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 장

열 풍


13


합숙에 들어오니 태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기타를 타고있었다.

나직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그의 입가에서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방안에 들어선 기석이를 보더니 기타를 놓고 일어났다.

《오늘 저녁엔 놀아보자구. 맥주도 마시고… 좀 돌아다닐가?》

《잠을 자야지.》

《잠은 시간을 연장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취침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평면적으로가 아니라 립체적으로 자야 하네.》

《말이 까다로운데. 그럼 어디로 가자나?》

《사실은 우리 두사람이 초청을 받았다네.》

《모를 소리군!》

《내가 언제 허튼소리하던가?》

《하긴 그래. 무슨 초청인가?》

《우리 누님이 초청했다네. 한방에 있는 동무를 데리고 놀러 오라구.… 그동안 수고했는데 한상 차린다는거지.》

《괜찮군.》

《오늘 저녁엔 매부도 일찍 돌아오겠다고 했다는데 9시쯤에 오라더군.》

《기사장도 아나?》

《알고있겠지.》하고 태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석은 전날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뜨직해했다.

《후날에 가는게 어때? 누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잘됐네. 나도 안 갈 생각이였어.》

기석은 의아했으나 태호의 표정은 심중했다.

《그건 또 어째서?》

《…》

《금방 가자고 하고 지금 안 가겠다는건 무슨 소린가?》

《내가 언제 가자고 하던가? 초청받았다고 했지.》

《하긴 그렇군. 한데 왜 그러나?》

태호는 친구의 눈길을 피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오래동안 묵묵히 서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은듯 외투를 걸쳤다.

《거리에나 나가자구.》

기석은 말없이 따라나섰다. 바람도 없이 쌀쌀한 날씨였다. 가로등의 백광도 랭기를 풍기는상싶었다. 행인들도 추위에 쫓기는듯 바쁜 걸음들이였다.

그들은 느적느적 걸었다.

불빛이 환한 상점 진렬장에서 여름옷을 입은 마네킨이 까만 비닐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운듯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전차들이 지나다니는 차도를 건너 뒤거리에 들어섰다. 아빠트사이의 작은 단층건물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출입문유리에는 꽃장식이 그려져있었다.

넓지 않은 홀에 초록색비닐보를 씌운 식탁이 네댓개 놓여있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술을 따른 사기고뿌와 오리고기 두세점이 놓인 쟁반을 들고와서 식탁앞에 마주앉았다.

묵묵히 마셨다.

위생절을 쪼개여 오리고기를 집으면서 태호가 말했다.

《내 기석동무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네.》

《듣지.》

《가만, 이거 한고뿌 가지고는 기별도 안 가는군.》

매대로 가는 태호를 강기석이 제지했다.

《술기운을 얻어서 말할 차빈가?》

《아니야, 언제부터 하고싶었던 말이네.》

《그렇다면 술은 그만하자구.》

《왜?》

《난 알콜의 도움을 받아서 털어놓는 진정을 인정하지 않네. 술을 더 마시겠으면 말은 그만두자구. 어때?》

《좋아.》

그들은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건너갔다.

광장을 지나 포석도로에 나서니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난 말이야, 사실 이 몇달동안은 기석동무와 한방에 있기가 괴로왔어.》

《왜? 내가 동무 일에 참견하던가?》

강기석은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웃지 말어, 어느 고망년때 얘기라구?》

이쪽은 불만한듯 툭 쏘고 제 말을 계속했다.

《그 기초공사때부터 말이네. 더군다나 오작이 된 후에는 더 괴로왔어. 동무가 제재를 받았을 때엔 밤마다 잠을 못 잤어. 낮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

《다 지나간 일이네.》

그는 긴하지 않다는듯 손을 내저었으나 태호는 막무가내였다.

《처음 착상이 떠올랐을 때엔 흥분했댔어. 동무가 관리국에 갔다가 내려오기 전부터였으니까. 공사기일을 많이 앞당길수 있었거던. 자료를 조사하고 검토하고… 어지간히 자신이 생겨서 매부를 찾아갔었네. 그런데 그 사람은 다 보고나서 믿음성이 없으니 그만두라는거야. 공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벌을 받을수 있으니 중뿔나게 굴지 말라는거야.

