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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열 풍


1


강기석은 박성국이라는 연구사를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찾아가서 연구사가 만드는 성구기를 보고 배우기도 할겸 또 자기가 완성하고있는 방법을 내놓고 토론도 하고싶었다. 필요하다면 자기가 새로 찾아낸 몇가지 문제를 연구사에게 알려주고 그가 완성하는 기계에 보탬을 줄수도 있을것이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성능높은 기계를 완성한다면 지금 애로로 되고있는 성구공정을 빨리 꾸릴수 있을것이였다.

구단광연구실의 건물에는 방들이 부족하므로 박성국은 이전날 미분탄공장사무실로 쓰던 건물에서 두칸을 얻어 실험실과 연구실로 리용하고있었다.

건물앞마당에는 자동차로 실어다놓은 원료무지가 있었다.

열려진 문으로 들여다보니 실험용인듯 한 작은 기계가 놓여있고 그곁에서 조수들이 일하고있었다.

방구석쪽에는 점결제와 분쇄한 연료가 쌓여있고 기계에서 가까운 곳에 빚어진 구단광알들이 무득했다. 그는 그것들에 호기심이 끌렸고 기계의 동작과정을 어서 보고싶었으나 우선 연구사를 만나 찾아온 사유를 말하여야 했다.

기석의 눈에 띄운 첫 사람은 혜영이였다. 곤청색작업복소매를 팔굽까지 걷어올리고 나이론수건으로 얼굴을 깊숙이 가리운 그 녀자는 벽옆에서 구단광의 락하강도를 시험하고있다가 문앞에 막아선 사람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낯익은 모습을 알아보자 더럽혀지지 않은 손등으로 턱밑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애매하게 웃었다. 거동은 침착했으나 어수선한 표정에는 그동안의 번민이 나타나있는듯 했다.

《무슨 일이예요?》

자기를 찾아온줄로 알고 일어서면서 물었으나 《연구사동지를 만나자고 왔습니다.》 하는 정중한 대답을 듣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일자리를 차지한다.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도 그 녀자의 온 신경은 강기석의 거동에 쏠리고있었다.

혜영은 요즘 생각이 많았다.

그날 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강기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를 뉘우치고 화해를 하려는지. 아니면 그냥 자기 고집대로만 나가려는지…

안타까와하며 마음을 조이고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저쪽 동무와 이야기하는 강기석의 말에 긴장하게 귀를 강구며 일손을 놀리고있었다.

키가 작달막한 그 조수는 안쪽으로 난 문을 열고 연구사에게 말을 전하고 돌아오면서 이제 곧 나온다고 알려주었다.

연구사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하던 일을 선뜻 놓을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석은 문앞에 서서 기다리고있었으나 이 시간이 무척 긴장하게 느껴졌다. 가슴속에 품고있던 말을 털어놓고나서 어설프게 헤여진 뒤로 만나기는 처음이였다. 그동안에 못내 괴로와하며 상대방의 심정을 더 두드려보고싶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나기를 은근히 바라던터이지만 정작 만나게 된 이 자리가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퍼그나 기다려서야 연구사가 나타났다. 맨머리바람이였으나 작업복 웃옷의 헤벌어진 옷섶사이로는 빳빳한 와이샤쯔의 깃이 하얗게 드러나있었다.

《오- 알만 한 동무로군.》

기석의 인사에 대답하며 미소를 짓고 방으로 청했다.

커다란 책상우에는 책들이 층층 쌓여있고 가운데에 연구과정을 기록한 자료가 놓였는데 그우에서 실험실용초시계가 기분좋게 재깍거리고있다.

모포를 포개놓은 쇠침대가 창밑에 놓여있었다.

《난 동무가 어디로 가던걸 기억하는데…》

《돌아왔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찾아왔소?》

《연구사동지가 성구기를 다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할겸 저의 도안을 보이고 방조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도안이란건?》

《접시형으로 성구기를 대형화하려고 했습니다.》

《접시형으로?》

의아하게 뇌이며 무엇인가 상기하려고 기억을 더듬는다.

《동무네 기사장한테 제기한 일이 있지?》

《예, 그렇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완성했습니다.》

내놓는 도안두루마리를 피끗 스쳐보았을뿐 받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기사장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해서 안된다는 법이야 없지. 그렇지만 좀 생각해야 할 문제요.》

박성국은 표정이 심중해지면서 말했다.

기석은 기사장이 어째서 그런 말을 돌렸을가 하고 생각했으나 아퀴는 짓지 못했다.

