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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사랑의 기슭


16


이튿날 저녁때에 기석은 부모들이 계시는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곳 역시 야금기업소들이 가까이 린접하여있는 공장지구였다.

처음 오는 길은 아니였으나 거리와 주변마을 풍경들은 아직 눈에 설었다.

이제 얼마후이면 부모님들을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어쩐지 즐겁지 않았다.

제강소에서 떠나오게 된 걸음과 자기에 대한 지배인의 랭담하고 모욕적인 태도며 떠나오기 전날에 기사장이 설복하던 이야기들이 잊혀지지 않았던것이다.

마을에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어가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집으로 다가가면서 보니 뜨락 한귀퉁이에서 누군가 얼씬거리고있었다.

어머니였다.

젊어서부터 아무 일이건 손에서 놓아본적 없는 어머니는 지금도 울타리에 의지하여 세운 장대에 당콩넌출을 올리고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뜨락에 들어선 아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네가 왔구나.》하고 나직이 부르짖는다.

기석은 그 말소리를 들었다기보다 치마자락에 급히 손을 문지르며 웃음지은 얼굴로 무엇인가 속삭인듯 한 반기는 표정속에서 그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바야흐로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꽃밭을 에돌아 급히 뜨락에 나섰다.

몸은 어떠냐, 어떻게 오는 길이냐, 두서없이 물으며 집안으로 이끄는, 기쁨과 걱정이 엇섞인 어조에서는 자애가 넘치고있었다.

웃방에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아버지가 신문을 손에 쥔채 마루에 나섰다.

뜻하지 않았던 아들의 출현에 어리둥절해 서있던 반백이 되여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기석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련민의 정이 가슴에 넘치면서 아버지의 처지때문에 괴로와도 하고 때로 불만도 느끼던 자기자신이 하치않게 여겨졌다.

《아버지, 안녕하셨습니까?》하고 그는 인사하며 다가갔으나 강정민은 웃지도 않고 응대했다.

《기별도 없이 어떻게 오는 길이냐?》

《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렸습니다.》

무엇인가 가늠해보는듯 아들의 표정을 지그시 살펴보다가 말없이 앞장서서 웃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있었다.

《여기 ㄷ제철소의 부기사장이다. 너 왜 모르겠니? 이전에 거기 제강소에서 회전로 부직장장으로 있었는데…》

《10년전 일인데 모를겁니다.》하고 손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도 방금 제강소얘기를 하던 참이다. 거기선 새 야금법을 한다는데 어떻게 되여가느냐?》

《아직은 시작입니다.》

기석은 진행되는 정형을 설명했다.

아버지와 손님은 이전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안부를 이것저것 물었다.

제강소의 변모된 형편까지 이야기하다나니 시간은 퍼그나 흘러갔다.

손님이 돌아가고 식구들만이 남게 되자 어머니는 아들이 지내는 형편을 자상하게 묻기 시작했다.

먹고 자는 일에서부터 갈아입을 속옷걱정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놓지 못해하는 어머니의 물음에 적당히 대답해가던 기석은 《어머니, 아무걱정 없이 지내니 마음을 놓으십시오.》하고 안심시켰다.

어머니는 동생에게서 온 편지도 꺼내보였다.

북부철길공사장에서 벌어지는 흥미있는 소식들을 전하면서 자기 걱정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였다.

《그녀석까지 나가고보니 집이 텅 빈것 같구나.》하고 어머니가 심란해서 중얼거렸다.

《또 쓸데없는 탄식이군.》

아버지가 못마땅한듯 핀잔했다. 그리고는 아들을 마주보며 근엄하게 물었다.

《내 전번에 편지에서 썼다만 너의 어머니가 걱정하는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어떠냐, 여기로 옮겨올 생각은 없느냐?》

기석은 이전에 받았던 편지사연을 더듬어보면서 이 일을 두고 아버지가 한두번만 생각한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일하는 자기 처지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지금 자기를 지켜보는 긴장한 표정에서도 느껴지는것이였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 그냥 거기서 일하겠습니다.》

강정민은 잠시 사이를 두고 다시 물었다.

《거기서 일하기가 어렵지 않으냐?》

《어려울것이 없습니다. 사람들도 다 잘 대해주는데요.》

허나 아들의 온화한 대답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있었다.

《그래, 제강소사람들이야 다 좋은 사람들이지.》

무표정하게 그렇게 중얼거리고나서 생각에 잠겨있더니 《원병호네 집에도 더러 다니느냐?》하고 물었다.

