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2 장

소원과 성취


18


장인숙은 어둠속에 까딱않고 앉아있었다.

잠을 깬 첫 순간엔 추위에 으시시하여 움직이기 싫었었다. 들려오는 말소리에 무심히 귀를 기울였었다. 콘베아운전실로 내려가는 층층다리로 통하는 문이 반나마 열려져있었다, 말소리는 그리로부터 들려오고있다.

차츰 귀에 익어가면서 말소리의 임자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호기심보다도 강렬한 그 어떤 흥분에 사로잡히면서 신경을 깡그리 그쪽으로 기울였다. 듣지 말아야 할 남의 말을 듣고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때로는 말소리가 잦아들어 전혀 들리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갈래가 짐작되였고 대화의 심각성이 마음을 그러잡았다.

(그런 사이였구나. …한데 저장탕크공사가 사달이였지.)

옷깃을 부여잡고 몸을 옹송그린채 그들의 관계가 어찌 되나 지켜들었다.

강기석이 결심을 피력할 때엔 너무도 흥분하여 손가락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였고 책이 떨어져내린것도 깨닫지 못했다. 보람없이 왼심을 쓰면서 녀자의 말소리에 귀를 강구었고 헤여져가는듯 한 녀자의 발자욱소리를 들으며 터질듯 한 가슴을 부여안은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층계에 통하는 문께로 걸어갔다.

청년은 불도 켜지 않은 판자칸앞에 서있었다. 철주에 높이 매달린 조명등이 움직이지 않는 그의 자태를 희미하게 비치고있었다. 어떻다 말할수 없는 련민의 정이 처녀의 가슴속에 북받쳐올랐다. 좁다란 공간을 뛰여넘어 그에게로 가고싶었다. 곁에 가서 그가 하려는 일을,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또 자기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그래도 힘자라는껏 도와주고싶었다.

문득 그 녀자는 몸을 돌이켜 작업장으로 통하는 저켠 출입문쪽으로 향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서 걸거치는 의자를 밀어놓으며 휴계실을 나서자 경간밖으로 내달렸다.

어두워지는 밖에서는 비살이 얼굴을 후리쳤다.

원료장건물과 저탄장사이의 길우에 녀자의 자태가 어른거리고있었다.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장인숙은 그쪽으로 총총히 뒤따라갔다.

교형기중기가 일하고있는 저탄장끝에까지 오자 멎어서고말았다.

(무엇하러 이렇게 간담, 무슨 말을 하려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구내간선도로를 바라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흥분때문인지 뛰여온탓인지 가슴은 아직도 후둑후둑 뛰고있었다. 갈림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멍청하니 서있는 그 녀자를 의아쩍게 돌아보군 했다.

《어째 여기서 비를 맞나?》

누군가가 다가와서 우산으로 가리워준다.

《나하구 같이 가자구.》

인숙은 대답없이 서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기상예보를 안 들었던게지?》

《전 후야근이였어요.》

《음… 그래.》

그 사람은 무심히 되받으며 그의 얼굴을 여겨보고 물었다.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니요.》

인숙은 생각없이 대답하며 걷기만 했다. 함께 가고있는 사람이 박운보아바이임을 알았으나 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걷자꾸나. 시간이 바쁘니?》

《아-니요.》

로인은 우산으로 살뜰히 가리워주며 걸었으나 처녀는 그것을 고마와할 경황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요새 집에 계시냐?》

《네-》

대답은 하면서도 무엇인가 자기 생각에 골똘하다.

차길건늠길을 넘어서자 장인숙은 불빛이 너울거리는 회전로작업장을 바라보며 우산밑에서 나섰다.

《전 저기 좀 가보겠어요.》

《비를 맞으며 어떻게?》

걱정스러운듯 걸음을 멈추고 박운보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버지보구 내가 한번 놀러 가겠다더라구 전해라.》

그 말에 대답하고 인사까지 했으나 비속으로 달려가면서 로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달려가는 서슬에 진창물이 튀여올라 치마자락을 온통 더럽히는것도 개의치 않았다.

