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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소원과 성취


10


기사장이 도안을 들고 지배인실로 가버린 뒤에도 강기석은 오래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흥분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자기를 남달리 리해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던 사람, 자기도 못내 존경하고 믿어오던 기사장과의 사이에 충돌이 있은 뒤라 마음이 불안했다.

자기가 도의에 어긋나게, 불손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하고 방금전의 일들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이제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르게는 처신할수 없을것이다.

기사장이 아버지말을 꺼낸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동원되여 일하라는 지시를 받고 기사장을 찾아가서 가지 않겠노라고 제기했을 때에도 설복하던 끝에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고보면 기사장은 그를 자기 의사에 따라 굽혀놓으려고 할 때면, 또 그가 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마다 바로 그 점을 건드렸던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노라니 기사장에 대한 의혹과 함께 불만이 더욱 뚜렷해지는것이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제진장치에 대한 자기의 구상을 좋다고 하다가 지배인이 부결하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일이 떠올랐다.

박동길이 원료장벽체공사를 날림식으로 해치웠던 때의 일도 생각났다. 그때 그는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기사장은 아들때문에 늘 마음고생을 하는 박운보로인을 생각해서라도 말썽없이 처리하자고 하면서 제관품의 수정을 그에게 맡겼었다. 그는 기사장이 정말 인정있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감탄했었다.

그랬기때문에 지배인에게서 호된 추궁을 받는 마당에서도 기사장을 거들지 않았었다.

그 일에서 기사장이 끝내 침묵을 지킨것으로 하여 그는 설계실이며 기술과로 분주히 뛰여다니지 않으면 안되였고 나중엔 6호로의 로장에게서 톡톡히 비판을 받았었다.…

이제와서 보면 기사장은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면 인정깊고 너그러운 호인이지만 일이 뒤틀리고 책임을 따지게 되는 마당에서는 몸을 사리거나 전혀 딴사람이 되기도 하는것이다.

믿고 존경해오던 사람이 여태껏 자기가 생각하던바와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것은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싶지도 않았거니와 어물어물 적당히 지내고싶지도 않았다.

그는 기사장과의 사이가 장차로 어쩔수없이 첨예해지리라는것을 예감했으며 따라서 자기 처지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주먹으로 이마를 고이고앉아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지배인이 찾는다는 전달이 왔다.

기사장까지 랭담하게 반감을 품고 대하는터이여서 제기한 도안이 접수될 가망은 보이지 않았으나 포기할수도 없었다.

흥분을 진정시키느라고 무겁게 닫겨진 지배인실문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최병기는 늘 그러하듯이 무뚝뚝한 표정이였다. 들어선 사람을 치떠보고도 읽던 문서를 번지고있었다.

공사도면은 책상 한켠에 밀려나있었다.

기석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지배인은 안경을 벗더니 다 읽은 문서를 서류철우에 올려놓고 팔을 뻗쳐 도면을 끌어당겼다.

《이걸 동무가 제기했다지?》 하고 지배인이 물었다.

기석은 공사의 취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들었소.》

최병기는 무뚝뚝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기석은 입을 다물었다. 내키지 않아하는 지배인의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것이였다.

제진장치의 도안을 들고 지배인을 처음으로 찾아왔던 때였다.

그때에도 지배인은 책상앞에 앉아있고 그는 지금처럼 서있었다.

그때에도 최병기는 무뚝뚝한 표정이였고 그는 못내 긴장된 심정이였다.

한가지 다른것은 그때엔 지배인이 물부리에서 빠지지 않는 담배꽁초를 송곳으로 쑤셔내며 그의 말을 듣고있었다면 지금은 그 짤막한 호박물부리가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것이였다.

최병기는 그옆에 있는 도안을 눈을 찌프리고 바라보고있었다.

《의도는 좋은데… 문제가 간단하지 않소.》

드디여 최병기가 입을 열었다.

《지금 숱한 로력과 중기계를 쓰면서 일을 벌려놓고 공정을 맞물려놓았는데 그걸 중지하고 새 일판을 벌려놓는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요. 시간을 앞당기는건 좋지만 담보가 문제란 말이요. 담보!》

《자료는 철저히 검토했습니다.》

《구조물의 중량이 대단하지.》

《계산되여있습니다.》

《나두 봤소.》

《여러가지로 토론했는데 자신이 있습니다.》

《흠!》 하고 지배인은 분명치 않게 뇌였다.

《공사에 대한 책임은 창안자보다도 국가앞에서는 비준한 사람이 지게 되오.》

(그때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지. ) 하고 강기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더구나 굴착을 시작하기 전이라면 몰라두 지금은 작업이 한창이란 말이요.》

《막대한 로력과 시간이 허비되는데 대해서는 국가앞에서 책임지지 않습니까?》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소.》

태연하게 대답한 지배인은 불만을 드러내면서 계속했다.

《그 제안은 현실성이 없으니 채택하지 않겠소. 의견이 있으면 상부에 신소하시오.》

《신소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그는 격분하여 부르짖었다.