《기사장의 평가는 어떠했든간에 내 보기엔 동무가 창발성있는 기사요. 저번에도 무슨 장치를 상부에서까지 인정했다지?》

《…》

《그러니 더욱 심중해야 돼. 같은 문제를 두사람이 각이하게 연구하는 경우엔 나중에 가서 반드시 무슨 말썽이 생기는 법이요.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것을 표절했다느니 혹은 모방했다느니, 도와준다고 하면서 알맹이를 뽑아먹었다느니 그러루한 말썽이 얼마든지 생기오. 과학자들사이에서도 이런 문제때문에 시끄러운 경우가 많지만 현장에 있는 로동자나 기사들과 관계되는 경우엔 훨씬 복잡하고 난처해지오. 그리고 실태가 어떠하든지간에 연구사, 전문가가 도덕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오. 그런 현상은 한두번만 목격하는 일이 아니요. 그런만큼 나는 동무의 도안을 보지 않겠소. 후에 내 기계가 완성되여 사람들앞에서 최종시험을 한 뒤에 보기도 하고 도와도 주겠소.

며칠만 기다리오. 거의 완성되였으니…》

《저는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을겁니다.》

《그건 물론 옳은 생각이요. 또 누구나 다 그렇게들 말하오. 처음엔 일이 다 좋게 진행되지만 나중에 가서는 복잡해진단 말이요. 리기심과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소? 아니요. 지금은 안되겠소.》

기석은 어처구니없어 뗑하니 서있었다.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할수 없었다.

무엇이든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기탄없이 털어놓고 의견을 나누던 용해공들의 생활과는 너무나 먼 세계였다.

그는 구단광연구실의 연구사들속에서 이러루한 말을 들어본적은 없었다.

리해되지 않는다는듯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는 기사의 표정에서 그 심정을 짐작한 박성국은 마음이 께름해졌다.

과학자 일반이 그러하지만 이번에 특별히 조직적으로 파견되여온 과학자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생산현장에서 제기되는 로동자, 기술자들의 좋은 발기를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는 자각이 눈떴던것이다.

그러면서도 거의 완성되여가는 자기 연구사업을 덮어버리고 그것을 도와나설 용단은 내리지 못했다.

《얼마간 더 지체한다 해서 그 창안들이 없어지지 않을테니까. 동무, 나를 믿소!》 하고 그는 빙그레 웃었다.

강기석은 오히려 제쪽에서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책상우에서 도안지를 걷어쥐고 돌아섰다.

박성국은 바래우려고 함께 나오면서 말했다.

《이걸 끝내면 꼭 보아주겠소. 필요하다면 도와도 주겠소. 오해하지 마오. 난 여태까지 과학자로서 량심에 꺼리끼는 일은 하지 않았소. 남의 착상을 리용한적도 없고, 일단 남이 착수한 대상에 손을 대본적도 없소.》

마지막말은 강기석에게 불쾌하게 그리고 우습게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걸어나오면서 혜영이쪽을 보니 기계적으로 일손만 놀리고있다.

그러나 굳이 외면하고있는 처녀의 얼굴에 떠도는 랭담한 무관심성과 눈에 어린 불만의 흔적은 (동문 여전히 그 모양이군요!) 하고 그를 비난하는듯싶었다.

강기석은 그옆을 지나오면서 속으로 (그렇소. 난 언제나 이렇게 살겠소!) 하고 부르짖었다.

그가 문을 나와 걸어갈 때 등뒤에서 박성국이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친구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거참 유쾌한 경쟁자인데…》

혜영은 잠자코 있었으나 지금 박성국이도 강기석에 대해서 달갑게 여기지 않고있음을 뚜렷이 깨달았으며 그것으로 하여 생각은 더욱 깊어지는것이였다.…

박성국의 경우밝은 거절과 혜영이의 말없는 비난에 속으로 반발하면서 그곳을 나선 강기석이였지만 걸어가면서 곰곰히 생각하느라니 의지가 흔들리고 마음이 산란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전문연구사가 과제를 받아 하고있는 일을 자기가 따로 하고있다는 사실이 아무리 해도 주제넘은것 같고 께름했던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그 생각이 머리에 파고들기 시작하니 기분이 우울해지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제-길, 시시하군.》

자기자신도 연구사도 참을수없이 불만스러웠다. 완성해가던 도안을 덮어버리고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

작업장에서도 숙소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수 없었다.

《별사람을 다 보는군. 무슨 연구사가 그래!》 하고 태호도 못내 분개했으나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모르고있었다.

어느날 기석이 기초공사장에서 돌아오니 태호가 말하는것이였다.

