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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별열람

 

제 3 장

열 풍


3


김장철이 지나자 추위가 닥쳐왔다.

관모봉줄기를 넘어오는 서북풍이 거리를 휩쓸고 락엽을 흩날렸다. 먼산에는 눈이 내리고 수남천에도 살얼음이 빠듯이 건너갔다.

(이해도 다 가는구나.)

박운보는 이즈음에 와서 또다시 침울해진 아들을 두고 시름에 싸여있었다.

일요일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는 나들이옷을 차려입었다.

《어디 가시려우?》

거동을 살피던 김증녀가 궁금해서 물었다.

《수남집에 다녀오겠소.》

《무슨 일이 있수?》

홀깃 돌아보고는 대답하기가 성가신듯 덤덤히 신을 신고 나와버렸다.

장덕칠이네 아빠트근처에 이르러서는 걸음이 나가지 않았다. 뜨락에 서서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현관에 들어섰다.

(실뚱해하는 눈치면 웃어버리고말지.) 하고 그는 층계를 오르며 생각했다.

장덕칠은 마침 혼자 있었다. 젊었을적에 헤여졌던 친구라도 만난듯 반가와하는 바람에 박운보도 저으기 기운이 났다.

《다들 어디 갔는가?》

수다스러운 안주인과 만나지 않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건성으로 물었다.

《딸앤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 로친네는 어디 좀 나간 모양이요.》

늙은 마누라가 주책없이 텔레비죤구경 갔다는 말하기가 거북해서 그렇게 얼버무린다. 박운보는 담배를 붙여물며 우선우선했다.

《왜 요샌 통 볼수가 없구만.》

《그러지 않아도 내 며칠내에 찾아가려던 참이였소.》

《허어, 올 일이 있으면 진작 올노릇이지.》

방금전에 뜨락에서 자기도 자꾸 망설여지던 일을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그래두 운보형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너나없이 생각은 서로 비슷하다니까.)

어림쳐 짐작하면서도 나무랍게 말했다.

《우리들새에 무슨 어려워할 일이 있다구, 원 사람두.》

《운보형님심정이야 왜 모르겠소! 하지만 글쎄…》

장덕칠은 난처한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원 사람두, 어서 말하라구.》

집주인은 담벽을 쳐다보며 한참이나 꾸무적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요전에두 단단히 신세를 졌는데… 샤링그랑 철판교정기랑 쓸 일이 있어 좀 가야겠는데 일없겠수?》

박운보는 실망하여 눈을 내려깔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불었다.

(내 심정을 잘-두 안다!) 하고 그는 쓰거운듯 말없이 속으로 뇌였다.

《딱한 일인줄은 아우. 직장에서 수리기지를 자체루 꾸리는데 모두들 한가지씩 맡아나섰수. 아무래두 운보형님도움을 또 받아야겠소.》

《운수에서 수리기지 꾸린다는건 나도 알고있네. … 요긴한 일들인데 해줘야지. 그게 어디 개인의 일인가! 나도 직장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한테두 사상동원을 하겠네.》

장덕칠은 좋아서 입이 함지만 해졌다.

《이렇게 도와주니 나두 힘이 더 생기우.》

그렇게 말하고나서 미안쩍어하며 괜히 아래방을 건너다본다.

《이 사람.》 하고 박운보는 드디여 입을 열었다.

《자넨 사업때문에 날 만나려고 했지만 난 사사일때문에 자넬 만나러 왔네.》

《무슨 일이시우?》

《진작 온다고 벼르면서두…》

비오는 날 장인숙이를 구내길에서 만나 선통한 일도 있고 하여 박운보는 그렇게 운을 뗐으나 딸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장덕칠은 멍하니 뒤말만을 기다리고있었다.

