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 장

열 풍


12


이튿날 저녁때 돌아오는 길에 기석은 혜영이가 일하던 작업장에 들려보았다. 그에게는 지금도 혜영이가 자기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그 처녀는 어느때건 자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있으리라고만 느껴졌다.

작업실에는 낯익은 조수가 혼자서 무엇인가를 쓰고있을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강동무가 오래간만이군!》

조수는 그를 알아보고 반기면서 《요즘은 다 가버리고 내가 혼자 집을 지키고있소.》 하고 소탈하게 웃었다.

혜영이에 대해 물어볼수도 없어서 범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섰다.

하지만 그 처녀의 일을 알지 못하고는 마음을 놓을수가 없었다.

생각끝에 그는 구단광연구실로 옥희를 찾아갔다.

밖에서 좀 만나자는 말에 옥희는 외투를 어께에 걸치고 나왔다.

청사에서 얼마큼 떨어진 공지의 나무아래에까지 와서 걸음을 멈춘 기석은 짐짓 웃음을 띠우고 옥희를 돌아봤다.

《최혜영동무는 왜 보이지 않아?》

《없어요. 자기네 연구소에 갔어요.》

무심히 그렇게 대답한 그 녀자는 호기심어린 미소를 짓고 사촌오빠를 빠끔히 쳐다봤다.

《왜 그래요. 만나보자구요?》

강기석은 묵묵히 서있다가 다시 물었다.

《언제 갔어?》

《벌써 여러날 됐어요. 진동기로 성구작업을 하지 않게 되자 얼마 안있어 떠났어요.》

《다시 올가?》

《글쎄요. 저쪽 연구소에서 어쩔는지.… 여기서 맡은 과제는 더 없으니까.》

옥희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묻는다.

《혜영이를 잘 알아요?》

《좀 알지.》

《혜영이와 무슨 관계가 있었던게 아니예요?》

《…》

《사랑하는 사인가요?》

강기석은 쓸쓸하게 웃었을뿐 대답은 못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어요?》

강기석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어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그 표정을 찬찬히 여겨보던 옥희는 눈길을 돌려 얼어붙은 수남천기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까지는 무심히 여겼던 지난날의 하찮은 일들이 지금은 하나의 줄거리에 엮어지면서 비로소 뚜렷한 표상을 안겨주었던것이다.

그 과정은 알수 없지만 혜영이가 말도 없이 떠나가버린것이며 지금 사촌오빠가 무거운 기분에 잠겨있는 사실만으로써도 사태의 진상을 어림할수 있었고 심심한 동정을 금할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그 녀자의 입에서 방심한듯 한 말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좋은 처녀예요. 명랑하고 아름답고 마음씨 곱고… 아무데 가서나 남자들의 사랑을 쉽게 차지할수 있는 처녀지요.》

강기석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채 눈길을 떨구고 뒤말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모험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사업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동반자로서는 어울리지 않을거예요.》

《어째서?》하고 강기석은 자기로서도 뜻밖이리만큼 날카롭게 물었다.

《이건 그저 내 소견일뿐이예요. 혜영이는 어려서부터 근심걱정을 모르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고 집에서 떨어져 사는 경우에도 언제나 호의를 품고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었기때문에 어려운 일을 제 힘으로 치러내는데는 습관되지 않았어요. 그런 환경이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을거예요. 여기 와서 함께 일하는 과정에 난 그런걸 느꼈어요. 평범한 생활에서는 나타나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고생이 띠우고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남자의 손에 매달려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거예요.…》

강기석은 옥희의 총명함에 속으로 감탄했다.

혜영이와 가까이 사귀면서도 자기로서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 평범한 말속에 담겨져있었던것이다.

자기에게 타이르고 권고하고 반박하던 모든 언행이 그 녀자의 제한성과 함께 지금은 더욱 명백하게 리해되였으나 그것으로 하여 혜영이를 생각하는 그의 심정은 조금도 흐리여지지 않았을뿐더러 연약한 처녀에 대한 련민의 정과 어울린 뜨거운 애정이 가슴에 사무치는것이였다.

《옥희의 말은 사실이야. 나도 그렇게까진 생각해보지 못했어. 하지만 그 동무에게도 의식이 있고 각성이라는것이 있겠지.

생활속에서 배우고 눈뜨고 깨달아가겠지, 결함이나 부족점은 누구에게나 있는거니까. 사랑한다면 그런 점을 꺼릴수도 없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라야 진실한것이 아닐가.》

옥희는 감동이 어린 눈을 쳐들어 명상에 잠긴 강기석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말에서 그의 심정을 력력히 깨달은 처녀는 정겹게 말했다.

《하긴 혜영이가 떠나기 전에 어쩐지 몹시 우울했어요. 명랑하던 얼굴에 수심이 끼고 말도 하지 않았으며 물끄러미 생각에 잠기군 해서 우리도 모두 이상하게 여겼댔어요. 가슴속에 무슨 번민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어수선한 기분에 싸인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따뜻한 인정을 느끼며 가지 앙상한 나무아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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