《아버지를 만나봤나?》

《아버지라니?》

《기석동무 아버지가 오셨대. 방금전에 연구소에 있는 녀동무가 여기 왔댔어, 사촌누이 말이네.》

태호가 내주는 쪽지를 펼쳐보니 이렇게 씌여있었다.

《기석오빠, 아버지가 우리 집에 와계시니 곧 오세요.》

쪽지를 펼쳐든채 난처하게 서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

《글쎄, 아마 아들이 일을 잘하는가 알아보러 왔겠지.》

《괜찮군, 어서 가보라구, 오래간만에 오셨는데.》

《때를 잘 골라서 행차했군. 아들이 제재를 받았다는걸 아시면 기가 막히겠지. 게다가 무얼 해보자던 일까지 포기했다는 말을 들으면 실망해버리겠지. 허참.》

《그러지 말구 가서 적당히 얼버무리라구. 늙은이들한테 너무 괴로움을 줘서는 안돼.》

《딱하군.》

웃으며 그렇게 뇌였으나 마음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시름을 안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남의 집에서 옹색한 손님으로 앉아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니 모든 일이 답답하기만 했다.

주체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는 아버지니 제강소에도 들어가보자고 하시겠는데 어떻게든 잘 이야기해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제강소구내에 얼굴을 내놓기가 난처할터인데 아들까지 제재를 받은 형편이니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때를 잘 골랐다니까 하고 그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했다.

층계를 올라서 집앞에까지 오니 옥희가 문밖에 서있었다.

《우린 퍽 늦어서 올줄 알았는데…》

《요즘은 늦어질 일거리도 없소!》

웃으며 하는 말을 옥희는 알아듣지 못한듯 했다.

아버지는 널직한 아래방에 앉아있다가 들어서는 아들을 웃으며 맞았다.

《오신다는 기별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으음- 그래 몸은 어떠냐?》

《전 건강합니다.》

한쪽켠에 말없이 앉아있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여전하시다. 너희들 걱정만 아니면 아무 근심도 없다.》

아버지는 호기있게 말했다.

《너한테서 통 소식이 없어 앓지나 않나 하고 걱정했다.

제강소에서 하는 일이 알고싶던차에 네 일도 궁금하고 해서 겸사겸사 왔다.》

《시험생산은 크게 전진이 없습니다만 이제 얼마후이면 눈에 띄게 달라질겁니다.》

《나도 안다. 현장에도 나가보았고 너의 형편도 들었다. 일하다가 제재를 받았더구나.》

(벌써 모든걸 알고계셨구나.) 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아버지에 대한 새삼스러운 존경심을 느꼈다.

말없이 앉아있던 원병호가 놀라면서 물었다.

《아니, 저 사람이 제재를 받았소?》

강정민은 그 물음엔 아랑곳 않고 여전히 웃으며 계속했다.

《어제저녁에 도착해서 려관에서 자고 오늘 아침에 제강소에 나갔댔다. 당비서를 만나 공장형편도 듣고 네 이야기도 들었다. 잘하느라고 한 일이 잘 안된 모양이더구나. 비서도 퍽 아쉬워하더라. 어찌겠니. 사업이란건 책임한계가 있으니까 결과를 놓고 책임질줄도 알아야지. 괜찮다. 의기만 잃지 말아라. 의기를 잃지 말고 노력하면 돼. 일하느라면 그런 때도 있는거지.》

집주인은 눈살을 찌프리고 외면해버렸으나 기석은 호기심가득히 아버지를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령감이 괜찮은데. 오자부터 아들은 찾지도 않고 공장에 척- 나가는걸 보니, 제법이거던!)

강정민은 아들의 생각이나 집주인의 눈살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번 걸음에서 많은걸 느끼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시험생산에 대해서는 더 말할것도 없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내가 잘 아는줄로만 여겼던 사람들을 다시 알게 됐으니까.…

비서를 만나고나서 기사장을 찾아갔댔다. 같이 일하던 정도 있고 또 나한테는 등한할수 없는 사이였지. 난 사실 그 사람과 현장에 같이 나갈 생각이였는데…》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것이였다.

《… 물론 기사장이야 바쁜 몸이지. 다행히도 지배인이 생각해줘서 현장을 좀 다녀보았다.》

강정민은 담배 한대를 붙여물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지배인으로 말하면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또 나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할 근거가 많은 사람이지만 속심은 여하간에 내색은 안하고 말없이 다녀주더군. 속이 깊고 무게가 있는 사람이더라. 공장을 꾸려놓은걸 봐두 생각되는바가 많구…》

한쪽켠에 앉아 잠자코 듣고있는 원옥희는 그의 말속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은근한 비난을 감촉하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주인처럼 틀고앉아서 제할소리를 다하고있는 로인의 호기있는 태도에 미소를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강기석은 아버지의 말에서 남들에 대한 비난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끓어오르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지난날에 대한 개탄을 보고있었으니 바로 그러한 심정이 오히려 호기를 북돋고있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그는 아까와는 달리 마음이 무거워지는것이였다.