6호로의 송풍기실앞을 돌아가다가 로체아래에서 박동길이와 맞띄웠다.

그는 방진모의 날개를 어깨뒤에 날리며 랭각기로 흘러들어가는 시뻘건 구단광의 흐름을 지켜보고있었다.

《로장아저씨 우에 계셔요?》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할딱거리면서 물었다.

《돌아가지 않았으면 운전실에 있겠지.》

시답지 않게 거들떠보고는 땅바닥에 떨어지는 구단광의 알들을 삽으로 긁어모은다.

이쪽은 층계로 가려다가 다시 돌아서며 그를 불렀다.

《참 동길동무, 일이 별나게 되는군요. 강기사하고 지배인동지 딸하고 친한 사인데 일이 심상치 않게 되는군요.》

《흥, 남의 일을 알기두 잘 아누만.》

조롱하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기심에 끌려 다가선다.

《누가 좀 타일러줘야지 일이 잘못될것 같아요.》

박동길이를 고깝게 생각했던 일은 잊어버리고 처녀는 걱정스럽게 하소연했다.

《저장탕크가 잘못된것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강기사를 믿지 않게 됐대요. 그들의 사이도 저장탕크때문에 헝클어지기 시작했어요.》

《무어-라구?》

갑자기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박동길은 흠칫 물러섰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 말을 나한테 하오. 왜 나한테 하는가 말이야?!》

장인숙은 눈이 퀭해졌다. 안타까와서 하는 말에 그다지도 펄쩍 뛰여오르는것이 뜻밖이였다.

《되지 못하게시리, 내가 어쨌단 말이야?》

후려치기라도 할듯이 삽자루를 그러잡으며 서슬이 푸르게 뇌까렸고 처녀는 뒤걸음쳐 물러서면서 구원이라도 청하듯 두리를 살폈다. 물기가 선뜩한 란간을 그러잡자 멸시에 찬 코웃음을 던지고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뛰여올라갔다.

운전실에서 처음 눈에 뜨인것은 계기판앞에 서있는 로장이였다.

문턱을 넘어서면서 곧바로 그에게로 걸어가던 장인숙은 방안을 둘러보더니 당황해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당비서와 함께 지배인이 거기에 있었던것이다.

비서는 용해공들과 나란히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고있었고 지배인은 창가에 서서 창문을 통해 로앞을 내다보고있었다.

장인숙은 한동안 어쩔바를 몰라 망설였으나 드디여 결심한듯 창문쪽으로 걸어가서 나직이 불렀다.

《지배인동지.》

최병기는 고개를 돌려 자기옆에 서있는 처녀를 찌긋하게 굽어보았다.

《지배인동지에게 좀 할 얘기가 있습니다.》

최병기는 눈섭을 치켜뜨고 얼떠름해하면서 돌아섰다. 함초롬히 비에 젖고 흥분으로 하여 눈이 휘둥그래진 이 처녀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던것이다.

《나한테 말이요?》

지배인이 그렇게 묻자 장인숙은 저으기 자신을 잃고 망설이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네-》

로장은 호기심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인숙이를 바라보는데 지배인은 영문을 알수 없다는듯 비서쪽을 흘끔 돌아본다. 그리고나서 《무슨 일인데?》 하고 묻는다.

《좀 조용히 얘기해야겠어요.》

장인숙은 주저하는 자신이 못마땅한듯 새침해서 말하고는 앞장서서 교양실로 향했다. 최병기는 (이게 원일이냐?) 하는듯 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나서 눈을 슴벅이며 뚜벅뚜벅 따라선다.

텅 빈 교양실안에 마주앉고보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처했다. 비내리는 창문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뗐다.

《전 사실 너무나 안타까와서 누구한테나 얘기하자고 했어요.

제 보기엔 혜영동무가 잘못 생각하는것 같아요.…》

더욱더 어리둥절해지는 지배인의 표정을 스쳐보자 장인숙은 오히려 침착해지는것이였다.