《저는 당에 리익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할뿐이지 자기가 정당하다는것을 증명하자는게 아닙니다.》

일그러진 미소가 떠도는 지배인의 표정을 일별한 강기석은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이전에 제진장치때문에 상부에 제기한것은 지배인동지가 그 도안보다도 도안을 작성한 사람을 믿지 않기때문에 지배인동지가 믿을수 있는 사람들에게 제기했던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권위를 빌어서야 그 도안을 마지못해 인정했지요. 지금도 아마 이 자리에 권위있는 전문가가 서있다면 그렇게 가볍게 부결하진 못할겁니다.》

최병기는 허리를 펴고 비로소 맞은켠을 바라보았다. 긍지가 어린 번듯한 이마아래서 번뜩이는 눈길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준절하게 소리쳤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요! 제기한 문제가 옳으면 채택하는거고 가치가 없으면 못하는거지. 동무가 무얼 안다고 그래?》

《저는 별로 아는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는것만큼은 일하자고 합니다. 어째 모든 일에서 지배인동지 혼자만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래사람들의 의견에는 들어볼만 한 소리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지배인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하는건 동무가 가르치지 않아도 돼. 된단 말이요. 돌아가오!》

그리고는 위엄과 분노가 서린 눈길로 이편을 지그시 노려본다.

강기석은 준절하게 쏘아보는 그 눈길을 버젓이 마주보다가 입가에 랭소를 띠우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것은 제안을 부결한데 대한 울분이나 자기를 내쫓는데 대한 반감이 아니라 처사가 졸렬한 지배인에 대한 쓰거운 환멸이였다.

태연하게 나가고있는 청년의 모습을 지켜보고있던 최병기도 그것을 감촉했다.

《흐음-》 하고 그는 가슴굽을 돌아오는 거치른 숨결을 내뿜으며 기가 막혀 뇌였다.

그것은 불손한 표정을 띠우고 나가버리던 대바른 기사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분별없이 흥분했던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이였다.

그처럼 흥분했던것은 사리를 밝혀 납득시킬만 한 정당성이 자기에게 없었고 따라서 위엄을 손상당한듯 한 불쾌감을 느꼈기때문이라는것, 직권으로 누르며 돌아가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도덕적으로는 자기가 패배했다는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것이다.

(만만치 않은 친구로군.) 하고 그는 자기불만의 언짢은 기분에 싸여 속으로 뇌였다.

그러한 기분은 오래동안 가시여지지 않았다.

지령원이 가져온 생산실적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도 줄곧 그 생각이였다.

《아래사람들의 의견에는 들어볼만 한 소리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하고 당당하게 말하던 청년의 모습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문서장들을 밀어놓고 생각을 더듬었다.

중요한것은 그 청년이 아니라 그가 한 말이였다.

그러루한 말을 그는 며칠전에 문화회관 관장에게서도 들은바 있다.

허약한 몸에 안경을 낀 관장은 생뚱같이 예술학교라는걸 만들겠다고 장황하게 말했는데 흥분으로 하여 떨리는 목소리조차 그에게는 경박한 인상을 주었었다.

지루한 설명을 흘려듣고있다가 요점만 찍어서 의문을 표시했더니 관장은 모욕감을 느끼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 제의를 일축해버렸을 때에는 얄팍한 입술에 조소를 띠우고 안경을 번뜩이면서 흥분해서 소리쳤었다.

《지배인동문 자기만이 제강소를 위해 일하는것 같이 생각하는데 대단한 오산입니다. 당신은 예술을 모를뿐더러 생활도, 사람들의 심정도 모르는 관료주의자요! 아시겠습니까?》

그리고는 뗑해진 자기를 페롭게 쏘아보면서 나가버렸었다.…

그후에도 그 일을 상기하긴 했으나 문화회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관장의 존재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체철생산과 직접 관계되는 일을 두고 그런 말을 들었던것이다.

그때 관장이 한 말도 방금전에 그 기사가 한 말과 비슷한 비난이였다.

말도 그렇거니와 그 말에서 나타난 자신의 풍모에 마음이 씌여지는것이였다.

최병기는 물부리에 담배를 붙여물고 풀썩풀썩 태우면서 초여름에 아들의 입원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집안에서의 일을 더듬어보았다.

안해가 말하는것처럼 그것은 전적으로 아들이 일하기 싫어한다고 속단해버린 자기의 불찰이였다. 그러기에 안해의 시끄러운 푸념을 욱박지른 자기를 보고 혜영이까지도 《아버지는 자기 견해만을 너무 주장하지 마세요!》 하고 나무랐던것이다.

수술이 진행된 날 병원뜨락의 등나무넝쿨아래서 당비서가 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사람들의 창조적능력을 최대한으로 계발하고 옳게 조직동원할줄 아는 사람만이 지도일군으로서의 책임을 다할수 있습니다.… 결국은 대중이… 사람들이 모든걸 다 해놓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심정을 속단하지 말고 그들의 의사를 충분히 고려해야지요.》

그는 그 청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버지의 처지가 그렇게 된 형편에서 여기 남아 일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우리라는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들같으면 행운이 차례졌다고 좋아할 곳으로 올려보냈는데 주체철을 위해 기여하겠다고 스스로 돌아왔으니…

과연 그 청년이 공명심이나 출세욕에 들떠서 그처럼 애를 쓰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자기가 사람들의 심정도 모르고 좋은 의도도 좋게 보지 못했다는 뉘우침이 머리를 추켜드는것이였다.

전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최병기는 담배불을 끄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로 기사장을 찾아 오늘중으로 참모회의를 소집해야겠다고 지시했다.

《내화물공사와 관련된 혁신안을 토의하겠소. 강기석동무도 참가시키시오.》

최병기는 주견이 세고 성미가 거칠지만 사업을 놓고는 체면같은것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였다.

더군다나 새 야금법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주저하거나 아끼지 않을 든든한 각오가 되여있는터이였다.

…이튿날부터는 벌써 굴착작업이 중지되고 기초공사를 모래다짐식으로 진척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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