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3 장

열 풍


5


이날 날씨는 아침부터 찌뿌둥하니 흐려있었다.

가을의 풍요함이 사라져버린 색채없는 대지우를 찬바람이 불어지났다. 현장을 돌아보고있는 지배인의 기분도 날씨처럼 흐려있었다.

추위가 부득부득 닥쳐오는 때에 구단광경화장을 제대로 꾸려놓지 못한것이 걱정이였다. 그는 진작 자금을 들여서라도 경화장을 번듯하게 꾸려놓으려고 했었으나 일부 과학자들은 들어오는 원료의 성질을 운운하면서 현존시설을 그대로 리용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던것이다.

그 문제때문에 벌어졌던 며칠전의 협의회에서 최병기는 자기 견해를 반대하는 부원장이나 그밖의 사람들보다도 시종 침묵을 지키던 기사장에 대해서 더욱 불만이였다.

다른 때에는 건조로와 경화장을 새로 꾸려야겠다고 말하군 하던 기사장이 웃기관일군들까지 참가하여 론쟁이 심했던 그 마당에서는 자기 견해를 전혀 나타내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루한 일로 하여 요새 두루 기분이 언짢았던 지배인은 원료장에 나와있는 기사장을 무관심하게 대했다. 허나 저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지배인은 별로 묻지도 않았으나 한명택은 수첩을 펼쳐들고 최근 들어온 원료의 형편을 산지와 품위별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최병기는 다 듣고나서 찌프린 눈길로 원료장일경을 굽어보면서 뜨직뜨직 걸음을 옮기였다.

사람들이 흔히 다니는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던 그는 수리공휴계실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 휴계실은 높고 휑뎅그렁한 건물의 중간층에 잡은데다 우로도 아래로도 수직계단이 놓여있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였다.

란간너머로 엇비듬히 몸을 기울여 그쪽을 굽어보던 최병기는 가던 걸음을 돌려 수직계단을 내려갔다.

휴계실앞의 좁은 발판에서 한동안 듣고있다가 뚜벅뚜벅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너덧되는 처녀들이 수리공들과 어울려 악기들을 타는데 짤막한 지휘봉을 들고 박자를 쳐주며 관장이 그들을 지도하고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는 흐르는 선률을 쓰다듬기라도 하듯 눈을 감고 곡상에 취해 몸을 흔들다가 화음이 잘되지 않는 대목에서는 《씨-내림!》 하고 음색을 지적하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긴장한 속에서도 미소를 머금고 연주에 마음을 쓰고있었는데 문가에 나타난 지배인을 보자 뚝 그쳐버렸다.

《왜 안하오, 왜?》

관장은 불만하여 소리치면서도 지휘봉은 여전히 흔들고있었다. 처녀들이 얼굴을 숙이며 킬킬거리는것을 보자 눈을 흡뜨고 성을 낼듯 했으나 문쪽을 돌아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최병기는 휴계실안을 둘러보다가 관장에게서 눈길을 멈추었다.

《이젠 여기다가 회관을 차려놓았소?》

물음인지 비난인지 분명치 않은 지꿎은 그 한마디에 관장은 눈살이 꼿꼿해졌다.

《회관을 여기다 차려놓은것이 아니라 예술이 현실에 침투한겁니다.》

자기를 허줄히 보는 지배인에 대한 평소의 반감을 드러내면서 곱지 않은 말로 대답한다.

최병기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다가 어처구니없는지 《흠-》 하고 뇌인다.

《좌우간 좋은 일이요. 대보수요, 신축이요 하면서 요란하게 꾸리고 들어앉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훨씬 잘한 일이지.》

관장은 안경을 수습하면서 지배인을 치떠보았다.

《이것과 그건 서로 다른 문제지요.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는 흥분과 더불어 자기 사색이 더욱 선명해짐을 유쾌하게 느끼며 기탄없이 내리엮었다.

《자금바란스요, 수익금이요 하는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술의 힘에 대하여, 생활에서 노는 그의 거대한 역할에 대하여 께우친다는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최병기는 어리둥절하니 서있다가 옆에서 기사장이 《갑시다!》 하고 이끄는 바람에 따라서고말았다. 층계에 발을 걸다가 아무래도 비위에 거슬렸던지 《별난 사람을 다 보는군! 허, 거참.》 하고 제풀에 뇌였다.

《워낙 성미가 페로운 사람이지요.》

기사장이 곁들어 말하자 싱거워진듯 말없이 터벅터벅 층계를 내려갔다. 웃쪽 휴계실에서는 또다시 음악소리가 울리고있었다.

안경속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를 치떠보던 관장의 도전적인 태도로 하여 더욱 기분을 잡친 최병기는 쓴맛을 다시며 철기둥사이로 지나가다가 무심히 눈길을 돌렸다.