강정민은 생각에 잠겨 어조를 낮추었다.

《시험로의 로앞에서 엄학준이도 만났다. 오랜 로장이지.

내가 지배인으로 있을 때 관계가 좋지 않았어. 그 사람은 바른소리를 잘하는 사람이였는데 당회의에서 나를 비판한 뒤부터는 내가 은근히 트집을 잡았구 따돌리면서 괄시두 했지.

그 사람이야말로 나한테 좋지 않은 감정이 머리끝까지 뻗어있을 사람이지. 한데 그 사람은 내가 ㄱ철에 관심을 가지고 제강소에 찾아왔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속이 다 풀려서 누구보다도 반갑게 맞아주더구나. 고마운 일이지.

조업형편도 설명하고 이전날에 하던 시험생산과 비교하면서 차이도 말하고 지금 겪고있는 난관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난 그 말을 절반도 여겨듣지 못했다. 자기를 돌이켜보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더란 말이다.

그래 나는 그 사람과 마주앉아 이야기나 좀 하자고 오늘 저녁 여기에 청했다. 뭐 꼭 할 말은 없지만 그냥 헤여지기가 섭섭하더란 말이다.》

원병호는 생각에 잠겨 머리를 끄덕이였다.

강정민은 나직이 한숨을 짓고나서 하던 말을 맺었다.

《나도 인생을 두루 겪어보지만, 처지가 나아지는 때에 자기 금새가 나타나게 되고 처지가 못해지는 때에 남의 금새를 알게 되는 법이지.》

방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강정민은 담배 한대를 더 붙여물고 주인을 돌아보며 웃었다.

《옥희 아버지, 이거 내 말만 자꾸 해서 안됐소. 오래간만에 제 일하던 곳에 와보니 두루 생각되는게 많아서 좀 털어놓았소. 아들한테도 참고가 되라구.》

문간에 안주인이 나타나더니 저녁상을 차리겠노라고 말했다.

《가만… 손님을 청했다는데…》

원병호는 주저하듯 량쪽을 돌아보았다.

《손님으로 오셔서 손님을 청하다니 아버지도 어지간하십니다.》

기석이 그렇게 말하자 강정민은 웃으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아, 이 집에서야 내가 꼭 손님노롯을 할것도 없지. 그렇지 않소, 옥희 아버지?》

그 말에는 원병호도 어쩔수 없는듯 《아무렴, 그렇지요!》 하면서 히죽이 웃는것이였다.

《청하긴 했지만 이 사람이 오진 않을거요. 그러니 저녁을 차리시우다.》

녀주인을 향해 그렇게 말한 강정민은 옥희에게 일렀다.

《얘 옥희, 거 내 가방에 있는걸 꺼내오너라.》

옥희는 웃방에 올라가더니 인삼술 두병을 꺼내들고 내려왔다.

《아-니, 우리 집에 술이 없을가봐 이런걸 들고다니시우?》

마음이 고정한 주인은 그렇게 나무라면서 제 집 술을 내놓으려고 했으나 강정민은 여유있게 만류했다.

《오늘 저녁엔 기석이두 여기 와있는만큼 내가 주인노릇 좀 합시다.》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술잔들을 놓자 강정민은 녀주인과 옥희를 어서 오라고 불렀다.

녀주인은 일이 있어 부엌으로 나갔고 옥희도 어머니와 같이 후에 식사하겠노라고 사양했다. 그리고는 멀찍이 앉아 쓰거운 술을 달게 마시는 모습들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그들이 한창 마시고있는 때에 문기척소리가 나고 엄학준이 들어섰다.

《어서 오시우, 어서.》

《왜 이렇게 늦었소? 난 오지 않는줄로 알았는데.》

모두들 반기는 속에서 겸허하게 인사하며 들어선 로장은 사양하지 않고 상머리에 나앉았다.

《와주어서 고맙소, 로장동무. 우선 마시우. 후래삼배라는데…》

엄학준은 부어주는 술을 천천히 들이키고 안주는 집지 않았다. 주인이 두번째로 부어주는 술잔도 그렇게 내였다.

강기석은 로장이 이렇게 와준것이 못내 고마왔다.

《한데 일이 바빴던 모양이구만.》

강정민의 물음에 로장은 겸손하게 웃었다.

