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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열 풍


10


강기석이 구상한 성구기에 대한 기술합평회는 소회의실에서 진행되였다.

제강소 책임일군들을 비롯하여 회전로계통의 기사들과 조수들이 왔었다. 주체철시험생산을 시작한 이후에나 그전에나 할것없이 이 소회의실에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많은 기술협의회들과 합평회들이 진행되였으나 이 모임처럼 특이하게 진행되는 례는 일찌기 없었다.

집행부에는 이 문제때문에 와있는 금속설계연구소 소장을 비롯하여 공장책임일군들과 지형민부원장이 자리를 잡았으며 기사장이 회의를 사회했다.

모두들 벌써부터 커다란 호기심을 품고 흥분에 싸여있었다.

능력있는 과학자가 연구하여 완성한 기계에 비해 훨씬 성능이 우월하다는 새로운 성구기의 기술조건들도 알고싶었지만 보다는 제강소의 이름없는 젊은 기사가 어떻게 그런것을 착안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했는가, 착상의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과학적인 탐색과 더불어 인간적인 심리에 이르기까지의 구체적인 진실을 듣고저 하는것이였다.

제강소기사장이 먼저 새 야금법의 완성에서 성구공정이 가지는 중요성을 상기시키면서 오늘의 모임을 가지게 된 취지를 간단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연신 강기석이쪽을 돌아보는것이였다.

곡절많았던 창조과정은 결속되였으며 고생했던 노력은 드디여 열매를 맺었다.

남은것은 이제 그것을 사람들앞에서 선포하는것이며 있을수 있는 의문과 갖가지 호기심에 만족을 주는것뿐이다.

성공은 담보되여있었으니 그는 당당한 승리자였고 축하와 찬사에 떠받들리울 이 모임의 주인공이였다.

했으나 그는 지금 지탱하기 어려운 부담이라도 짊어진듯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이 도면이 완성되기까지에 기울인 연구사의 헌신적인 노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그는 자기를 창안자라고 인정하는것이 못내 괴로왔던것이다.

차례가 되여 연단에 나선 그는 한옆에 걸어놓은 모형도를 들여다보면서 기계의 성능과 공학적원리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착상의 단서로부터 완성하기까지의 과정도 알고싶어했으나 그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뿐더러 말하고싶지도 않았다.

질문들이 시작됐다.

그것들은 대체로 첫 검토자였던 박성국이 표시했던바와 비슷한 의문들이였으나 대답은 그때부터 훨씬 짧고 실무적이였으며 젊은 사람답지 않게 침착했다.

송구스러움과 불안이 어린 긴장한 심정이 사려와 진중성으로 나타났던것이다.

그리하여 강기석이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뿐아니라 그를 잘 알고있던 사람들까지도 이즈음 더욱 숙성해진듯 한 그의 성품에 못내 감동되는것이였다.

자기의 짧은 보고를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강기석이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정하지 못할뿐더러 저로서는 몹시 거북합니다. 첫 도안에서 제기된 결함이 어떻게 퇴치되고 완성되였는가 하는 사실은 그만두고라도 직경이 이렇게 큰 대형회전판이 경사각에서 무리없이 회전할수 있게 하는 전반적인 과정은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유능한 연구사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해결할수 없었던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를 철면피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성구기의 완성을 공정하게 인정하려고 한다면 이 기대를 강기석이 만들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기를 바랍니다.》

그 말은 열렬한 박수로써 접수되였다.

뒤이어 토론이 시작되였다.

과학자들도, 로동자, 기술자들도 모두가 이 성구기의 기술적제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주체적인 철생산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인정하면서도 호평과 찬사는 조심스럽게 비치였다.

그들은 모두가 이 자리에 그 창안품과 운명을 겨루던 진동식성구기의 창안자가 앉아있음을 망각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랬던만큼 박성국이 연단에 나섰을 때 호기심과 더불어 강렬한 흥분을 느꼈다.