한데 난 정말이지 공을 세우려는건 아니였어. 숱한 사람이 거기 달라붙어있는걸 생각하니 안타깝더란 말이야. 그래 찾아갔던거지.》

《나도 비슷이 짐작은 했어. 하지만 그 일에서는 매부도 매부지만 태호자신이 옳지 않아.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면 더 제기해야지. 실무일군들이 반대한다면 당조직에까지 찾아가야지.》

《지금와선 별말을 다 들어도 난 할소리가 없어. 한마디로 신심이 없었지. 게다가 매부가 다른 직책이라면 몰라도 기사장이지, 난 또 한때 매부네 집에서 살았거던.

하지만 뭐 그 얘기를 하자는건 아니야. 자, 우리 여기 앉자구. 앉아서 얘기하지.》

태호는 긴의자에 걸터앉았다.

그곳은 분수터였다. 근처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돌조각한 아이들의 군상도 함께 붙안고있는 커다란 잉어에 정신이 팔려있는듯 했다.

강기석은 이곳과 더불어 떠오르는 회상을 덮어버리면서 친구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동문 내가 어째서 누님네 집에 있다가 합숙으로 나왔는지 아나?》

태호는 동무쪽을 보지 않으면서 물었다.

《제멋대로 살기가 불편해서 나왔겠지. 늦잠을 자지 못하고 누님이 잔소리하고…》

《전엔 내가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건 아니였어.》

생각에 잠기는 그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쳐갔다.

《우린 형제가 오누이뿐이야. 내우로 누이가 하나 더 있었는데 전쟁때 재귀열에 걸려 죽고 아버지도 앓다가 전후에 사망했지. 지금 있는 누이는 나보다 훨씬 맏이여서 내가 인민학교 다닐 때 출가했어.

60년도 아니면 61년 그무렵이야.

난 금속전문을 마치고 금속건설설계실에서 일했어. 어머니가 사망한 후엔 거기 합숙에서 살았지.

설계실일은 마음에 들고 재미있었어. 5~6년 일하니까 자신이 생기더군. 그런데 한번은 내가 중요한 설계를 맡았다가 실수를 해서 말썽이 생겼댔네. 나때문에 실장이 불리워다니고 조사원들이 내려오고 복잡했댔어. 그러다가 겨우 무사하게 처리됐지만 사람들 대하기가 미안하더군. 그러던차에 나는 제강소에 옮겨오게 됐네.

난 그저 일을 잘하지 못했기때문에 그런 조치가 있은줄로 알았지.

제강소에 온 다음부터는 누님이 자꾸 같이 있자고 해서 누님네 집에서 살았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오래 지내면서 보니 마음싸지 않거던. 불편한건 둘째치고 집안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란 말이야. 우리 누님은 인정도 있고 똑똑한 녀자야. 그런데도 매부앞에서는 제 생각은 한마디도 말하지 못해. 눈치만 살피고 뭐나 다 조심하고… 그렇다고 매부가 집에 들어와 큰소리치는가 하면 그런것도 아니야.

그래 난 누님에 대해서 아주 실망했댔어.》

태호는 흥분을 누르려는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있다가 어깨를 옹송그리고 땅바닥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후에 누님이 무슨 말끝에 비치는데 매부는 처가집 가정환경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거야.

우리 아버지는 해방전에 발동기기술을 배워서 정미소를 차려놓았는데 밥술이나 먹으면서 살았던 모양이야. 그렇지만 난 그런걸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신경도 안 썼지. 난 더 말할것도 없고 우리 누님도 해방될 때 철부지였으니까 그런걸 생각지도 않는데 매부는 그것때문에 신경을 쓴다는거야.

그렇게 되니 매부란 사람이 영 보기도 싫어지더군. 제강소에 있고싶은 생각도 없어. 그래 이전에 일하던 실장한테 찾아가서 그동안 난 기사까지 됐는데 다시 오게 해달라고 들이댔네. 그런데 실장은 웃으면서 뭐이라는지 알아? 우린 사실 그때도 동무를 보내고싶지 않았는데 동무네 매부가 하도 졸라서 할수없이 돌려줬다는거야. 제길, 그렇게 된 판이였어.

