례를 들것도 없이 대형성구기를 훌륭하게 완성한 강기석동무도 기계전문가는 아니거던요.》

《글쎄 나도 못한다는게 아니라 장하다는거요. 자, 그 원리를 자세히 설명해봐라.》

《원리는 아까 말한것이 다입니다.》

안태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인사를 남기고 가버렸다.

기분이 흐려진 박성국이를 보면서 한명택은 빙그레 웃었다.

《저 친구는 내 처남인데… 게으른 공상가요.》

《오, 그렇습니까?》

박성국은 안도감에 싸여 그렇게 뇌였다.

했으나 기사장이 돌아간 뒤에도 그 청년이 얼굴을 붉히던 모습을 상기하면서 침울하게 앉아있었다.

울적한 기분을 가시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에 가보고 필요하다면 다시 올수도 있지.)

머리를 두손으로 싸쥐고 오래동안 앉아있었다.

앓고나서 마음이 약해진탓인지 딸애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더욱 가슴에 파고드는것이였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박성국은 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나는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인기척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방안에 들어섰다.

《아이- 왜 불을 안 켜고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위치를 넣어 불을 켠것은 원옥희였다. 뒤따라 제강소지배인이 들어섰다.

《앓는다는데 어떻소?》

최병기는 비주름히 웃으며 그렇게 묻고는 서슴없이 방안으로 올라왔다.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였다.

박성국은 다 나았다고 대답하면서도 얼떠름해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원옥희는 그의 표정을 여겨보며 다정하게 웃고있었다. 지배인이 숙소를 몰라 안내하여왔던것이다.

지배인은 올방자를 틀고 방바닥에 앉았다.

《내 돌아온 이튿날부터 동무를 만나본다는게 겨우 오늘에야 틈을 냈소. 객지에 나와 오래동안 수고하는 사람들을 전혀 돌봐주지 못해서 안됐소. 지내 욕하지 마우.》하고 최병기는 소탈하게 말했다.

《지배인동지까지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몹시 바쁘실텐데…》

《바쁜것도 사실이지만 등한해서 못 왔지. 평성에서 강기석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동무가 어떤 생활을 남겨두고 여기 와서 일하는지도 알지 못했을거요.》

《기석동무가 제 말을 했습니까?》

《얘기를 한게 아니라 박동무의 딸애를 자기 부모님들한테 데리고가는걸 만났댔소.》

《전 전혀…》

《아, 나도 들었소.》

최병기는 그의 말을 막으면서 계속했다.

《부탁을 가지고갔는데 아이가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따라나서니까 떼여놓을수가 없어서 그렇게 작정했더군. 여기로는 데려올수 없는 형편이지… 좌우간 그 심정이 지극하오.》

지배인은 주머니에서 천천히 물주리를 꺼내고있었다.

원옥희는 처음 듣는 소식에 못내 감동되여 돌아가려던 생각도 잊어버렸다. 박성국의 사업이며 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품고있는 자기였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것이다.

자기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 해도 아이를 달래여 떼놓으려고나 했으리라-

그 녀자의 얼굴에는 사촌오빠에 대한 자랑이 환하게 어리여있었다.

누구보다도 깊은 생각에 잠긴것은 박성국이였다.

강기석이 출장떠날 때 딸애에게 보내는 기념품꾸레미를 부탁하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은하때문에 마음을 쓰는 자기를 위로하여 하던 말도 잊혀지지 않았다.

《…자라나고 철이 들면서 자기 아버지가 국가적으로 제기되는 중요한 사업에 몸바쳐 일하느라고 자기를 돌보지 못했다는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아이의 일생을 두고 귀중한 추억으로, 자랑으로 될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그저 쉽게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절절한 체험에서 우러나오고 그의 생활을 이끌어가는 뚜렷한 신조가 어리여있는 뜻깊은 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과학을 운운하며 살아온 자기가 한때의 실패에 기가 꺾이고 실망과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여 이 일에서 물러선다면 그 누가 자기를 참다운 과학자로 일러주며 참다운 시대적인 인간이라고 인정하겠는가!

자기를 위해서 마음을 써주고 생활상의 걱정거리와 건강에 이르기까지 념려하고 돌보아주는 잊을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겨운 보살핌속에서 자라나는 어린 은하는 후날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회상하겠는가.…

박성국은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있었다.

지배인은 숙식조건이며 연구사들의 생활형편을 알아보고 도와줄 방도를 두루 궁리하면서 건강관리에 대한 지론을 피력하다가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지배인이라는 직책은 긴 이야기를 허용하지 않소. 앞으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우리한테도 좀 찾아와주우. 어려워하지 말고… 그런 일루 나를 찾아와준다면 고맙겠소.》

허물없이 하는 말에 박성국은 감동했다.

지배인이 나간 뒤에 원옥희까지 가버리자 박성국은 자리에 앉아 장차 자기가 할 일들을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진행하려는 자기 사업에 대한 설계며 구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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