박성국은 침착했고 동시에 랭정해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전에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강기석의 말을 들으면서 기사가 자기 창안품의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으려고 극력 자제하며 꼭 필요한 말만을 하고있다는것을 뚜렷이 느꼈었다.

그랬던만큼 그는 기사가 미처 말하지 않은 분야에까지 파고들면서 접시형성구기의 우월성을 더욱 폭넓게 증명하기 시작했다.

론리정연한 변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열을 띠여갔다.

자제하는 흥분속에는 청년기사의 성과에 대한 진심어린 찬사와 더불어 자신의 제한성에 대한 쓰디쓴 울분도 있었을것이다.

넓은 회의실안은 물을 뿌린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류창한 언변이나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보다도 과학자로서의 량심적인 행위에 깊이 감동되여있었다. 제강소사람들의 심정은 한결같았고 과학자들도 또한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호기심을 품고있는것은 원옥희였다.

그 녀자는 처음 강기석의 말을 들을 때엔 찬탄과 감동에 싸여 침착하게 앉아있었지만 지금은 박성국의 온 자태에서 그 무엇을 찾아보려는듯 상반신을 긴장하게 내밀고 주의깊은 눈길을 그에게서 떼지 않는것이였다. 부드러운 머리칼은 창백해진 뺨우에 흘러내리고 가볍게 벌려진 입가엔 긴장한 미소가 비껴있는데 움직일줄 모르는 눈동자에선 환희가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초급당비서 심득수의 얼굴도 감탄과 행복감으로 환해지고 지형민이도 사뭇 흥분되는듯 작은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것이였다.

최병기만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였으나 마음은 이전같지 않았다.

다른 때같으면 그는 이런 자리에 앉아서도 론의되는 기술문제와 관련한 실무적인 사업들 례하면 기계의 제작과 병행해야 할 새로운 생산건물의 건설, 공정의 준비, 갖가지 계획, 포치, 자재 및 로력조달, 기술력량의 배치 등에 대해서 타산해보면서 수첩에 몇자씩 적어넣군 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있었다.

강기석이 연단에 나왔을 때부터 그는 그 청년기사를 자기가 어떻게 대해왔던가 하고 더듬어보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지 않게만 보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것은 자기의 편벽된 관념을 딸에게까지 강요한것이였다.

오작으로 판명된 기초공사때문에 책임을 물으며 안타까와하던 혜영이에게 준절하게 대하던 일도 잊을수 없다.

그때 사업과 관련되는 문제를 들고다닌다고 면박을 준것은 응당한 충고였지만 그 청년을 비난한것은 어리석은 일이였다.

자식들에게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량심,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슬기를 깨우치고 키워주어야 할 아버지로서 평생을 두고 귀중하게 간직할 진주같은 말을 과연 들려줄수 없었단 말인가.

…들려줄수 없었다. 들려줄수 없었다.…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고 사람들의 일에 깊이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어디서 그런 체험이 생기며 혹시 알고는 있었다 해도 가슴속에 앙금져있지 않았던 말이 어찌 그런 정황에서 우러나올수 있었으랴.

만일 사려깊은 아버지였다면 딸을 앉혀놓고 그들의 관계를 진지하게 알아본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해줄수도 있었을것이다.

《네가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나는 그 사람의 책임을 덜어줄수도 벗겨줄수도 없다.

하지만 네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과실을 범하고 책벌을 받았다 해서 실망하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말어라. 처지가 어려워졌을 때 도와주는것이 진실한 사람이고 진실한 사랑이다. 그러니 더욱 따뜻하게 대하고 힘을 주어야 한다.

험난한 생활에서 뜻이 깊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한 말은 딸의 가슴에 귀중하게 남을것이고 그의 성품에 귀중한 밑천으로 될것이다. 그리고 딸을 그렇게 훈계하는 아버지인 자기자신도 스스로 더욱 수양될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처신하지 못했었다.