《거 임자네 인숙이 어디 정한 자리가 있나?》

《아직 없수.》

《이전날 앞뒤집에서 살적엔 그저 롱으로 말했지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형님네 하고 사돈이 된다면 나두 더 바랄게 없겠수다. 그 애가 아직 철은 다 들지 못했지만 남한테 미움받을 일은 없는것 같수다.》

《허,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을 글쎄 재이기만 했다니.》

《나두 그런 생각은 진작 있었지만…》

말이 굳은 장덕칠은 그쯤까지 번지고는 그저 씨익- 웃을뿐이다.

결혼이란 당자들의 의향이 중요한만큼 아직은 말을 내지 말고 일이 되게끔 서로 조처하자고 의논이 되였다. 두사람이 만족하여 흉금을 털어놓는 판에 오갑녀가 들어섰다.

손님을 인사로써 반기고 집안의 안부를 물으며 장황한 말장단을 펼치려다가 남편의 든장질을 당해서야 치마자락을 너푼거리며 부엌으로 나갔다.

이날 저녁 두사람은 생배추내가 싱싱한 막김치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전 일들을 회상했고 자기들이 늙어가고 생활이 걷잡을새없이 달라지는데 대해 선망이 어린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운보가 거나해서 돌아간 뒤에 오금에 좀이 쑤시기라도 한듯 마누라가 올라왔다. 웃방에서 벌려놓은 이야기를 다 듣진 못했으나 흥겹고 각근한 분위기가 은근히 궁금중을 자아냈던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마누라에게 말하려던터이였으므로 장덕칠은 얼근한 목소리로 장한듯이 사연을 두루 말했다. 상을 치우며 귀가 박죽만 해져서 듣고있던 오갑녀는 어처구니없는듯 손벽을 탁 치고 주저앉아버렸다.

《잘하오, 잘해! 지금이 어느때라구 늙은것들이 술상머리에 마주앉아 자식들 혼사를 정한단 말이요? 지금이 어느때라구!》

마누라의 행동거지를 늘 마음싸게 여기지 않는 장덕칠이였지만 내리엮는 변설이 하도 탓할나위가 없었으므로 얼떠름해졌다.

《그래두 이런 일이야 남정들이 더 잘 알지.》

《그래 인숙이가 그런 자리에 갈것 같소?》

《자리가 어때서? 제강소에서 박운보라면 모르는 사람없이 다들 존경하는 어른인데…》

《제강소가 대수겠소! 아이를 거기서 끌어내자고 벼르는데 시집까지 거기 보내겠소?》

《아-니, 제강소사람하고 한평생을 살면서 제강소타발을 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어!》

천생 말이 없는 장덕칠이였으나 약주에 기운을 얻어 가장의 기세를 떨치며 로친네를 향해 눈을 부라리였다.

오갑녀는 힝하니 아래방으로 내려오긴 했으나 누그러들수 없어 푸념이였다.

《아이구, 어쩌문 저리두 답답하오. 생각한다는게 통… 무슨 육갑을 하는지 알다가두 모를 일이랑이.》

오갑녀는 분하고 억울하여 안정할수가 없었다. 말없는 남편과 사는것이 답답하다 하면서도 집안일을 온통 쥐고흔들며 늙어오는터에 이 근년에 와서 집안식구들이 번번이 자기 말을 등한하게 들어넘기는것이 은근한 불만이였다.

아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배군》이 되여버린것은 그렇다 하고 인숙이마저 제강소에 다니면서부터는 제나름으로 여물어가는것 같아서 또 걱정이다. 그 녀인에게는 어쩐지 말없이 지내는 령감이 아이들을 은근히 충동질하는듯 하여 속이 앙앙스러웠다.

《한뉘를 살아봐도 코막고 답답한 사람이야. 아는게 제강소밖에 없으니 사위까지 제강소에서 고르려고들지!》

가슴이 답답해지면 어디 가서건 털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것이 오갑녀의 성미였다.

이웃에 가거나 식료상점 혹은 국수바꾸러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붙잡고 하소연이였다.

