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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소원과 성취


7


새벽부터 짙은 안개가 바다가를 휩쓸고 보슬비가 내렸다.

비살은 저녁부터 더 굵어져 일하는 사람들을 후줄근하게 적시여놓고 공사장주변을 온통 물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비속에서 진창을 퍼내는 일은 자리도 나지 않았다.

강기석은 마치 땅파기를 위해서 마음먹고 내려온 사람인듯 일에 열중했다.

《피바다》가극단은 돌아갔으나 공연에 대한 인상은 의연히 흥겨운 화제거리로 남아있었다.

처녀들이 많은 구간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삽을 땅에 박은채 허리를 쉬고있던 처녀가 명상에 잠겨 나직이 즉흥시를 뗐다.


바람부는 들판에

천막이 하나-

꿈많은 청춘들의 집이였다네-


그러자 누군가의 듣기 좋은 굵은 저음이 익살궂게, 기분좋게 뒤를 받치고 잇달아 호들갑스러운 맑은 목소리가 날아오르는 새마냥 깃을 치며 명랑하게 화답했다.


비가 와도 일하며

노래불렀고

눈이 오면

우등불 지펴올렸네-


마감은 제나름으로 감정을 다하는 들쑹날쑹한 목소리들에 싸여 어둠속 멀리로 퍼져갔다.


아-

도시는 일떠서

창문들 반짝여도

그날의 그 천막

잊을수 없네-

잊을수 없네


저녁에 강기석이 방에 들어와 젖은 신발을 벗고있을 때 태호가 일어나앉아 중얼거렸다.

《나도 래일부턴 나가겠어.》

《아픈건 좀 어때?》

《괜찮아.》하고 그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건강을 해치지 말라구.》

강기석은 마른 옷을 갈아입으며 타일렀다.

《래일도 또 그건가?》

《그럼, 바닥이 나올 때까지 파야지.》

《끝이 없는 일이군.》하고 태호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놈의 바닥은 끝을 모르겠거던.》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없지 않나.》

태호는 한동안 우물거리더니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방법은 있는데… 자신이 없어.》

강기석은 그를 돌아보았다. 태호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다.

《어떤 방법인가?》

《모래다짐식이라는 방법이네. 뭐 전혀 새로운것도 아니지.》

태호는 베개맡에 놓여있는 펼쳐진 책장을 돌아보는것이였다. 거기엔 백지에 그린 도면이 있었다.

기석은 그리로 다가가서 집어들었다.

그제야 그는 이것이 자기가 도착한 첫날부터 거기 있었던것을 상기했다.

(그러니 태호도 주체적인 야금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려고 은근히 노력했구나.) 하고 그는 감동에 싸여 생각했다.

《그동안 갑갑해서 좀 끄적거려보았지.》

(갑갑해서가 아니라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 애를 태웠을거야.) 하고 기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장해! 태호, 이건 대단한 발기야. 그래 토론은 해봤나?》

그는 활기를 띠우고 물었다.

주먹으로 관자노리를 고이고 앉아있던 태호는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해져서 《자신이 없어.》하고 애매하게 웅얼거렸다.

《자신이 없다구? 방법이 확실하기만 하면 토론도 하고 상부에 제기도 해야지.》

강기석은 걱정스러운듯 바투 다가앉으며 은근하게 타일렀다.

《이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이 방법으로 될수만 있다면 로력을 절약하면서도 공사를 훨씬 앞당길수 있지 않는가. ㄱ철의 완성에 하나의 큰 기여란 말이네.》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울렸고 눈은 흥분으로 하여 번뜩였다.

눈길을 들어 기석의 표정을 살피던 태호는 추운듯 어깨를 움츠리면서 외면해버렸다.

《여어 태호, 동문 지금 자기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있는지를 모르고있어! 이건 대단한 발견이란 말이다.》

강기석의 말에서는 궁지와 기쁨이 넘치고있었으나 태호는 눈을 내려뜨며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만두라구.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라면 내가 가만 있겠나! 자신이 없어. 게다가 난 그 부문의 전문가도 아니지 않는가!》

《전문가라야만이 반드시 훌륭한 발견을 하는건 아니네. 그건 그렇다니까. 근거만 확고하다면 전문가들에게 물어도 보고 토론도 해야지.》

《우리 제강소에야 그 부문 전문가들이 없지 않은가.》

《우리한테 없으면 다른데라도 다녀봐야지. 지금 이게 얼마나 절박한 문젠가!》

《…》

《하긴 동문 그동안 앓았지. 왜 나한테 진작 말하지 않았어? 에- 건설사업소같은데 가면 전문가들이 있겠지?》

《일반건설에는 없네. 수렁판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면 생산건설부문에는? 이를테면 금속건설같은데 말이네.》

《거긴… 글쎄…》

태호는 그렇게 얼버무리면서도 이쪽의 동정을 불안하게 살피고 덧불였다.