곁에서 듣고있던 어머니가 《그 집엔 무슨 인연이 있다구 자꾸 다니겠수. 옥희는 사촌간이니 인연이라구 하겠지만.》하고 서글프게 말했다.

기석은 언젠가 옥희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랭대를 받은 일이 생각났으나 아버지를 괴롭히고싶지 않아서 듣기 좋게 대답했다.

《다닙니다.》

아들의 표정을 여겨보던 아버지는 《지금은 그 사람이 어떤지 모르겠다만 이전엔 일이 생기면 자주 우리 집에 오군 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말이 없었으나 얼굴빛은 흐려있었다.

《그래 그 사람은 요새 무고하더냐?》

《아마 잘있겠지요. 요샌 잘 모르겠습니다. 옥희는 떠나오기 전에 만났는데 여전하더군요!》

《옥희 아버지는 사람이 원래 꼬장꼬장했지.》

아들의 어조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기석은 떠나올 때 마련해가지고온 아버지가 좋아하는 구기자술을 내놓으면서 화제를 이곳 생활에로 돌리려고 했으나 아버지는 술병을 돌려놓고 그의 일을 또 묻는것이였다.

《지난 겨울에 너희네 기사장이, 한명택이 말이다. 여기 출장왔다가 들려서 네 소식을 전하더라. 무얼 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하구 또 제진장치도 새롭게 구상했다구.… 그래 그건 어떻게 되였느냐?》

《별치않은겁니다. 실용적인 면에서도 더 고려할 점들이 있고…》하고 그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제진장치와 관련한 복잡한 사연들을 다 말하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래도 한명택이는 훌륭한 창안이라고 하던데…》

(내 사업에 대해서 많이 알고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가 지난번에 그런 편지를 보냈던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구태여 그 과정을 상세하게 말하고싶지는 않았다.

《시공 못하는 사정을 그르다고 할수 없습니다. 창안품이 좋다고 해서 그대로 시공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공장에서는 새 야금법을 하고있으니까요.》

《지금은 글쎄 사정이 그렇게 됐지만…》

아들의 분명치 않은 대답에 불만을 느낀듯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다시 물었다.

《기술국에는 무슨 일로 가느냐?》

《얼마간 동원되는데 무슨 일인지는 딱히 모르겠습니다.》

그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것도 사실이였지만 무슨 행운이라도 차례진것 같은 헛된 기대를 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게다가 그곳으로 가게 된 과정이 단순치 않았고 가는 걸음이 내키지 않았던만큼 긴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더 묻지 않았다.

아들의 애매한 대답에서 무엇인가 상서롭지 못한 기분을 느끼면서 그것을 자기의 불우해진 처지와 관련시켜 생각하는것이였다.

(아무 일도 없는것처럼 태연하게 말하지만 이 애비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건 틀림없어.) 하고 못내 괴로와하는것이였다.

그는 아들과 더불어 그들이 종사하고있는 야금계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훈계도 하려고 했던터이지만 이제 와선 그 모든걸 단념하고말았다.

어머니가 저녁상을 챙기고 아들이 가져온 술을 내놓았으나 아버지는 마다하는것이였다.

《생각이 없소. 너나 마셔라.》

어머니는 두어번 권하다말고 할수없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와 아들사이에는 별로 이야기가 없었다.

어머니만이 곁에 앉아서 집안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의 혼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걱정이였다.

《늙은것들만 있으니 적적할 때가 많다.》하고 어머니는 혼자소리처럼 생각이 깊은 표정으로 하소연하는것이였다.

《어머니, 그만해두십시오.

생활도 이만하면 괜찮고… 모든 일이 다 잘되여갑니다.》

기석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있을뿐이였다.

이튿날 아침 떠날 때에도 아버지는 문을 열고 내다보았을뿐 더 나오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멀리까지 따라나오면서 로자로 쓰라고 돈을 자꾸 넣어주려고 했다.

《어머니, 제발 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얼마후에 꼭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다시 렬차에 올라 평양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석은 그때의 일들을 더듬어보면서 자기를 뉘우쳤었다.

제진장치에 대한 물음이나 국에 가는데 대한 아버지의 관심이 아무리 그의 기분에 거슬렸다 해도 옷가지며 그밖의 자질구레한 생활사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과 더불어 거기엔 아들을 념려하고 관심하는 부모들의 사랑이 담겨져있었던것이다.

