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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소원과 성취


17


벨트콘베아운전실로 내려가는 급한 층층다리를 사이에 두고 판자로 둘러막은 어수선한 칸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에 구단광계통을 새로 꾸릴 때에 현장에서 침식하는 성원들을 위해 지어놓은 휴계실이였다.

원료장경간안에 있는 집이였으므로 네면을 널판으로 대충 붙였고 출입문과 창문은 구멍만 뻥-하니 뚫렸을뿐 문짝들은 없었다. 진작 뜯어버릴것이였지만 누구도 거기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탓으로 여직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요즈음엔 강기석이 그 칸을 리용하고있었다.

곁에 있는 운전작업반의 교양실과는 지하장입기까지의 깊숙한 공간으로 갈라져있고 층층다리로는 수리공들이나 간혹 다닐뿐이여서 그곳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조용했다.

벌써 여러날째 그는 현장에서 작업을 마치고는 필요한 수첩들과 참고서와 도안지들을 꾸려들고 이곳에 와서 붙박혀있었다. 대형성구기의 구상을 완성하고있었던것이다.

며칠전에 한 동무로부터 구단광연구실에서 녀동무가 전화로 찾더라는 말을 듣고 그것이 혜영임을 알았으나 만나러 가진 않았다. 만난대야 지금형편에서는 이야기할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심정도 경황도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로 그 녀자가 이곳에 나타났던것이다.

《여기 어디에 있다길래 원료장 구석구석을 다 찾아다녔어요.》

문간에 서서 책상 비슷한것이 덩실하니 놓여있는 어수선한 방안을 둘러보고 어설프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스름속이였으나 그 녀자의 얼굴이 해쑥해진것이 유난히 눈에 띄였다. 마치 중병이라도 앓고난 사람같이 쌍겹이 진 눈시울밑에서 커다란 두눈이 아직도 열기를 간직한듯 고요히 번쩍였다.

강기석은 말없이 서서 처녀의 달라진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여길 알았소?》 하고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들어가자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방안》이였다.

《합숙에 같이 있는 동무가 알려주더군요.》

태호는 몇번 다녀갔었다. 찾아와서는 묵묵히 앉아있다가 한숨을 짓고 돌아가기도 하고 강기석이 하는 일을 이것저것 거들어주면서 토론도 하군 했었다.

그러니 혜영은 합숙에 찾아갔던 모양이다.

강기석이 묻는 연구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몇마디 대답하고나서 말했다.

《인젠 돌아가지 않겠어요? 난 할 얘기가 있어요.》

눈을 내려뜬채 힘없이 웃었다.

기석은 오늘 저녁까지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주저했다. 그에게는 실로 한분한초가 귀중한터이였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되겠소?》

《글쎄 이게 뭐예요. 로동자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고… 여기서 매일같이 일한다 해서 누가 알아주기나 해요? 시키지도 않는 일을…》

《내 마음이 우러나 하는 일이니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괜찮소.》

《그래도 무슨 보람이 있어야 할거 아니예요. 열매가 맺어지고.》

《쓸모있는 일을 한다면 보람도 생기겠지.… 어쨌든 이건 꼭 훌륭하게 될거요. 난 자신을 가지고있소.》

처녀는 그저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가시여지는 입가에는 서글픔이 어리는것이였다. 다행히도 어스름속에서 그 표정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강기석은 그 녀자를 고무하려는듯 말을 계속했다.

《지금 금속공업이나 다른 공업에서 대체로 중형성구기를 리용하고있소. 그것들의 중량이 보통 몇십톤이라는것을 고려한다면 그 이상 되는 무거운 중량의 접시형성구기가 편중과 고장이 없이 지속되는 작업을 할수 없으리라는것은 자명한 일이요. 따라서 접시형으로는 대형성구기가 불가능하다는 리론이 나왔던거요. 성구용량을 더 크게 하려면 동력을 더 많이 써야 하고 이에 따라 치차며 축과 같은 다른 설비들이 모두 커져야 하기때문이요.

하지만 난 각이한 성구기들의 성능과 기술자료들을 분석비교하여 연구하는 과정에 그 어떤 원리라 할가… 합법칙적인 요인을 포착했소.

전동기 하나를 리용할것이 아니라 용량이 작은것 두대를 병렬로 리용할수 있을것 같소.

설비의 편심도 없어지고 치차며 감속기들이 모두 작아지기때문에 전기를 적게 쓰면서도 성능은 아주 좋아질거요. 이건 전혀… 난 계산도 새로운 방식으로 했소. 한번 보겠소?…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오?》

대답이 없었다.

혜영은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있기라도 하듯 란간아래로 깊숙한 아래쪽, 불빛이 새여나오는 밸트운전실어름에 눈길을 두고있었다.