화가 나서 집에 돌아와 매부를 붙잡고 들이댔지. 그게 사실인가고?

그랬더니 매부라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옮겨온게 잘한 일이라는거지. 그쪽은 중요한 공사만 맡아하는 기업소인데 설계원이라는게 조금만 잘못해도 큰 과오를 범할수 있는 직업이여서 한시도 편안할 때가 없다면서.…

그 말까지 듣고보니까 일 잘해라, 관계를 잘 가져라, 남의 눈에 튀여나지 말라 하고 매부가 입버릇처럼 외우는 말들이 모두 소심한 사람의 넉두리같고 밖에 나가서 호인으로 처신하는것도 진심이 아니라 허울같이 보이더란 말이야.

그때에야 난 매부란 사람을 똑똑히 안것 같더군. 통 흥미가 없어지더군. 내가 합숙으로 나오겠다고 하니 누님이 붙잡고 말리지 않아. 매부가 어떻게 생각하겠니. 남들이 뭐이라고 말하겠니. 그러면서 자꾸 말했지만 뿌리치고 나오고말았어. 그 집에 있다간 사람이 영 속물이 되고말겠더군.…

합숙에 나와서도 실상은 머리속이 어수선했네. 기초굴착작업때 내가 앓은것은 순전히 감기때문만이 아니였어. 도면을 가지고 매부를 찾아갔다가 중뿔나게 굴지 말란 말을 들었을적엔 울컥 밸이 났지만 돌아서서 나온 뒤에는 그 말이 머리속에 감겨돌더란 말이야.

그래 머리가 복잡한데 감기까지 걸려서 누워버리고말았지.

기석동무가 하자고 추동할 때엔 두려웠는데 동무가 정작 일에 달라붙은걸 보고는 후회를 했지. 왜 나도 함께 나서지 못했던가 하고 말이네. 그러다가 오작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속이 띠끔했지. 매부가 공연한 말을 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면서도 동무가 고생하는걸 보면 괴롭고 죄송스러웠어.…

난 이런 인간이야. 주견이 없고 의지가 약한…》

그리고는 개탄하듯 한숨을 지었다.

《의지란건 사상이나 신념에서 생기는거지, 태호는 신념이 확고하지 못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신념이 없었지.…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단단히 결심했네. 앞으로는 결코 그렇게 떨떨하게 살지 않을거네. 신념을 가지고 혁명적으로 살겠어. 두고보라구.》

태호의 진지한 말에 충격을 받은 강기석은 감동에 싸여 말이 없었다. 태호도 가슴에 넘치던 시름을 부리운듯 허리를 펴고 어둠속을 잠자코 바라볼뿐이다.

그 긴 침묵속에서 그들은 방금 자기들이 나눈 심원한 뜻을 헤아려보는듯싶었다.

추위도 느끼지 못하면서 밤의 정적속에 오래동안 앉아있었다.

공원 저편에 펼쳐진 제강소구내에서 달려가는 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밤하늘에 낮게 울리여갔다.

《돌아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호가 말했다.

《누님네 집에 가봐야 하지 않겠나?》

강기석의 걱정에 태호는 심상하게 받았다.

《이젠 너무 늦었어.》

《그래도 기다리겠는데, 기사장동지랑…》

태호는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한듯 아퀴를 지었다.

《내가 가다 들리지.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고.》

그리고는 천천히 거리쪽으로 걸어갔다.

강기석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었다.

(기사장은 바로 그런 사람이였구나. 심장속에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정의에 대한 지향도 말라버렸으나 얼굴에 너그러운 웃음을 담고 입으로는 옳은 말만 외우는 사람,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호의를 베풀다가도 불안을 끼치는 경우엔 사정없이 밟으려고드는 사람, 약한 사람앞에서는 위엄을 잃으려고 하지 않으나 강한 사람앞에서는 존엄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르고 신념이 없는 사람.…)

그렇게 생각하느라니 오히려 동정이 가고 가슴이 쓸쓸해지는것이였다.

하여 그는 마음을 울적하게 하는 그 생각을 덮어버리고 기분을 전환하려고 바다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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