떨어져있는 아들을 생각하는 부모들의 절절한 심정에 비한다면 자기는 얼마나 부모를 생각하고 념려했던가?

아버지를 대하던 태도속에 제강소를 떠나기 전에 기사장이 상기시킨 그러한 불만의 감정이 과연 없었던가?

스스로 그렇게 자문하면서 자기의 사람됨을 돌이켜보기도 했다.

자기 생활에 도움을 준 정도에 따라서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인간의 도리는 어디에 있으며 존엄과 지성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자기자신을 돌이켜보면서 인식하는 과정이 동시에 자기를 도덕적으로 제고시키는 과정으로도 되는것이다.


*


강기석이 할일은 야금기업소들의 제진문제 및 로동보호와 관계되는 기술적인 대책안을 만드는것이였다.

사업방법을 규정해주면서 국장은 낡은 자료에 매달리지 말고 현지에 다니면서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라고 권고했다.

《이건 모두 철생산과 직접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요.》

내키지 않아하는 기석의 심정을 짐작한듯 미소를 짓고 부드럽게 설명했다.

《야금전문가는 안목이 넓어야 하오. 자기가 일하는 로에 대해서뿐아니라 다른 로들도 휑하니 알아야 하고 우리 나라 야금공업의 전반실태를 꿰뚫고있을뿐아니라 야금공업의 세계적인 추세도 잘 알아야 하오.

더 좋기는 야금과 관련되는 공업의 다른 분야에도 막히는데가 없어야지.》

《…》

《야금부문의 생산조건과 로동조건을 개선하는것은 당에서도 크게 관심하는 일이요. 우리는 이 사업을 오래전부터 시도해왔소. 전반적인 야금기업소들에서 이 사업을 번듯하게 눈에 띄우게 해놓자는거요. 동무의 그 제진장치도 그래서 특별히 관심했던거요.

좌우간 기업소들에도 나가보오. 많이 배우게 될거요.》

《그렇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ㄱ철생산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하지. 그러나 그쪽이 중요하다고 다른 일을 줴버려서도 안되지. 앞으로는 ㄱ철과 직접 관계되는 과제도 맡게 될거요.》

국장은 뜻있는 미소를 짓고 덧불였다.

《모든 일에 때가 있는 법이지.》

이 철학적인 대사는 기석에게 명백히 리해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물어볼수도 없었다.

그가 일하게 될 사무실은 시가변두리의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하였고 차례진 방은 3층에 있었다.

서남쪽으로는 수도의 일각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룡악산의 원경이 바라보였다.

눈아래는 가로수 우거진 대통로가 뻗어있고 그옆으로 자그마한 솔숲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었다.

잠시 일손을 쉴 때면 밝은 해빛이 쏟아져들어오는 창문을 통해 수도교외의 아름다운 정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군 한다.

거리의 소음이며 끊임없이 흘러가는 전차며 자동차들의 동음도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곳은 과학기술분야의 기관청사인데 기술국에서는 두개의 방을 빌려 기술문제와 관련되는 자료를 준비하는 성원들을 여기서 사업하도록 조건을 마련했던것이다.

건설당초부터 학술기관으로 설계되였던 건물이여서 주변에 잘 가꾸어온 수목이 우거진 동산까지 있어 청신하고 안온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기석은 한낮의 해볕이 포근히 내려쪼이는 수목들사이를 거닐다가도 문득 파도설레이는 바다가의 제강소를 생각했다.

열기를 풍기며 돌아가는 회전로, 낮에 밤을 이어 교대를 바꾸어가며 땀흘리는 로동자들…

푸른 기발을 손에 든 조차공이 시뚝하니 매달려 지나가는 화물렬차들이며 코밑이 새까맣게 된 운전공들이 천정기중기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웃음을 보내는 원료장이며… 지혜를 짜고 땀을 흘리면서 나라의 재부를 한푼두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일하는, 어려서부터 몸에 익은 제강소생활이 그리워지는것이였다.

그곳 어디서 행복감에 싸여 명랑하게 일하고있을 혜영이도 그리웠다.

떠나올 때 역두에서 만났던 그 정다운 모습 그리고 파도 설레이는 바다가를 거닐던 잊을수 없는 저녁에 속삭이던 귀중한 고백…

그 모든 일들을 절절하게 더듬어보다가도 문득 현실로 돌아오군 했다.

그리고는 바야흐로 뜻깊은 사업이 벌어지고있는 그곳으로 어서빨리 돌아가려고 맡은 일에 정열을 기울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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