어수선해보이는 콩크리트바닥우에 앉아있는 청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게는 그저 생산건물안에 판자로 된 가설건물이 서있는것이 눈에 거슬렸던것이다.

그래 그는 심상하게 물었다.

《여기선 뭘하오?》

눈이 휘둥그래진 그 청년은 엉거주춤 일어서있을뿐이였다.

의아한 눈길로 판자칸과 그 주변에 널려있는 어수선한 자취들을 돌아보던 지배인은 그 청년의 곁을 스쳐서 뒤쪽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찌프렸다.

《저건 또 뭐이요?》

고기를 담은 남비를 두손으로 들고 거기에 불뭉치까지 껴쥔 사람이 발앞만 굽어보면서 비청비청 걸어오다가 목소리에 놀라 우뚝 서버린다. 막생긴 그의 얼굴에 당황한 미소가 떠올랐으나 그것은 순간이였다. 그는 허둥거리며 남비를 내려놓고 불뭉치를 콩크리트바닥에 던졌으나 더는 어찌할바를 몰라 손을 드리우고 서있었다.

오늘 하루동안에 두루 언짢던 지배인의 기분은 여기서 폭발하고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요? 동무넨 여기서 뭘하오?》

격분이 심했던 최병기는 숨을 거칠게 내뿜더니 더 말하고싶지도 않은듯 뒤따라온 기사장을 향해 짭짤하게 분부했다.

《알아보시오.… 무슨 놈의 도깨비판인지…》

그리고는 더 돌아보는 일도 없이 그곳을 지나가버렸다.

그 정황은 기사장이 보기에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한명택은 성난 눈길로 태호쪽을 쏘아보며 콩크리트층계를 올라왔다.

《이건 도대체 뭐냐?》 하고 그는 땅바닥에 널려진 물건들을 보면서 처남에게 따졌다.

태호는 짓수굿해서 대답이 없었다.

《왜 이런걸 여기 가져왔어?》

말소리는 잔잔했으나 따지는품이 심상치 않았다.

《왜 가져왔는가고 묻지 않아?》 하고 그는 태호를 노려보며 거듭했다. 저쪽은 무사히 넘기지 못할줄 짐작했던지 발부리를 굽어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동무들이 추운데서 수고하길래 좀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소.》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은 네가 맡았니, 엉?》

《맡아서 하는게 아니요. 기석동무랑 합숙에서 같이 지내는데… 사실은 집에 청해다가 한번 대접할수도 있는 처지 아니요? 밤을 패며 수고하는데…》

더 물러설데가 없이 난처해진 태호는 오히려 뻑뻑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투에 한명택은 더욱 화가 났다. 처남의 말에서 자기에 대한 비난 비슷한것을 느꼈던것이다.

《널더러 누가 그런 걱정을 하라더냐? 그런 걱정이나 하라구 해? 무엇하러 여기 왔어? 으슥한 구석에 들어박혀 술추렴이나 할 생각이냐? 왜 어슬렁거리면서 여기를 다녀?》

언제나 너그럽던 기사장의 얼굴에 떠도는 분노와 태호에 대한 무자비한 질책에 얼떠름해진 박동길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판자칸쪽으로 물러갔다.

하지만 흥분한 기사장도, 볼이 부어 서있는 태호도 그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고있었다.

《왜 여기 다니느냐 말이다?》

《기석동무 성구기 만드는걸 도와주느라고 그러오.》

《성구기는 무슨 놈의 성구기야? 주제넘게. 성구기가 완성되여 설계에서 공정을 준비하고있는 형편인데… 기업소에서 추진시키는 일을 방해할 작정이냐? 훼방하는가 말이다.》

《하던 일인데 줴버리겠어요? 하나의 창안인데.》

그러자 기사장의 너부죽한 얼굴, 주름잡힌 눈꼬리와 입가에 조소가 어리였다.

《창안은 둘째치고 강기석이는 지금 저질러놓은 탕크오작만 가지고도 더 추궁을 받아야 해. 해당 기관에서 조서가 넘어오고있단 말이다, 조서가! 국가재산이 그렇게 호락호락해보여? 창안이요, 혁신이요 하고 제기만 하면 아무데서나 받들어줄줄 아니? 명예가 공으로 생기는줄 알아? 수천금의 배상을 제가 어떻게 해? 손해본 시간은 어떻게 하고? 세상일이 다 그렇게 쉽게 되는줄 알아?》

태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숨을 가쁘게 톺았다.

《나도 같이 책임지겠소.》

《닥쳐라. 멍텅구리같은 소릴 줴치지 말구 이걸 걷어가지고 당장 돌아가라.… 그 주제에 당원이 되겠다구!》

그리고는 찌르는듯 한 눈길을 남긴채 지배인이 간쪽으로 걸어갔다.

