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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소원과 성취


8


박운보는 교대시간이 지난 뒤에도 철골의 작업을 계속하고있었다.

내화물공사장에 필요한 골조들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일본새가 워낙 직심스러운 사람인데다 시험생산이 벌어진 이후로는 하는 일에 더욱 성의를 기울이고있었다.

게다가 말썽을 피우고 농촌에 갔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뒤로 군소리없이 직장에 잘 다니는터여서 요즘은 신수까지 한결 훤해보였다.

동길은 그동안에 사람이 사뭇 달라진듯싶었다.

제 말로는 누님네 집에 가있는 동안에도 농장의 바쁜 일손을 도왔다고 하는데 허풍기가 있는 녀석이 하는 소리라 별반 믿지는 않았다.

촌에 가서 빈둥거리며 지내는 동안에 괴로움을 느꼈던지 아니면 지각이 들었던지 어쨌든 수걱수걱 일하러 잘 다니는것이 다행이였다.

그런다고 안심은 되지 않았다.

박운보는 두루 생각을 굴리던 끝에 녀석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뿌리를 박아놓자면 혼사라도 정하는것이 좋으리라고 내정했다.

그래 그는 이즈음 일을 하면서도 은근히 며느리감을 골라보는데 오랜 친구인 장덕칠의 딸이 짚이는것이였다. 예전에 앞뒤집에서 살적엔 어린것들을 보고 롱으로 그런 말을 했었지만 제강소안팎을 두루 물색해보아도 그 처녀이상은 없을것 같았다.

공사장에 다니면서 자주 맞띄우군 했는데 언제나 상글상글 웃는 모습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성품이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아들도 집에 돌아오면 할말이 없어 클클해하고 로친네까지 늘 덤덤한 자기네 집엔 역빠르고 명랑한 그런 며느리가 안성맞춤이다.

일도 안하고 말이 다사한 그 집 아낙네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뭐 사돈로친하고 한집에서 사는건 아니니까.…

그러루한 생각으로 박운보는 언제건 장덕칠을 찾아가서 그의 의향을 알아보리라 하고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있었는데 이날 마침 장덕칠이 그가 일하는 작업장에 나타났다.

박운보는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면서 반색을 했다.

《임자가 어떻게?》

저쪽은 대답대신으로 시무룩이 웃고있었다.

《아바이, 이젠 그만하십시오.》

아까부터 일을 끝내자고 만류하던 반장이 다가오더니 용접집게를 앗아들었다.

박운보는 할수없이 손을 털고 물러섰다.

《이거 참 오래간만이군.》

한공장에서 일하는터이지만 구내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직장에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던것이다.

장덕칠은 작업장을 에돌아 사람들이 없는 외진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 사람이 무슨 긴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지.)

그의 거동을 궁금하게 여기면서 박운보는 말없이 따라걸었다.

《일본새가 여전하오.》

장덕칠은 선로뚝아래의 풀밭에 오금을 꺾고앉았다.

박운보도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두 직장장은 날보구 늙었다네. 륙십이 지났으니 집에서 쉬라는거지. 자식들이 이젠 어엿하게 자랐다구… 허참.》

죽일놈살릴놈 속으로 별별 욕을 다 해오던 아들이였으나 이 마당에서는 은근히 내비치며 말한다.

장덕칠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쉴만도 하지. 해놓은 일이 적소? 새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허허, 임자두 그런 소린가. 난 뭐 성쌓구 남은 돌인줄 아나? 어림도 없네.》

장덕칠은 뻐금뻐금 담배를 빤다.

《성미가 여전하오!》

박운보는 흘러가는 이야기를 제곬에 들여세우려고 왼심을 쓰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임자네 인숙이는 일두 잘하더군.》

《말썽부린다는 소리는 여직 못 들었수다.》

그쯤 운을 떼놓은 박운보는 망설이며 앉아있는 장덕칠의 태도를 모른척 하고 담배를 태우며 기다렸다.

《말하기가 딱한 일루 왔는데…》

장덕칠은 더수기에 손을 올리며 우물거린다.

《아따 이 사람, 우리 둘사이에 무슨 거북한 일이 있는가. 어서 말하라구.》

박운보는 벌써 반나마 숭낙한셈으로 풀어놓고 재촉한다.

《다른게 아니라… 저, 공구함 여라문틀만 만들어주우.》

《뭐,공구함?》

박운보가 하도 어처구니없이 되묻는 바람에 장덕칠은 난처해한다.

《자동차수리작업이 버쩍 긴장해졌소.》

(공장에 새 일이 와짝 많아졌으니 거야 뻔한노롯이지.) 하고 박운보는 말이 굳은 장덕칠을 한옆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공구지구들을 더 갖추겠다구 젊은이들이 떨쳐나섰는데 함을 만들려니 자재도 딸리구, 크지 않은 일을 계획에 물려달랠수도 없구…》

(흠- 그래서 찾아왔단 말이지- 나두 늙긴 늙었군.)

박운보는 쓸쓸하게 생각했다.

(온 공장사람들이 지금 아글타글 뛰여다니는데 제 집 생각에 당치않은 지레짐작까지 하고있었으니.)