《우리 인숙이사 나서는 혼처가 지내 많아서 야단이지비. 제강소에 다니는 박아바이까지 다 혼사말을 왔댔다오. 그 아바이사 글쎄 제강소사람치구 모르는이가 있소?… 그래두 내사 마음이 없지비. 더 좋은 자리두 지금 할지말지 하는데… 아들은 당원두 아니랍데…》

마주선 아낙네들은 그 말을 절반쯤밖에 믿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장단을 쳐주었다.

《그렇지 않구! 그 집 인숙이야 아무데 내세워두 빠지지 않지비, 삽삽하구 인사성 밝구, 일은 또 얼마나 잘한다구…》

그리고는 또다시 한입건너 두입으로 퍼져나갔다.

어느날 박운보가 일터에서 돌아오니 심란해 앉아있던 김증녀가 불쑥 묻는것이였다.

《수남집에 혼사말 갔던 일이 있소?》

이쪽은 요즘 새로 입고다니는 데트론모직저고리를 벗으려고 단추를 끄르다가 우뚝 손을 멈추었다.

《왜?》

《그런 일은 나하구 의논하면 못쓰우?》

수심에 잠겨 눈치를 살피는 안해의 그 한마디가 박운보의 마음을 찔렀다.

《무슨 일이 있었소?》

《남들까지 다 아는 자기 집 일을 나 혼자만 모르고 지냈으니 내가 이 집 사람이유 뭐유?》

《진소린 제-길, 어서 얘기나 하라구. 무슨 일이요?》

자기자신에 대해서까지 견딜수없이 화가 동한 박운보는 버럭 성을 냈다.

《기계방아 찧으러 갔다가 들었는데 뭐 혼사말이 있었답디다. 아버지얼굴을 봐서 거북한 말은 못했지만 당원두 아니구 말썽까지 많은 총각한테 시집보낼 생각은 없노라구 그 집 로친이 다니며 말하는 모양입니다.》

《아-니, 뭐가 어쨌어?!》

박운보는 당장 그 집으로 달려갈듯이 성이 독같이 나서 야단이였다.

《그 로친네는 그래 당원이던가? 한뉘를 말새만 피우며 돌아다니구, 우리 아들이 어때서? 젊어서 한때 들떠다닐수도 있지, 마음붙이구 일잘하는 아이를 어떻다구 시비질이여? 시비질이!》

《아이구- 이거 떠들긴 왜 떠드시우. 남들이 듣겠수다. 싫다면 그만이지, 사정하겠소? 싸움하겠소! 어서 저녁이나 드시우.》

환원기의 로처럼 열이 올라 펄펄거리던 박운보는 가스라도 분출하듯 거칠게 숨을 내뿜더니 시커멓게 식어지면서 무겁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로친네의 말에도 범상하게 대답하고 늦어서 돌아온 아들을 더욱 살틀하게 대해주면서 혼담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무렵에 철판과 볼트 등속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장덕칠이 제관장에 나타났을 때 인적없는 철근적치장근처에서 그를 만나자 마치 어려서 앓은적 있는 중풍이라도 도진듯 볼편을 덜덜 떨면서 흥분하여 떠듬거렸다.

《아니, 그래 임잔… 싫으면 싫다고 말할노릇이지 온 거리에 소문을 펴야 속씨원한가. 엉?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구… 소문을 펴야 씨원하겠군!》

《운보형님, 이거 무슨 일이시우?》

장덕칠은 담배라도 권하려고 어스벙거리던차에 된욕에 맞다들자 어리둥절해있을뿐이였다.

《내 워낙 찾아갔던것부터가 잘못이야. 좌우간 이렇게 된바치고는 나두 생각이 없네. 그 일은 아주 잊어버리게.》

《형님, 좀 진정하시우,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우? 난 통…》

《그렇게 모르겠거든 마누라한테 가서 물어보게. 임자가 그래 집에서 가장인가? 그 주제에 그래도 로동계급인가! 에끼 이 사람! 썩 물러가게.》

그리고는 철재를 실은 손수레채를 잡고 절단장쪽으로 끌어가면서 덧붙였다.

《이건 다 제대로 만들어보낼터이니 아예 내 눈앞에는 나타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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