혜영이의 하소연이며 강기사의 대답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관계되는 말이 나오자 남자의 태도가 오히려 의젓해지더라는것, 자기는 여태까지 강기사를 그저 지식있고 마음좋은 청년으로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 주대가 있고 말도 열정적으로 하고 그러면서도 도량이 큰 사람이더라는것, 그런데도 혜영동문 그 사람을 제나름으로 돌려세우려고 발전에 유리한데로 가야 한다느니 제강소에 있어서는 안된다느니 시키지 않는 일에는 뛰여다니지 말아야 한다느니 설복하다가 가버리더라는 등의 전말을 자기식으로 흥분하여 전했다. 말을 마치고나서야 지배인쪽을 돌아보았다.

최병기는 허리를 구부정하니 웅크린채 주먹으로 관자노리를 고이고 무겁게 앉아있었다. 사납게 찌프린 량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있는데 얼기설기한 책상다리아래를 보고있는 두눈에는 의혹과 불만이 층층 어려있었다. 하여 인숙은 지배인이 여태 자기 말을 듣고있은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생각을 더듬고있는것인지 료량할수가 없었다.

최병기는 듣고있었다.

딸과 나눈 이야기가 있었던만치 처녀가 하는 말뜻을 가늠하고있었다.

딸이 강기석이라는 청년과 친한 사이임을 알았을 때 그는 불만이였고 그 불만을 딸에게도 알아들을만큼 털어놓았었다.

허나 지금 전혀 알지도 못하던 공장처녀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기 딸을 나무라며 딸이 했다는 말을 되풀이했을 때 그는 그 말속에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을수 없었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그 누가 강기석이와 자기 딸과의 관계를 꺼들고 그를 비난하여 나섰다면 최병기는 거침없이 반박했거나 혹은 무시해버리고말았을것이다.

하지만 이 처녀는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편견없이 공정하게 처리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아버지인 자기에게 호소하는것이였다.

상관할바가 아닌 남의 일에 분별없이 뛰여다니는듯 한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이 사랑스러웠고 흥분으로 하여 조리없이 엮어대는 말에서 느껴지는 꾸밈없는 진실이 그를 감동시켰다.

비에 젖어 호졸곤했어도 커다란 눈에 정기를 띠우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 처녀가 기특하게 생각될수록 자기 딸이 불만스러웠다.

강기석에 대해서는 시야가 좁은 처녀의 순진한 눈에 비쳐진대로 볼수는 있었지만 무시할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것만은 어림했다.

그것은 여하튼간에 그는 지금 딸에 대해서, 딸의 모습에서 나타난 자기자신에 대해서 불만에 싸여 더듬어보고있었다.

자기 생각에 깊이 파묻혀있은 최병기는 이야기를 다하고난 처녀가 말없이 앉아있는 자기를 서름서름하게 바라보며 어쩔바를 몰라하고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전 돌아가겠어요.》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주저하며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깨달았다.

무겁게 한숨을 짓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괴로움이 고인 눈길을 들었으나 운전공쪽은 외면하고 나직이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소.… 동무.》

문밖에 나와 헤여지면서 층계의 휴단우에 잠시 멈추어섰을 때 최병기는 어색한 미소를 띠우고 물었다.

《동무이름이 뭐드라?》

《장인숙입니다.》

《어느 직장에서 일하지?》

《회전로직장 원료장입반 평량차운전공이예요.》

《그래…》

의미없이 뇌이면서 사람들을 너무 모르고있다는 생각으로 하여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그 한숨속에는 방금 들은 사실에서 나타난 자기자신에 대한 자책도 어리여있는듯 했다.

《고맙소, 장인숙동무.》 하고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소!》

심중해진 지배인의 태도와 진정이 넘치는 치하로 하여 장인숙의 마음은 금시 따뜻하고 명랑해졌다. 박동길이와의 사이에 있었던 조금전의 일같은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층계로 내려간 처녀는 랭각기아래서 일하고있는 동길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비오는 어둠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는 교대를 위해 작업장으로 갈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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