강기석이라는 청년을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또 그를 사랑하는 자기 딸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그들의 관계에 랭담하게 대했고 서슴없이 불만을 터뜨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비길데없이 용렬한 일이다. 리익이 보이면 끌리고 손해가 짐작되면 물러서는 천박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것이 아닌가.

그리고도 수천명사람들을 지도하는 책임일군이라고…

아버지의 그런 관념이 딸에게 그대로 옮아간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자기는 그런 태도를 보이고도 그후엔 그들의 관계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었다. 거기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던것도 사실이지만 보다는 자기 태도가 옳았다는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것이다.

비뿌리는 저녁때에 함초롬히 젖어서 시험로현장에 뛰여왔던 평량차 운전공의 모습은 지금도 최병기의 가슴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지, 내가… 지금 여기 어디 앉아있을 혜영이도 이 애비를 원망하겠지.

어쨌든 이 일은 바로잡아야 한다, 혜영이도 생각이 있겠지만 나도 아버지구실을 잘해야지.)

최병기는 무뚝뚝한 표정에 싸여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혜영은 지금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한 말을 상기하지도 않았다.… 제자리에 똑바로 앉아 눈길을 다소곳이 내려깔고있었으나 예민해진 청각은 회의실안에서 울리는 말들을 놓침없이 듣고있었다.

이 며칠동안을 번민속에 보내고난 그 녀자는 지금 오히려 마음의 평정을 얻어 자신의 앞날을 고요히 내다보고있었다.

지금 누구보다도 립장이 난처하지만 누구보다도 태연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기사장이였다.

한명택은 접시형성구기에 대한 구상을 묵살했을뿐아니라 강기석이라는 존재를 묵살해왔었다.

박성국이 창안한 진동식성구기를 적극 지지하면서 그것을 생산공정에 도입하려고 열성적으로 뛰여다닌것도 공명정대한 사업으로 표방되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강기석이를 무시하려는 줄기찬 감정이 뻗어있었다.

한명택이 가슴속에 품고있는 감정이 무엇인가 하는것까지는 몰랐다 해도 그가 강기석이 만드는 성구기를 반대했었다는것은 박성국이나 최혜영이뿐아니라 그것을 도와주자고 찾아갔던 엄학준에게도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에게도 알려져있었다.

그런데다 요즘 자기가 동의하지 않은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겼던 저장탕크기초의 혁신적인 안이 전적으로 옳았다는것이 밝혀져 면목이 없게 된 형편에서 지금 이런 합평회가 벌어지고있었으므로 기사장으로서의 체면이 볼꼴없이 되였을뿐아니라 심정이 매우 불안했다.

만약 강기석의 착안을 반대하는 토론자들이 한두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한명택은 흔들리기 시작한 사업상의 지위를 든든히 하기 위해 그 토론들을 적극 지지하면서 갖은 론거를 다 들고나왔을것이다. 새로운것이란 어느 경우나 완성된것이 아니므로 부족점을 찾자면 얼마든지 찾을수 있고 그것을 강조하고 설득시킬만 한 리론도 경험도 얼마든지 렬거할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쟁자》인 박성국이자신이 반대하지 않을뿐아니라 오히려 적극 지지하여 열변을 토하는 형편이니 기사장의 립장을 호전시킬 아무런 가능성도 없었던것이다.

지금 사람들앞에 낯을 들고 앉아있는 한명택에게는 이 합평회가 마치도 자기를 규탄하고 성토하는 모임같이 느껴졌다.

《대담한 착상》이요, 《확고한 신념》이요 하고 열이 나서 끌고가는 박성국의 긴 토론이 마치도 제강소기사장이 소심하고 무능력하며 신념이 박약하다는것을 증명하는 말같았고 질문도 반박도 없이 귀담아들으면서 공감하듯 눈을 빛내이는 청중들은 거기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고있는것만 같았다.

