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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사랑의 기슭


15


하던 일을 인계하고나니 마음이 쓸쓸했다.

떠나기 전날 저녁엔 혜영이를 만나려고 연구실에 갔으나 퇴근한 뒤였다. 집으로 찾아갈 생심은 나지 않았다.

기대를 품고 보람을 느끼며 떠나는 걸음이라면 만나서 하고싶은 말도 많을터이지만 기석의 심정은 그렇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다가로 놀러 갈 약속도 있었던만큼 떠나는것을 알리기라도 하려고 이튿날 아침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일이 있어서 외출했는데 오후에 돌아올것 같다는 대답이였다.

그는 구단광연구실의 주소로 간단히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고서야 얼마큼 마음을 놓았다.

(자세한것은 후에 알리지. 하긴 곧 돌아올수도 있으니까.…) 하고 그는 락관을 품고 자신을 위안했다.

빌려왔던 책들을 바치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옥희를 보았다.

이종사촌간이였지만 옥희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던터여서 가까이 지낸 사이는 아니였다.

옥희는 어려서부터 이모네 집에 다니는것을 꺼려하는 이붓어머니의 잔소리가 시끄러워 다니지를 않았었고 자라서는 대학에 가있었으므로 련계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강기석의 부모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자기 아버지까지 그를 은근히 꺼려하는 눈치를 안 다음부터는 오히려 만날적마다 반가와하면서 따뜻하게 대했었다.

《왜 이 책들을 다 바쳐요? 이젠 성구기를 포기했어요?》

강기석이 꺼내놓은 《원료예비처리》며 《성구공업》 등의 참고서들을 보면서 놀라운듯 그렇게 묻는것이였다.

《그렇게 됐소.》 기석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책을 다 바치고 대출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옥희와 함께 대기실을 나왔다.

안락의자가 두세개 놓여있는 넓은 홀에는 담배피우러 나온 독자들 몇사람이 있을뿐 조용했다.

기석은 자기가 얼마동안 다른데 가서 일하게 되였다는것을 알렸다.

원옥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겨있더니 서운하게 말했다.

《난 그래도 이번에 ㄱ철을 완성하는데서는 기석오빠가 단단히 한몫 하리라고 기대했는데…》

그 평범한 말에서는 기석의 능력에 대한 믿음뿐아니라 아버지의 처지며 그의 생활을 깊이 리해하고 관심해온 뜨거운 진정이 느껴졌다.

못내 감동된 기석은 옥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싶었고 자기는 기어코 그렇게 할것이라고 품고있는 진심을 피력하고싶었으나 묵묵히 입을 다물고있었다.

사업이 장차 어떻게 될지 자기로서도 가늠할수 없었거니와 부질없이 말을 앞세우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덤덤히 서있는 그의 표정을 쳐다보며 원옥회는 부드럽게 물었다.

《제강소에서 일하기가 괴로와요?…》

강기석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을뿐이다.

《미운 사람이 떠나가서 다행으로 여겼는데 좋은 사람도 떠나가는군요. 》

《누가 또 떠나갔어?》

《우리한테 와있던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여기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나요!》

《왜?》

《자기는 과학자로서 새로운 발견을 위해 모대기는데 여기서는 기록을 돌파하기 위한 모험을 하면서 좋은 종자를 망쳐먹는다는거지요. 우리는 연구목표를 높이 설정하고 거기에 맞게 장입량도 가급적으로 높이자고 하는데 그 사람은 그것이 투기고 모험이라고 비난하지요.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 생활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과학의 사명이 있다고 쏘아주었더니 오히려 코웃음을 치더군요.

사람들이 만류하는걸 듣지 않고 가버렸어요.》

(나는 만류하는 사람도 없군. 아무런 기대도 걸수 없다는거겠지.) 하고 기석은 쓸쓸하게 생각했다.

(내 일에 늘 관심해주던 기사장조차도 가는게 좋다고 권고하는 형편이니까.)

그들은 도서관 뜰앞에서 헤여졌다.