《좌우간 좀 쉬라구, 동문 피로가 쌓였어. 오는 날부터 쉬지도 않구… 얼굴이 말이 아니네.》

《괜찮아, 내가 앓는 사람에게 괜히 화를 냈군.》

기석은 쾌활하게 말하면서 도면을 품속에 간수했다.

《내 좀 다니면서 알아보겠어. 가능성부터 타진해야지.》

《가만 있어. 좌우간 오늘 저녁은 좀 쉬라구. 쉬면서 좀 생각해보자우.》

《괜찮다니까! 될수만 있다면 한시가 급한 일이지.》

비옷을 걸치고 신발을 신는 그를 태호가 극력 만류했다.

《여어- 공연히 그러지 말라구. 어딜 간다고 그래?》

《내 제꺽 갔다오겠어. 앓지만 않는다면 동무하고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이 비까지 맞았다간 태호는 영 드러눕네. 내 제꺽 갔다와.》

강기석은 웃으며 방을 나섰다.

《나하구 좀더 토론하자구 글쎄.》

태호가 불렀으나 그는 이미 복도를 걸어가고있었다.

비는 그냥 내리고있었다.

늦은 시간이여서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 없었다.

전차정류소에서 한동안 기다리다가 걷기 시작했다.

금속건설사업소는 시오리가 넘는 교외에 자리잡고있었다. 정문에서 밤중에 찾아온 사연을 밝히며 고집스러운 경비원을 납득시키느라 반시간이나 지체했다.

설계실에는 당직자가 한사람 남아있을뿐이였다. 강기석이 찾는 전문가는 이미 퇴근했는데 전차로 통근한다는것이였다.

주소를 알아가지고 다시 찾아떠났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였다. 비살은 가늘어졌으나 바람이 불었다.

걸을 때엔 몰랐는데 집앞에까지 와서 서있는 동안은 온몸이 덜덜 떨리는것이였다.

설계원은 나이지긋한 사람이였다. 아닌밤중에 잠을 깨운 불청객을 달갑지 않게 맞아들이고 불빛아래서 후줄근한 모양을 여겨보고는 앉기를 권했다.

《뭐 좀 갈아입어야 되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곧 돌아가겠습니다.》

강기석은 방바닥에 남긴 젖은 발자욱을 송구스럽게 굽어보며 걸상 한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찾아온 뜻을 말하고 품속에서 도면을 꺼내보였다.

저쪽은 무엇인가 물어보려다말고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량미간을 모으고 도면을 들여다보는 눈길에 한가닥 미소가 어리는것이였다.

《요전날 그거구만.》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중얼거리면서 안경을 벗고 강기석을 유심히 살펴보는것이였다.

《내 요전날 설명해줬지요. 가능하다고.》

《누가 왔댔습니까?》

강기석은 어정쩡해서 물었다.

《몸이 실하고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좀 별나게 생긴 동문데. 입이 크고.》 하면서 그는 딱한듯 빙그레 웃었다.

(태호가 왔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이였다.

(말없이 뛰여다니고도 내색은 안했지. 그래서 날더러 가지 말라고 말렸군.)

설계원은 모래다짐법을 설명했다.

《난 그 현장에 가보기까지 했소. 다른 기업소일이기에 중뿔나게 나설수는 없었지만 그 동무가 하도 조르기에…

공사대상은 작은데… 거기 지반이 문제더군.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충이 아니라 탄재요 뭐요 하는 갖가지 페물로 메꾸어진 곳이란 말이요.

원래 어떤 바닥이였는가가 문제요. 바다물의 침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지층에 따라서 공법이 달라져야 하지만 가능한 방법이요.》

강기석은 밤중에 찾아온것을 미안하게 여기며 그의 친절한 설명에 사의를 표했다.

《좌우간 보통이 아니요, 이런 밤중에.》

젊은이를 바래워주면서 못내 감탄하는것이였다.

날이 새여가면서 비는 멎고있었다.

(태호가 지층을 걱정한게 공연한 소리가 아니였군.)

비속을 기분좋게 걸어가면서 강기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합숙에 돌아왔을 때 태호는 자지 않고있었다. 졸음에 실려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불안하게 동무를 살피면서 어수선하게 일어나앉았다.

이쪽은 동무를 정답게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자라구. 왜 일어났나?》

태호는 눈을 비비고 이불을 밀어제꼈다.