그는 여태까지 비판을 받은 일이 더러 있었으나 대체로는 책임성이 없다거나 형식주의가 있다는 등의 일반적인 비판이였지 기사장자격이 없다는 등의 말은 들은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 여기서도 그런 말은 고사하고 기사장에 대한 의견조차 표명된것은 없었으나 모든 토론이 바로 생산과 기술공정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특히는 ㄱ철생산을 감당할수 있는 일군으로서의 풍모와 자격이 한명택에게는 없다고 강조하는것만 같았다.

창문들마다에서 찬기운이 스며들고 넓다란 회의실안은 썰렁했으나 그는 잔등에 진땀이 흐르고 책상우에 올려놓은 손에도 땀이 쥐여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난감한 처지에서도 한명택은 굳어진 얼굴에 한가닥 미소를 띠우고 감심한듯 한 표정을 보이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의 처지가 보잘것없이 되여가는 이 난국을 장차 어떻게 헤쳐나가겠는가 하고 골똘히 궁리하고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고비를 태연하게 넘기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기사장의 잘못을 거들지 않는데 불안한 속심을 스스로 드러낼 필요는 없다. 불안해하며 소심하게 지낸다는것은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의 관념속에 뿌리박기 시작하는 기사장에 대한 불신의 감정을 더욱 조장시키는것으로밖에 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제 발밑에 구뎅이를 파는것이며 사업을 위해서도 도움될것이 없다고 그는 단정했다.

위축될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성구공정을 빨리 꾸려야 한다. 공정을 짜고 분담하고 협동생산에 물리고 진행형편을 알아보는 등의 조직사업에서는 솜씨가 있는 한명택이였다.

그 일을 밀고나가면서도 더욱 관심을 돌려야 할 일은 ㄱ철의 생산성을 높이는것이며 그것을 위해 구단광의 질을 높이는것이다.

ㄱ철의 우월성을 실증하기 위한 결정적인 고리가 구단광의 질을 높이는데 있다. 이것을 틀어쥐고나가야 하며 바로 거기서 기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조업현장에도 붙어있어야 하고 연구사들의 사업형편도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여전히 원만하게 가져야 하며 강기석에 대해서도 요즈음처럼 랭담하게 굴어선 안된다.

제강소사람들속에서뿐아니라 과학계의 권위있는 사람들사이에서도 능력이 인정된 그를 무시하고 배척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그럽고 각근하게 돌보아주면서 이전때와 같이 남다른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일러주고 내세워주고 그의 처지를 유리하게 해주어야 한다.…

강기석은 아직 제재를 받았던 그 직책에서 일하고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실무적인 처리가 뒤따르지 않았기때문이였다.

큰일을 하나 해놓은데다 이전날의 사고원인도 새로 밝혀졌으므로 본래의 직책에 돌아오는것은 시간상의 문제여서 본인뿐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기엔 별로 마음을 쓰지 않고있었다.

게다가 요즘은 주로 성구기의 제작에 붙어있었으므로 하는 일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한명택은 기업소의 사고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기의 직권에 속하는 사고처리에 대한 문건을 조속히 완결함으로써 강기석에게 호의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협의회가 끝나자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속에 섞여 현관을 나선 강기석은 층계를 내려와 우두커니 서있었다.

바람없이 잠풍한 저녁이였다. 구름낀 하늘에선 반달이 어스름하게 비치고있다.

어쩐지 합숙으로 곧장 돌아가고싶지 않았다. 행복감에 싸여 기뻐해야 할 자기건만 마음 한구석이 비여있는상싶었다.

혜영이가 몹시도 그리워지는것이였다.

등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비켜서서 걸어가던 그는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니 사람들의 뒤로 두 처녀가 오고있었다. 원옥희는 기쁨에 넘치는 행복한 얼굴이였으나 최혜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곧바로 눈앞을 보며 걷고있었다.