《립장이 딱하겠지만 어쩌겠소.》

《뭐 좋은 일 하자는건데 도와줘야지.》

《자재는 더러 있소?》

박운보는 제관작업장에 높이 솟은 멋쟁이기중기가 물어올린 철판을 바라보고있었다.

천필처럼 드리워 공중에서 흐느적거리는 그것은 제작을 위해 옮겨놓는중이였다.

《마를 때 잘 마르면 공구함만들 감이야 생기겠지. 좌우간 젊은 사람들한테 떨어질수야 없지 않은가.》

《말씀만두 고맙소. 그럼 부탁하겠소.》

장덕칠이 떠나간 뒤에도 박운보는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었다.

(허, 내가 늙었어.…)

어떤 연고로 해서인지 멋쟁이기중기를 놓던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벌써 여러해전 일이다.

설계실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건드러진 모형을 제안했었다.

그 청년은 주머니가 앞쪽에 달린 나팔바지작업복을 입고다녔으며 예술인들처럼 길다닿게 쓸어넘긴 머리우에 모자를 비뚜름히 쓰고다녔었다.

사람들과 잘 섭쓸리진 않았으나 말없이 싱글싱글 웃기 잘했다.

그에게서 받는 그 어떤 경박한 인상때문이였던지 혹은 눈에 선 기중기의 모형때문이였던지 박운보는 그 구도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부쩍 마음들어했으며 지금 반장으로 일하는 정섭이는 서투른 솜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맡아해보겠노라고 자진했었다.

미타하게 여기면서도 저으기 호기심을 품고 작업과정을 지켜보았다.

철판을 공들여 말아붙이면서 기선의 선장실같이 멋을 부린 운전칸을 제작하고 건드러진 비무를 완성했었다.

바다풍경에 어울리게 하늘색과 흰색으로 산뜻하게 도색한 화려한 기중기가 일떠섰을 때 제관공들은 환성을 올렸고 박운보는 서글픈 자책감에 싸였었다.

그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선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때 지배인이였던 강정민은 공연한 일에 귀중한 자재를 많이 소비했다면서 로보수가 늦어진 일까지 턱없이 관련시켜 직장장과 설계실장을 추궁했었다. 자존심이 상했던 그 설계원은 반감을 품고 병을 빙자하여 다른 기업소로 가버렸었다.

그는 떠나갔으나 그가 설계한 기중기는 지금도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있다.

그 일에 대한 회상은 어째서인지 서글프면서도 따뜻하게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그때로부터도 10년이나 지났으니 나도 늙긴 늙었어.)

그의 주름잡힌 얼굴에는 어설픈 미소가 떠돌았다.

집에 돌아오니 로친네가 맞으며 아쉬운듯 사설이다.

《한걸음만 빨리 오셨더면 만났을걸.… 사위가 와서 기다리다못해 방금 떠났는데…》

아래방 구석쪽엔 싸리광주리에 사과가 무둑히 쌓여있다.

《시내에 사과를 싣고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려댔수.》

《저건 웬거요?》

《거기 농장원들이 우리 집에 보내는거라우. 우정 가져왔습디다. 사과두 얼마나 좋은거요!》

《농장원들이?》

《글쎄 그랬다우. 우리 동길이가 여름에 거기 가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구 인사루 이렇게 보냈다면서 사위도 마지못해 가져왔다우.》

《흐음-》

무표정하게 뇌였으나 속으로는 못내 대견해한다.

(거기 가서 빈둥거리진 않았댔군.)

김증녀는 저녁상을 챙기려고 했으나 로인은 가볍게 물리쳤다.

《좀 있다 하우. 이 애가 들어오면 같이 먹지.》

령감의 기분을 짐작한 김증녀는 사위가 왔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농사가 잘되였다는 소식이며 동길이가 가서 일 잘한 이야기, 마을사람들이 동길이더러 놀러오라고 신신당부했다는 소리.

그러고있는 때에 문득 강기석이 들어섰던것이다.

오래간만에 나타난 젊은이를 반갑게 맞으며 찾아온 사연을 듣고는 감심한듯 머리를 끄덕였다.

《옛날엔 거기가 늪자리였어. 지금 바다가에 듬성듬성 널려있는것과 같은… 물이 많구 갈대가 자랐었지. 거기에 재요, 샤모트부스레기요, 오물이요 처넣기 시작한게 벌써 40년이 되는군.… 바닥을 파두 굳은 땅은 쉽게 나오지 않을걸세.》

로인은 오래전의 일을 더듬어가며 지층을 상세히 설명했다.

강기석이 모래다짐으로 할수 있는 방도를 말하자 《그게 가능할가?》 하고 생각에 잠기는것이였다.

《하지만 어렵다고 외곬으로만 생각할것 아니야.》

로인은 회포에 싸여 말하는것이였다. 그는 또다시 멋쟁이기중기를 놓던 때의 일을 상기했던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회전로의 로체를 련결할 때마다 품이 많이 들던 리베트방법을 그만두고 용접으로 하기 시작하던 곡절많은 사연도 회상했다.