《지배인동지, 참 이렇게 부르는걸 량해하십시오.》

엄학준은 난처해했으나 강정민은 그의 소박성에 오히려 감동했다.

《…모처럼 청해주어서 고맙습니다만 사실 올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지나간 일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기석동무도 왔다기에 꼭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그렇게 허두를 떼고 로장은 기석이를 돌아보았다.

《나도 오늘에야 알았는데… 기석동무, 만들고있던 성구기는 어떻게 됐나?》

전혀 뜻하지 않았던 물음에 기석은 얼떠름해졌다.

《줴버렸다면서?》

그제야 묻는 뜻을 깨닫고 기석은 안도감을 느꼈다.

《줴버린것이 아니라 지금 박성국동지가 성구기를 거의 완성했기때문에 제건 그만두었습니다.》

《어째서?》

《한사람이 과업을 맡아서 하고있는데 또 다른 사람이 같은걸 한다는게 도덕적으로도…》

그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도덕적으로 어떻단 말인가? 체면을 차리구 누구의 낯을 내기 위한 도덕인가? 답답한 사람이군. 기석동문 로에서 용해공으로 일했지? 공부를 해서 기사가 되더니 선비님처럼 체면을 중하게 여기는군! 누가 동무를 공부시켰구 누구를 위해서 동무는 일을 하나?》

《…》

《ㄱ철은 위대한 수령님의 뜻이고 우리 당의 의도인데 수령님의 뜻을 받들고 당의 의도를 관철하는데서 네일내일이 어디 있고 개인의 체면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건 다 낡은 관념이고 케케묵은 생각이네.》

로장은 대답을 못하는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엄하게 꾸짖었다.

《두사람이 하면 어떻고 세사람이 하면 어떻단 말인가!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한사람만 믿고 앉아있을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떨쳐나서서 제가끔 만들든지 힘을 합쳐 만들든지, 여러곳에서 만들어 그중 좋은걸 선택하여 빨리 공정을 꾸려야 하지 않나! 여기에 무슨 애매하고 께름한 일이 있단 말인가!

중요한건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있는거지. 제 낯을 내자는 속심인가, ㄱ철을 빨리 완성하자는 사상인가?》

《…》

《우린 로행정에서 조작기준을 일정하게 만들기만 하면 3기 내지 4기로에서 동시에 하자는거네. 1기로에서 하기보다 여러곳에서 같이하면 좋은 궁리도 더 많이 나오고 경험도 풍부해질게 아닌가!》

기석은 어느덧 긴장해졌다.

《그따위 체면이나 도덕이 우리 일에 무슨 도움을 주나? 신념만 뚜렷하다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건 무슨 상관인가? 무슨 두려운 일이 있단 말인가! 자네가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됐나?》

호기를 부리던 강정민이 짐짓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해전 자기가 지배인으로 일할 때와 다름없는 로장을 보고있었으며 그것으로 하여 자기자신을 더욱 깊이 깨닫고있었다.

기석이도 입을 다물고있었다. 듣고보니 로장의 말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백했다.

자기로서는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산다고 믿었던 기석이였으나 지금 더듬어보니 약한 구석이 많다.

《긴말할것도 없네. 기석동무가 하는 일을 더욱 다그쳐야겠어. 기술을 모른다는걸로 우리도 너무 등한했는데 할수 있는껏 돕겠네.》

《고맙습니다.》

강기석은 감동하여 대답했다.

《실무적인 문제는 후에 토론하자구.》

그리고나서 엄학준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량해를 구했다.

《술상머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서 안됐습니다. 그런데 강아바이, 저를 청해주신건 고맙지만 용해공의 주량을 당할만 한 밑천은 있습니까?》

강정민은 상머리에 놓여있는 술병들을 가리키며 《이거면 충분하겠지. 40프로짜리요.》 하고 어정쩡하니 대답했다.

엄학준은 술 한잔을 들이키고나서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혼자서 마시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시치미를 떼고 하는 말에 강정민은 껄껄 웃었다.

《난 사실 엄동무 주량을 알수가 없었지.》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흰목을 보였다.

《우리 형님뒤에는 내가 서있으니까 어서들 마음놓구 마시우. 얼마든지 있소.》

모두들 유쾌하게 웃으며 생활적인 이야기로 즐거운 《만찬》 을 계속 했다.…

강정민은 이날 밤차로 떠나갔다.

바래우러 나온 아들에게 짤막히 이렇게 말했다.

《하루가 한생맞잡이라고 하더니 이런 날을 두고 한 소리지.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좋은 사람들속에서 일하니 그저 성실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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