《난 동무가 만드는것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것도 어차피 빛을 보지 못할것 같아요.》

《혜영동무, 그건 걱정마오. 이건 틀림없이 완성되오.

난 모든 자료들을 검토했소. 이젠 실무적일들이 남아있을뿐이요. 지식이 딸리는데다 없는 시간을 짜내서 하다나니 시일이 좀 걸리겠지만 이제 두고보우. 꼭 되오.》

《그건 동무의 생각뿐이예요.》 하고 처녀는 어쩔수 없다는듯 웃었으나 웃음이 사라지는 눈에 쓸쓸한 빛이 어리는것이였다.

《대형성구기는 거의 완성되고있어요. 동무도 알지요? 박성국이라는 연구사 말이예요. 진동식으로 착상했는데 지금 여기서 기대를 제작하고있어요.

자기네 연구소에서 실험실적과정을 다 끝내고 왔는데 성능이 좋더군요.》

기석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을뿐이였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충격이였다.

《난 동무를 괴롭히려고 이 말을 한게 아니예요. 나도 요즘은 그 일을 도와주면서 여러가지로 관찰해봤는데 그건 어김없이 성공될거예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기석은 아직 마음속의 파문을 수습하지 못하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나에겐 괴로운 일이지만 사업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지요. 지금 절박하게 나서는 문제가 성구기의 대형화인데…》

《동무의 일은 어쩐지 잘되지 않는군요.》 하고 혜영은 심란해서 말했다.

《난 동무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처음엔 자진하여 돌아왔다는 동무의 말이 믿어지질 않았어요. 누구나가 승급하고 발전하기를 원하며 등용되기를 바라고 하다못해 중앙기관간부들의 안중에 드는것만도 큰 자랑으로 여기는데 그런데서 일하는것을 뿌리치고 내려왔다는게 전혀 리해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건 다 사실이였더군요. 성구기를 만들려고 내려왔다면 그래도 그것까진 리해하겠어요. 그런데 자기 직장에서 맡았다고 해서 전공분야도 아닌 일을, 더군다나 기업소일군들이 안된다고 만류하는 일을 소란을 피우며 벌려놓을건 뭐예요! 쓸데없는 공명심이지요.

그래도 난 동무 일이 무사하게 처리되게 하려고 애를 썼어요. 아버지한테까지 말했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진…》

강기석은 듣고있다가 괴로운듯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흥분한 그 녀자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물론 아버지를 탓할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전 아버지를 원망했어요. 동무때문에, 동무를 생각해서…

동무가 제재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몹시 괴로왔어요.…》

말은 담담하게 했으나 가슴아픈 그 심정은 지금도 창백한 얼굴에 우울하게 남아있었다.

무쇠로 부어놓은 사람처럼 컴컴한 얼굴로 말없이 서있는 기석의 모습을 쳐다본 혜영은 동정심이 북받쳐올라 눈섭을 찌프렸다.

《그렇지만 동무를 원망하고 동무를 괴롭히려고 이렇게 찾아온건 아니예요.》

가슴에 서린 사연을 털어놓기 어려운듯 한숨을 지었다.

《돌아가지 않겠어요? 함께 거닐기라도 합시다.》

기석은 자기 표정을 더듬는 그 녀자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기 상념이 뻗어있는듯 한 어둠속 공간을 바라보고있었다.

《기분도 전환할겸… 어디로든 갑시다.》

《용서하오, 혜영동무. 난 지금 그럴 기분이 못되오. 여기 혼자 있게 해주오. 남아서 조용히 생각도 하고 일도 좀 해야겠소.》

처녀는 잠시 생각해보고나서 선선히 응했다.

《그럭하세요. 그럼 나도 여기 좀더 있다 가겠어요. 괜찮아요?》

이쪽은 수긍하듯 잠자코 있었다.

《일을 더 하겠다는건 타성이겠지요. 아마… 해오던 일이니까. 하지만 그 성구기는 이젠 그만두세요.》

《…》

《실패가 곧 불행인것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것이 불행이라고 하더군요. 보람없는 일에 정력과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있겠어요?》

《…》

《나도 그동안 여기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경우를 당해보았어요. 이 공장에서 일하는것이 동무에겐 어느모로 보나 불리할것 같아요.

자기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인데 동무에게도 생각이 있겠지요. 난 사실 이 일을 의논하고싶었어요. 정말이지 요즘은 마악- 잠이 안와요.》

청년은 그 진정에 감동된듯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띠염띠염 입을 열었다.

《고맙소.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없소. 성구기가 불필요하다면 다른것을, 비록 작은것이라 해도 만들어놓고야말겠소.》

《그건… 공명심이예요.》

처녀는 유감스러운듯 부드럽게 지적했다. 그 말에는 개의하지 않는듯 기석은 자기 말을 이었다.