《기석오빠, 축하해요!》

옥희는 웃으며 손을 내밀어 그를 축하했다. 그리고는 동무쪽을 돌아보며 《혜영이.》 하고 불렀으나 저쪽은 응대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갔다.

인사라도 시키려고 불렀던 옥희는 전에없이 꼿꼿한 혜영이의 거동에 의아해하면서도 어색하게 웃었다.

《저 동무를 모르지요?》

옥희가 스스럼없이 물었을 때 기석의 가슴은 아프게 조여들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으며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사이였건만 지금은 언제한번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들처럼 쌀쌀하게 지나쳐버렸다.

자기가 성공과 영예의 주인공으로 된 이 마당에서도 변함없이 랭담한 그 자태는 오히려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서부지구〉에 있는 동무인데 우리한테 와있어요.》

알려주려고 말하는 옥희의 명랑한 목소리를 걸어가는 혜영이도 들었을것이다.

(혜영이는 지금 무엇을 생각할가? 나처럼 가슴이 미여지는듯 한 괴로움을 느낄가?)

기석은 멀어져가는 그 녀자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때요. 미인이지요?》

눈길을 떼지 못하는 기석의 표정을 여겨보면서 옥희가 하는 말이였다.

기석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얼굴을 돌렸다.

《오늘은 정말 훌륭했어요, 모든것이… 성능높은 대형성구기가 완성됐다는것도 좋았고 기석오빠의 토론도, 박성국동무의 토론도 모두 좋아요.》

《고마와, 옥희.》

기석은 깊은 생각에서 헤여나며 사촌누이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어린 갸름한 얼굴에서 기쁨이 빛나고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성과를 기뻐하는 사심없는 진정이였다.

그 진정을 느끼고있는 이 순간에조차도 그의 가슴속에는 혜영이 생각이 무겁게 자리잡고있었다.

《오빠, 지금 우리 집에 가요. 아버지한테도 얘기하고… 모두 기뻐할거예요.》

《무슨 큰일이라구, 후에 가지.》

서글픈 미소가 스쳐지나가는 그의 표정을 미타하게 살피다가 옥희가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 그저 오늘은 아무데도 가고싶은 생각이 없어. 지금 기분이 그래.》

그의 기분은 서글픈 어조와 생각에 잠긴 표정속에 나타나있었으므로 옥희는 더 이끌지 않았다.

했으나 이대로 헤여지고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난 사람들의 의로운 심정을 보게 되는 때가 제일 행복해요. 평범하게 여겼던 사람들에게서 의롭고 고결한 마음을 보게 되는 때엔 눈물이 나도록 사람들이 아름다와보이고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는 아랑곳없이 명상에 잠겨 혼자소리처럼 뇌이는 옥희의 말에는 깊은 생각과 더불어 남모르는 사연이 깃들어있는듯이 느껴졌다.

문득 그의 머리속에는 옥희가 박성국이를 비난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옥희가 지금 그렇게도 기뻐하며 행복감에 싸여있는것이 자기때문만이 아니며 또한 생활과 사람들 일반에 대한 막연한 환희때문만도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옥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있는 변화에 감동되였다.

그러한 감정을 귀중하게 여겼으며 고무하고싶었다.

《토론할 때 말은 다 하지 못했지만 사실 박성국연구사는 성의있게 도와주었어.》

《…》

《앞으로 성구공정을 꾸리는데서두 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것 같애.》

옥희는 자기의 깊은 속심을 눈치채인것이 서먹한듯 잠자코 있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거절했지만 앞으로는 내가 청하지 않아도 우리 집에 다녀야 해요.》

기석은 머리를 끄덕였다.

걸음발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는 옥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기석은 혜영이를 생각하고있었다.…


혜영이가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하고있었다.

딸의 표정을 찬찬히 보고있던 어머니가 《어디 가있었는지 꽁꽁 얼었구나, 얼굴이 새파래진게.…》 하고 걱정했으나 혜영에게는 먼 소리로만 들려왔다.