태호는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는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 흥분에 떨고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처량했다.

하지만 판자칸쪽에서 슬금슬금 걸어오는 박동길의 얼굴은 그보다도 더 처참해보였다. 훤하게 잘생긴 얼굴은 피기없이 해쑥해지고 둥실한 눈은 정기를 잃어 퀭-했다.

푸르스름해진 입술엔 재가 내돋아있었다.

살얼음이라도 밟듯 다가오더니 주저하면서 멍청하니 서버렸다.

《제-기랄.》 하고 태호는 주먹을 쳐들어 제 무릎을 콱! 내리쳤다.

《진심으로 일해보겠다고 뛰여다니는 사람은 죄를 쓰고 겉발림으로 얼렁뚱땅 지내는 놈은 아무렇지도 않구… 이거야 어디!》

《누굴 보고 하는 소리요? 누굴 보고?》

반발하듯 허둥거리는 동길의 말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눈길은 여전히 퀭-하니 향방을 못 잡고있었다.

《누군 누구야. 그래- 그걸 말이라구 물어? 개자식이지. 바로 개자식이야.》

《어떻게 알았소?》 하고 박동길은 덜덜 떨면서 물었으나 이쪽은 제나름으로 흥분하여 기염을 토했다.

《뭐? 어떻게 아느냐? 그래, 제가 한 일도 모르겠나. 제가 한 일… 량심이 있는거지. 량심! 난 너절한 놈이지만 량심은 있어. 량심! 비렬한은 아니란 말이야. 이날이때까지 량심은 더럽히지 않았어. 이제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가서 말하겠어. 강기석은 잘못하지 않았다구, 잘못은 다른 놈한테 있었다구 다 털어놓겠어. 책임지겠단 말이다.》

《그건 무슨 소리요? 누굴 보고 하는 소리요?》

혼란에 빠진 박동길은 눈을 허둥거리며 물었다.

《누군 누구야. 개자식이지. 나야, 나란 말이다! 그 기초도안을 내가 만들었어. 내가 만들었단 말이다. 만들어놓고도 뒤일이 겁이 나서 웅크리고있었지. 바퀴새끼처럼 따뜻한 가마목에 엎디여있었단 말이야. 기석이가 그걸 들고다닌건 진심이였어. 공사를 하루라도 앞당기겠다고 나를 추동하다 못해 제가 발벗고나섰단 말이다.

조서가 넘어온대도 진짜 죄는 나한테 있는거지 그 친구한테는 없단 말이다. 량심이 없었던건 나고, 사상적으로도 진짜 나쁜 놈은 나란 말이다. 기석이는 일이 잘되게 하겠다고 뛰여다닌 죄밖에 없어. 난 비렬한이 아니야, 다 말할테야.》

기염을 토하고나서 헐썩거리며 맥이 진한듯 또다시 머리를 무겁게 수그렸다.

박동길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두손으로 머리를 부둥켜쥔채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거치른 숨소리만이 그가 거기에 있다는것을 나타낼뿐이였다.

둘이는 서로 자기 생각과 자기 흥분에 휩싸여 다른것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갑자기 안태호는 벌떡 일어서면서 목깃을 와락 풀어헤치고 부르짖었다.

《에익- 내 이걸 그저 몽땅…》

휘청거리며 한쪽으로 걸어가다가 멎어서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남비며 술병 등속을 왱강댕강 걷어싸쥐고 나갔다.

나가다가 생각난듯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일렀다.

《여어- 기석이 오면 도면은 오늘 밤중으로 다 해놓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르라구, 여기서 있었던 일은 그 친구한테 얘기하면 안돼. 들었지?》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도 더 믿음성있는 대답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박동길은 태호의 말도 그의 존재도 전혀 망각하고있었으나 태호는 그 침묵을 오히려 미더운 다짐으로 여기며 어둠속으로 멀어져갔다.…

이날 밤 박동길은 늦게야 돌아온 강기석이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저장탕크의 오작이 자기때문이였음을 털어놓았다.

강기석은 예상치 않은 고백에 얼떠름해지면서도 잘못을 알수 없어 안타까와하던 과학적인 근거가 명백해진것을 못내 기뻐했다. 억울하게 제재를 받았었다는 울분은 느끼지 못했으니 고통스러웠던 첫 시기는 지나간 뒤인데다 동길이의 솔직한 성품이 그를 못내 감동시켰던것이다.

광석덩이가 녹아 쇠물에 화합되듯 두 인간의 심정이 뜨겁게 부둥켜지는 그 어둠속에서 박동길은 오래전 허황한 처신으로 하여 그에게서 된욕을 당한 그때로부터 반감을 품고 엇서지낸 자기 잘못도 탄식과 함께 뉘우쳤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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