《누굴 찾아갔댔나?》

《동무가 찾아간 그 사람을.》

《젠-장, 내 가지 말라지 않아!》

《아니야, 갔던 보람이 있어, 신심이 생겨.》

《그렇지만 지반이 문제야. 그런 말도 했지?》

《나도 오면서 생각해봤네. 지반을 확인하는건 어렵지 않아. 박운보아바이랑 만나보겠어. 해방전부터 여기서 일하던분들은 알수 있을거야. 》

태호는 불안한 눈길로 동무를 살폈다.

《여어 기석이, 동무 생각엔 어때? 지금 술한 사람들이 떨쳐나서 하는 일이 그렇게 되면 너무 쉽게 해결되는것 같지 않아? 뭔가 정상이 아닌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거야말로 아주 정상이지. 과학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것도 비정상이겠군.》

태호는 분명치 않게 우물거리면서 한숨을 지었다.

《자, 이젠 자자우, 낮에 쉬면서 도면이나 만들라구. 래일쯤엔 기사장한테 제기합세.》

태호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다가 《그 일에 난 끌어넣지 말라구. 난 참견하지 않겠어.》하고 우울하게 말했다.

젖은 옷을 벗고있던 강기석은 그를 찬찬히 여겨봤다.

《그건 무슨 소린가?》

《진심으로 부탁하는거네.》

공연히 눈을 슴벅거리며 불안해하는 태호의 표정을 지그시 지켜보던 강기석은 《동무도 이 사업의 의의를 잘 알지 않나?》하고 타이르듯 나직이 물었다.

《알기때문에 그러는거네. 그런대로 한주일쯤 더하면 끝이 나겠는데 뭘 그러겠나?》

《한주일이 아니라 하루라도 앞당겨야지. 비단 이 내화물공사뿐아니라 시험생산이 벌어지는 모든 부분에서 말이네.》

《세상일이란 늘 마음먹은대로 되는건 아니네. 이건 시험생산과 직접 관계되는 문젠데 실수라도 생기면 야단이야. 사상문제란 말이네.》

《오해를 받을가봐 두려운가?》

침착한 강기석의 눈길을 피하며 태호는 어물어물 뇌였다.

《두렵다기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아주 심각한 일이란 말이야. 난 아직 당원도 아니지.… 아무 일에서나 실수가 없어야 하거던.》

강기석은 그와 마주서있기가 답답한듯 천천히 창문가로 걸어갔다.

어둠에 잠긴 창문밖에 눈길을 준채 가쁜숨을 씨근거리며 오래동안 말이 없었다. 젖은 속옷을 아직 벗지도 못한채였으나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이윽고 흥분이 얼마큼 갈앉자 생각에 싸여 이렇게 말했다.

《새롭게 처음 해보는 일이니 모험이 동반되고 애로되는 점이 많지. 여기서 문제는 부닥치는 난관을 어떤 관점과 립장에서 뚫고나가는가 하는것이네. 누구나가 말로만 혁신을 부르짖고 실지로는 책임이 두려워 걸린 문제를 풀기 위해 어깨를 들이밀지 않는다면 전투의 승리를 어떻게 보장하는가. 진보나 혁신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나!》

《…》

《뚜렷한 신념도 없이 자포자기에 빠져 눈치나 보면서 시키는 일이나 적당히 한다면 편안하게 살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생활이고 그게 행복일가. 더군다나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

아니야. 난 그렇게는 살고싶지 않네. 설사 백년을 더 산다 해도 그렇게는 살지 않겠어.》

그의 말에서는 울분이 끓어넘치고있었다. 그리고 그 말속에는 동무에 대한 질책도 스며있었다.

머리를 떨군채 듣고있던 태호는 불만스럽게 툭 쏘았다.

《말이야 하기 쉽지. 흥, 난 뭐 생각이 없는 사람인것 같은가.》

《생각이야 지내 많아서 탈이지.》

강기석의 어조에선 의연히 비난이 울리고있었으나 태호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좌우간 기석동무 마음대로 생각하게나. 하지만 내 이름은 거기 비치지 말아달라구.》

《이름을 비치더라도 책임은 넘겨씌우지 않겠네. 제-길, 그 주제에 나이들어보이는건 싫어하지. 나이가 아깝구 기사라는 자격도 아깝네.》

친구의 자존심을 자극하려고 그렇게 쏘아불이고나서 기석은 얼굴을 찌프렸다.

친구에 대한 믿음이 컸던만큼 실망도 또한 컸던것이다.

그들은 각기 잠자리에 들었고 더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창밖이 푸름푸름 밝아올 때까지 저마끔 흥분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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