《나는 공장지구에서 자랐고 이 제강소에서 생활을 시작했소. 로동하면서 공부했고 기사가 됐소.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긍지로 여기오.

지금 여기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당중앙의 커다란 관심속에 거창한 사업이 벌어지고있는데 이 뜻깊은 사업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기사이고 내 생활의 보람과 긍지를 어디 가서 찾겠소.》

《동무의 말이 리해돼요. 그렇지만 다른 문제도 고려해야 해요. 강동문 여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있을뿐아니라 여기 사람들은 동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혜영은 아버지도 그런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만두었다.

《…난 그게 분해요. 무엇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데서, 자기 발전에 불리한 곳에서 고달프게 일하겠어요! 자존심도 없군요.》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은 나에게도 있소.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자신을 제고시키기 위한 노력속에서, 생활을 통하여 보여주겠소. 오로지 이 길에서만이 진실로 존엄있는 인간으로 될수 있는거요. 아무런 창조적지향도 없이 공연히 직위나 대우에 모욕감을 느끼며 불만을 가지는 속물적인 자존심은 나에게 인연이 없소. 그렇소. 그런 속물적인 인간들을 나는 멸시하오.》

행길쪽으로 난 출입문으로 바람이 들이닥쳐 운전반교양실의 열려진 문을 건드리고 머리우에 뽀야니 먼지를 일으켰다. 어디선가 쟁강- 유리가 떨어져나갔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난 의논하러 온거지 말다툼하려고 오진 않았어요.》

처녀는 간청하듯 말했다.

《큰일은 아니지만 저장탕크작업에서의 실패가 동무에게 아주 불리한 일로 됐어요. 제재를 받은것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예요. 동무의 포부며 능력에 대해 의혹을 품게 했어요. 사람들이…》

혜영은 기사장과 나눈 짤막하고 충격적인 대화를 상기했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예요. 거듭되는 실패도 있을수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전혀 다른 생활과 련관시켜 생각한다면 난처한 립장에 빠질수 있어요.

이런 말 하는걸 용서하세요. 난 동무를 믿기때문에, 나도 너무나 안타까와서 하는 말이예요.

여기 사람들은 동무의 아버지에 대해 그닥 좋지 않게들… 인식하고있더군요.》

자기 말이 주게 될 불쾌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덜어버리려는듯 처녀는 말마디를 고르며 가까스로 털어놓았다. 마음속에서 생각하던 일을 다 말하지도 못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죄송스러운듯 이쪽의 표정을 엿보았다.

경간사이를 밝히는 조명들의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기석의 자태는 침착하고 태연했다.

《혜영이, 고맙소. 동문 무척 하기 어려운 말을 해주었소. 나는 그 말을 리해하오. 동무가 다하지 못한 말도 짐작되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에 대해 알고있고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는것도 더러 알거요. 우리 아버진 한때 여기 지배인으로 일했소. 욕망은 컸으나 능력이 부족하고 지식도 기술도 안받침되지 못하다나니 허영심이 강한 공명주의자로 인박아놓은것 같소. 그건 모두 어쩔수 없는 사실이였소.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에 대해 말할 때 그 부모들을 생각하며 부모들의 사람됨을 보면서 그 자식들에 대해 생각하오. 이것 역시 우리 생활에 인박힌 어쩔수 없는 관념이요.

이런 관념으로 볼 때 나의 처지가 더욱 불리하다는 동무의 말은 전적으로 옳소.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있소.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일하겠소. 나의 노력으로, 창조적능력과 의지력으로 그러한 관념을 깨뜨려버리고 깨끗이 해소시켜버릴 작정이요. 허영심과 공명심은 나에게도 있었소. 하지만 나는 자기자신속에서 그것을 깡그리 질식시키고있소.

아버지의 생활에서 받은 교훈은 나를 위축시키는것이 아니라 분발시키고있소. 나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제고하도록 자극하고있으며 고무하고있소.

나는 여기서 일하겠소. 적어도 나의 노력으로 나에게 주어진 불리한 관념들을 가셔버리기 전에는 아무데로도 가지 않겠소.》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은 그전과는 다르오.》

《…》

침묵은 너무나도 오래 지루하게 계속되였다. 하지만 두사람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기석은 흥분에 싸여있었기때문이였고 혜영은 또 자기대로 생각에 잠겨있었기때문이였다.

《전 동무를 믿고싶어요. 그러기에 동무를 리해하려고 노력해요. 동무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여기서 어디로도 가지 않겠다면… 그건 좋을대로 하세요. 나도 수긍하겠어요.》

처녀는 눈길을 떨어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기가 한 말이 진작 하고저 했던 말이 아니였음을 깨닫고 불안을 느꼈던것이다.

청년의 확고한 의지에 부딪쳐 자기가 허둥거리고있음을 의식하면서 미간을 찌프렸다.