안된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때 로기사였던 한명택이 선진경험들을 소개했고 엄학준이랑 용해공들이 부쩍 우겨서 성사했었다.…

《일이란건 방도가 묘연해보이다가도 뒤집어 생각하면 아주 쉽게 풀리는 때가 있단 말이야.》

강기석은 로인의 말을 명심해 듣고있었다.

《결국은 사람이 마음먹기탓이야.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에도 있지 않아. 하자고 결심만 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마음먹기탓이지.》

박운보의 진정어린 말은 강기석을 고무했다.

그는 오늘 종일토록 일을 하면서도 동무들과 토론하여 지층도 조사하고 지반을 다지는데 쓸 골재장도 미리 탐색했었다. 박운보로인의 이야기까지 듣고보니 승산이 내다보였다.

내화물공정이 꾸려지고 저장탕크까지 완성되는 날에 가서는 오늘의 이 공사를 위해 태호가 어떻게 마음을 썼던가 하는것도 사람들에게 말해줄것이다.

하지만 그가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지금은 자기가 맡아나서리라 작정했던것이다.

박운보는 일어서려는 강기석을 붙들어앉혔다.

《앉았다가 저녁이나 먹구 나하구 함께 현장에 나가세. 나두 현장에 나가보면 더 확실한 생각이 날것 같네.》

로인의 진정어린 말에 감동된 기석은 다시 주저앉았다.

기왕 왔던김에 동길이도 만나보고싶었다.

만나서 지나간 일을 웃어버리고 따뜻하게 이야기라도 나누고싶었다.

안주인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동길이는 늘 이렇게 늦어집니까?》

《이전과는 좀 달라졌네. 일은 꾸벅꾸벅 잘하는것 같은데… 아직 속심은 모르겠어.》

《일을 잘한다면 안착이 된거지요.》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자는데 있다구… 알수 없는노릇이야.》

로인은 담배를 붙여물고 방바닥을 들여다보면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앉아있었다.

《누님네 집에서는 언제 돌아왔습니까?》

《휴가랍시고 기간이 끝나자 왔더군. 제깐녀석이 집떠나면 어디서 떠받들어주는데가 있다던가.

촌에서야 빈둥거리기가 더 어렵지. 할수없이 일도 좀 거들어준 모양이야.》

《동길이도 마음만 내키면 아무 일이나 잘하는 성미지요.》

《좌우간 이 근래엔 별말썽이 없어. 제강소에서 일이 들끓으니깐 저도 생각이 있겠지.》

《직장에서도 관심은 많습디다.》

《어떻든 사람구실을 시키자면 일자리에 발을 붙이게 해야 해. 그래 난 궁리하다못해 맞춤한 처녀가 있으면 혼사를 정해주자는거네.》

그 방법에 공감할수는 없었으나 로인의 심정이 리해되였으므로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로인도 그것을 느꼈던지 말을 덧붙였다.

《교양에도 방법이 여러가지겠지만 이 녀석은 발목을 매놓는게 상책이야. 붙잡아두고 다스려야 된다니.》

바깥문이 여닫기는 소리를 듣고 박운보는 웃었다.

《범이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던 박동길은 아버지와 마주앉아있는 강기석을 보자 우뚝 굳어져버렸다.

《동길이, 잘있었나?》

기석은 웃으며 일어섰으나 박동길은 시쁘둥해서 외면을 했다.

《높은데 올라갔다더니 어떻게 내려왔소?》 하고 그는 가방을 방구석에 되는대로 던지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아무데 갔댔건 나야 제강소사람이니까… 제강소에 바쁜 일이 생기면 찾아와야지.》

《창의고안이랑 해서 이름을 날리겠구만.》

박동길은 빈정거렸으나 기석은 너그럽게 웃었다.

《자, 여기 와 앉으라구.》

《나를 교양하겠수?》

비뚤어진 말에 박운보가 화를 냈다.

《이 녀석아, 손우사람을 대하는 인사가 그게 다냐? 교양두 받아야지.》

했으나 박동길은 마음싸지 않은듯 훌쩍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안에서 로인이 불렀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따라나섰으나 박동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멋대로 놀아먹는 녀석이라니까! 례절도 모르고… 쯧쯧…》

방안엔 일시 난처한 기분이 떠돌았으나 강기석이 웃으며 말을 떼자 로인도 저으기 안정했다.

《동길이한테 제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동길이가 넥타이를 들고왔던 일이며 그때 자기가 과격하게 대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머리를 끄덕이며 듣던 로인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 기석이, 그건 정말 잘했네. 저 녀석이 거기서 혼쭐이 났구만. 글쎄 내가 욕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 풀이 죽어 어정거릴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다 했지. 불시에 제 누이네 집으로 간다는것도 그렇지만 거기서 돌아와서는 머리를 숙이구 말없이 일다니는걸 못미덥게 여겼더니 자네가 그렇게 질을 들여놓았군. 허허허… 그런 연고였군, 거참 백번 잘한 일이지.》

로인은 진심으로 고마와했으나 기석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그들은 지층을 다시 확인해보려고 현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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