자기 방에 불이 켜져있지 않았으나 켜려고 하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옷을 벗어 걸어놓고는 자리에 누워버렸다.

저녁을 먹으라고 찾으며 올라온 어머니가 불을 켜려 했으나 만류하고 내려보냈다.

먹고싶지도 않았고 말하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눈길을 들어 어둠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느라니 토론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속에서 강기석의 모습만이 우렷이 떠오른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옥희가 자기를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못했다. 자기를 바라보고있는듯 한 강기석의 눈길을 등뒤에 느끼면서 온몸이 긴장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때 혜영의 가슴도 터질듯이 괴로왔었다.

눈에 어린 눈물을 통해 더욱 정겹게, 아름답게 보이는 지난날의 일들이 상념의 물결을 타고 흘러간다.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대하던 은근한 모습.

바다가로 산책하던 밤, 믿음을 표시하는 뜻깊은 말에 감동되여 행복감을 금치 못하면서도 사랑하는 처녀를 포옹하는것조차 두려워하던 일, 유원지에서 보낸 휴식일, 《운명의 다리》를 건느려고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성을 냈을 때 그에는 아랑곳없이 떠오른 착상에 어리둥절해서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목소리, 그 모든것은 혜영이가 그때껏 바라고 그리여오던 사람이였다.

하기에 처녀는 그뒤에 닥쳐온 풍파와 곡절속에서 모대기는 청년을 도와주려 했고 자기의 리상이 그리던 그 길에 내세우려고 했었다.

했으나 청년은 순응하지 않았고 리해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기 앞날을 두려워함이 없이 험난한 길을 걸어갔다.

비바람 뿌려지는 늦가을 저녁, 원료장경간사이의 휑뎅그렁한 지붕아래서 나눈 이야기.

《동무는 내가 좋은 생활이 보장되여있는 직급의 층층다리를 톺아올라가기만을 바라지만 나는 그러고싶지 않소.…》

처녀는 자기 리상이 깨여져가는 현실에 놀라고 기약할수 없는 운명을 두려워하면서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를 원망하고 랭담하게 대하는 심정속에는 뉘우치고 돌아서기를 바라는 일루의 기대도 있었으나 그것이 가망없음을 깨닫게 된 마당에서는 단념하리라 작정했었다.

얼마전 숙소로 박성국이를 찾아가던 길, 그 엄숙한 순간에도 청년은 울분에 싸여 《동문 나라는 사람을 모르오.》 하고 개탄했었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이즈음에 와서야 혜영은 비로소 강기석이라는 인간을 온통 깊이 알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바라던 재능있고 성실하기만 한 청년이 아니였지만 자기의 범속한 리상을 비웃으며 억세게 일떠선 그 준엄한 성격은 오히려 깊은 감동을 자아내면서 상실의 쓰라림을 더하여주는것이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나간 일을 더듬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으나 괴로움은 어쩔수없이 가슴에 차오르는것이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상을 차리는 그롯소리가 들린다.

《술이나 있으면 가져오우.》

어머니가 드나들고 큰 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더는 아무 기척도 없다.

어째서인지 쥐죽은듯 고요한 속에서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뇌인다.

《오늘 저녁엔 모두 어찐 일이요? 초상난 집처럼 말두 없구 술잔을 부둥켜쥐고, 마시지두 않으면서…》

《초상은 무슨 초상이요! 기뻐서 그러는데… 훌륭한 사람을 하나 알게 돼서 기쁘단 말이요!》

화가 나서 소리치는 아버지의 거치른 말에 혜영은 어째서인지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눈물이 쏟아지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소리없이 울었다.

어리석었던 자기의 지난날을 원망하며 울었고 푸접없이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야속하여 울었다. 책을 받으며 쓸쓸하게 헤여진 강기석의 모습이 가슴아파 울었고 앞날이 막연해진 처녀의 신세가 서러워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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