《그렇지만 지난날처럼 그렇게는 처신하지 마세요. 무엇때문에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하겠다고 뛰여다니며 안되는 일을 맡아나서서 다른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리고 말밥에까지 오르겠어요. 사서 이런 고생까지 하게 되고…

동무는 지식도 체험도 있는만큼 맡겨진 일만 성실히 한다면 얼마든지 발전할수 있어요.》

강기석은 서글프게 웃었다.

《날더러 좋은 생활이 보장되여있는 직급의 층계를 톺아올라가라고 권고하지만 난 그걸 바라지 않소.

난 마련된 생활을 누리는데서 만족과 보람을 찾기보다는 흘륭한 생활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속에서 보람과 만족을 찾고싶소.

그것을 위해서라면 맡겨진 일이건 맡겨지지 않은 일이건 가리지 않고 하겠소》

《말은 다 옳지만 생활은 그렇지 않아요.》 하고 말한 혜영은 자기들의 이야기가 지내 버그러지는것을 저어하면서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타일렀다.

《너무 자기만을 고집하지 마세요.

그것때문에 동무에 대해 호의를 품고 도와주던 사람들까지 멀어지고있어요. 기사장동지만 해도 그렇지요!》

《난 값싼 호의나 누구의 비호를 받으면서 살고싶지 않소. 차라리 그런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자기 주견에 따라 떳떳하게 사는것이 더 행복하오.》

흥분에 싸여 준엄해지고 그러면서도 태연해보이는 강기석의 자태를 일별하고나서 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앞에 있는 강기석은 자기의 심장속에 여태까지 자리잡고있던 재능있고 성실하고 너그럽던 그 청년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완고하고 생소한 사람인듯 한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그 녀자는 마음의 안정을 잃었고 더욱더 불안에 휩싸여버렸다.

청년은 자기의 변함없이 완강한 성미로 하여 예상할수도 없는 사나운 길로 줄달음쳐가는데 혜영이, 자기로서는 그와 더불어 돌진할 용단도 없었고 그를 만류할 수단도 방법도 없을것만 같았다.

불안과 번민에 지쳐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난 내가 하는 말이 다 옳다고는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동무도 자기자신을 좀 돌이켜봐야 해요.》

기분없이 그렇게 말을 시작한 그 녀자는 철주아래의 희미한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가 별스러이 울리는것을 꺼리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담담하게 계속했다.

《동무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 해도 나를 생각해서, 내가 바라는것을 들어주는셈치고라도 다시 생각해보세요. 동문 내가 바라는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후에라도 내 충고가 옳았다는걸 인정할수도 있잖아요!》

처녀는 어딘가 한옆을 바라보고있는데 생각에 잠겨 쓸쓸해진 커다란 눈에 한가닥 기대가 어리여 그윽하게 빛났다.

강기석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소리없이 무거운 한숨을 짓고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혜영동무의 소원은 나에게 귀중하오. 나는 있는 힘과 진정을 다해서 동무가 소원하는바를 이루어주고싶소. 하지만 그건 전혀 다른 문제요.…》

말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뜻은 단호했다.

그것은 그들사이의 인연을 위태롭게 하는 말이였지만 그로서는 더 다르게 말할수가 없었던것이다.

혜영이도 그것을 느끼고있었다.

자연의 정취에 취해 수풀속을 걸어가던 사람이 문득 발부리앞의 낭떠러지를 보았을 때처럼 처녀는 숨을 죽이고 발앞을 굽어보고있었다. 마치도 경간사이의 어둠속에서 측량없는 그 깊이를 헤아려보려는듯이…

무거운 침묵이 오래동안 그들사이를 휩싸고돌았다. 그들은 서로가 그것을 깨뜨리기 저어하였다.

마치 여태껏 모르고 지내던 깊은 심정을 더 건드리는것을 삼가하듯이…

이윽고 혜영이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우린 너무 흥분했던것 같아요. 서로 리해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고… 후에 또 이야기하는게 어때요?》 하면서 그 녀자는 강기석을 쳐다봤으나 곧 눈길을 피했다.

이쪽은 산란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힘주어 진지하게 말했다.

《생활해가느라면 우린 서로 더 깊이 리해하게 될거요. 나는 그렇게 믿소.》

《그래요. 더 깊이…》

처녀는 메아리처럼 뇌이면서 간간이 들려오는 평량차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가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 말은 원료장지붕밑을 스쳐간 바람소리마냥 공허하게 울렸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낀듯 혜영은 찌프린 눈길로 아래를 살펴보더니 《전 가보겠어요.》 하는 말을 남기고 란간을 에돌아 출구로 걸어갔다.

콩크리트바닥을 울리며 멀어져가는 또렷한 구두발자욱소리를 여겨들으며 강기석은 박힌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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