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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열 풍


8


이튿날 차봉만은 떠나지 못했다.

밤중에 박성국이로부터 려관에 전화가 걸려왔었다. 원고에 몇가지 첨가할 점이 있으므로 꼭 만나자는것이였다. 아침에 그가 나왔을 때 연구실에서는 지휘성원들의 협의회가 진행되고있었다. 차봉만은 원옥희가 일하는 방에 와서 기다렸다.

평양행급행렬차는 저녁에도 있었으므로 얼마간의 여유는 있었다. 박성국이만이 서둘러준다면 그동안에 원고를 수정하여가지고 떠날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는 안정을 잃고 서성거리면서도 원옥희의 옆책상에 앉아있는 혜영이를 바라보군 했다. 처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침착한 태도가 눈길을 끌었던것이다.

박성국이 일하는 연구실의 작업장에서 몇번 본적이 있는 그 매력있는 처녀는 사업으로 하여 초조한 지금같은 정황에서도 그의 관심밖에 놓이지는 않았던것이다.

협의회는 11시경에야 끝났다.

박성국이 방에 들어서는것을 본 차봉만은 의자를 밀어젖히며 성급하게 일어섰다.

《바쁜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회의에 들어가있으면 어떡합니까?》

박성국은 부드럽게 사과했다. 잠자지 못한 얼굴은 해쓱했고 눈에는 피발이 서있었다. 그의 기분이 씨원치 않음을 눈치챈 차봉만은 웃으며 화해조로 덧붙였다.

《시간을 다투는 일에서는 기자들에게 우선권이 부여되여있습니다.》

《미안합니다. 기자동무.》

박성국은 잠시 입을 다물고있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그 원고를 발표하지 말아주십시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박성국은 방안을 천천히 걸어가 사람들을 등지고 창가에 멎어섰다. 그의 거동이 진지했으므로 기자는 아연해져서 물었다.

《그건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박성국은 대답하고싶지 않은듯 오래동안 그렇게 서있었으나 드디여 돌아섰다.

《발표할 가치가 없게 되였습니다. 새로운, 보다 훌륭한 성구기의 도안이 완성되였습니다.…》

그는 한 이름없는 청년이 접시형으로 성능좋은 기계를 설계했다는것을 짤막히 설명했다.

《그건 나도 알고있습니다.》

시름이 놓이는듯 기자가 쾌활하게 말했다.

《시험로에 갔을 때 거기 동무들이 자기네 현장기사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 동무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도안은 보았습니다.

나 역시 공학기사입니다. 그건 아직 신뢰성이 담보되지 않으며 도입될 가망은 더욱 없습니다.》

《도입될 가망이 없다는건?》

《현실적으로 진동식성구기를 도입하기 위한 준비가 되였을뿐아니라 강동무의 그것은 심의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기사장을 비롯하여 공장안의 기술자들도 모두가 의혹을 품고있으며 기술적으로 미진한 점이 많다는 의견입니다. 아무도 그 의안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박성국은 괴로운듯 이마에 주름이 가득해져서 나직이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다.

《확신합니다. 토론도 했습니다. 기사장은 그 설계가 너무나도 엉뚱하기때문에, 상식을 벗어난 계산방법을 도입했기때문에 믿으려고 하지 않으며 창안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이기때문에 또 그가 다른 사업에서 실패했으며 제재를 받고있기때문에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고있습니다.…

탐구하고 창조하는 과정에는 과오도 실패도 있을수 있습니다. 다만 창조에 대한 지향도 능력도 없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실패와 과오에 놀라고 겁을 먹는 법이지요. 그네들은 자기들처럼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희생을 무릅쓰며 새것을 탐구하기 위해 투신한 대담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것입니다. 기자동무도 공학을 전공했다지요?》

박성국은 가까이에 있는 책상우를 두루 살피다가 필요한것을 찾지 못하자 양복주머니에서 종이장을 꺼내더니 그 뒤등에 수자와 기호들이 섞인 무슨 공식을 쓰기 시작했다.

차봉만은 그것이 며칠전 취재하는 과정에 박성국이 내보이던 다섯살 난 딸에게서 온 편지임을 알았다. 남의 손에 씌여진 편지, 아버지의 성과를 기뻐하는 어린 딸의 순결한 마음이 또렷이 드러난 그 편지를 내보이며 행복감에 싸여있던 연구사의 모습이 상기되여 그의 마음은 서글퍼지고 엄숙해지는것이였다.

《동문 이런 공식을 배운 일이 있습니까?… 들은 일은?… 공학을 많이 알고있다고 자부해오던 나로서도 이런 풀이법은 처음 대합니다. 이건 그 동무가 만든겁니다. 자기가 만드는 기계원리의 검증을 위해 자기식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기계는 훌륭하게 완성될겁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 동무는 기사로서도 재능이 있지만 인간으로서도 참답고 흘륭한 우리 시대의 청년이요. 나는 그 도안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렇지만 공장기사장은 의연히 이것을 도입하려고 추진하고있던데요. 저쪽것은 확신도 없거니와 착상이 좋은 점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완성하기까지는 해결하기 곤난한 문제들이 제기되고있어서…》

《공학적인 면에서 그렇게 말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종자의 발견이 어려운것이지 그밖의 모든것은 전문가적지식만 있으면 해결할수 있습니다. 나는 장담합니다.

추진해오던 일이라 해서 그냥 진동식을 리용하려고 한다면 동의할수 없소. 그렇게 된다면 진동식기계의 창안자인 나는 일생을 두고 자신을 용서할수 없을거요. 그건 과학자로서, 인간으로서 나의 량심이 허락치 않소!》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군림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최혜영은 온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듯 꼿꼿이 앉아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은 그 녀자의 아름다움을 한결 더 두드러지게 나타냈으나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기자도 그 녀자의 매력있는 외모를 망각해버린듯 했다. 자기 과제가 난처하게 된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풀썩풀썩 담배만 태웠다.

그는 박성국의 열렬한 말을 들으면서도 틀어져나가는 편집계획을 걱정하고있었다. 합평, 인쇄회부, 잡지의 발행… 다음호계획이 파탄되는것이다.…

오고가는 말들을 한마디도 놓칠세라 귀담아들으며 다소곳이 앉아있던 원옥희가 고요히 눈길을 쳐들었다.

《설사 도입하지 않는다 해도 잡지에 발표하는것은 별문제 아닐가요? 많은 정력을 들인것인데 과학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참고가 될거예요.》

평소에 박성국이를 좋지 않게 대해오던 원옥희였지만 지금 극적인 정황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결한 인간미앞에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그리하여 무엇으로든 그를 도와주고싶었고 위로해주고싶었던것이다.

원옥희의 말에 기자는 구원이라도 받은듯 연구사를 쳐다보았으나 박성국은 랭소를 띠우고 거만하게 처녀를 흘겨봤다.

《그래 나에겐 존엄도 긍지도 없는것 같소? 아무런 현실적의의도 없는 연구결과를 단지 무엇인가 연구했다는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잡지에 발표한다면 거기서 위안을 받을것 같소? 참 눈물겨운 동정이군.》

그리고는 방안에서 나가버렸다. 원옥희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여지없이 모욕한 그 거만한 연구사의 모습을 경의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것이였다.

성실하고 기개높은 원옥희에게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강렬한 충격을 받은것은 혜영이였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여버린듯 주위의 동정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일에 착수한 뒤에도 오래동안 물끄러미 그 모양대로 앉아있을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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