《부모님들한테도 문안을 드려주세요. 큰어머니도 부디 몸건강하시라고, 그리고 여기 오실 기회가 생기면 우리 집에 꼭 들리시라고요.…》

옥희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듯 했으나 그저 웃고말았다.

아마 자기 부모들의 이름으로 더 인사를 전해야 할것이지만 빈말을 하고싶지 않아서 그만둔 모양이였다.

시간이 되자 가방을 차려들고 역으로 향했다.

떠나갈 사람들과 바래우러 나온 사람들로 역두는 번잡했다.

역홈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의 흐름에 싸여 걸어갔다.

려객차와 화차들이 들어선 구내에는 한낮의 해빛이 쏟아지고있었다.

사람들이 번잡한 구내매점을 피하여 저켠으로 걸어가던 강기석은 문득 눈앞을 지나가는 박성국의 모습을 보았다.

키가 후리후리한 그는 양복앞섶을 헤치고 걸어오는데 흰 와이샤쯔우로 드리운 넥타이가 건들거리고있었다. 그러자 바로 그곁에서 걸어오는 혜영이의 눈길과 마주쳤다.

《아이- 강동무, 어딜 가세요?》하고 처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반색했다.

《그러잖아 혜영동무를 찾았댔소.》

기석이도 뜻하지 않게 만난것을 못내 기뻐했다.

혜영은 박성국이쪽을 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언젠가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박성국은 우선우선하게 손을 내미는것이였다.

《우리는 구면인것 같은데…》

강기석은 그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있어 기술국에 가는 길입니다.》

《대형성구기를 벌써 다 만들었소?》

그렇게 묻는 말에는 비양조도 있었으나 기석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군. 난 동무가 만든걸 꼭 보고싶었는데.》

그것은 이전날의 론쟁을 상기시키는 말이여서 기석의 자존심을 강하게 자극했으나 그는 이 자리에서 그 말을 탓할수가 없었다. 탓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후에라도 혹시 만들면 보아주십시오.》

《한데 그런 영광이 차례질것 같지 않소. 동무도 어디로 가는것 같고 나 역시 올것 같지 못하니까!》

《아주 가십니까?》

《다시 올 생각이 없소.》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있는 연구사동지가 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일은 방금 시작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많은데.》

《나 한사람이 없다고 해서 안될 일은 없을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박성국은 쓰겁게 웃었다.

강기석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연구사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그 어떤 결심이 굳어지는것이였다.

(주체적인 야금법의 완성을 위해서 힘과 지혜를 다 바치리라.)

말없는 그의 표정에서 자기에 대한 비난을 느낀 박성국은 어설픈 미소를 띠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자, 그럼 얘기들 하시오.난 가서 자리나 잡겠소.》하고는 상급차 있는데로 걸어갔다.

혜영은 그들 두사람이 서로 불쾌감을 품고 헤여지는것을 눈치챘으나 구태여 껴들지는 않았다, 기석이와 더불어 해야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던것이다.

《그러니 우린 여기서 우연히 만났군요. 난 박성국동지를 바래우러 나왔는데.》

책하듯 말하면서도 웃고있었다.

《거기 가선 얼마나 오래 있어요? 무슨 일을 한대요?》

《아직은 모르겠소, 올라가보라고 하기에 떠났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좋다고 한것이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는듯 했으나 다시 은근한 어조로 나무랐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알리지 않았어요?》

《이틀전에야 지시를 받았소. 사업을 인계하고나서 동무를 찾았지만… 없더군.》

《찾았다고요?-》

미소가 하늘거리는 눈길로 이쪽을 흘겨보며 미덥지 않다는듯 말꼬리를 뽑았다.

《마음먹고 찾았더라면 만나지 못할 일은 없었을텐데요.》

기석은 웃고말았다. 그 녀자의 지적이 일리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옳지 않아요. 동문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예요!》

《미안하게 됐소. 가는 걸음이 내키지 않아서 두루 기분이 언짢았던건 사실이요.》

《제진장치와 관계되는 사업때문이겠지요?》

《아마 그런것 같소. 한데 난 그것이 전문이 아니요. 다만 회전로를 일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일념에서 시작했던거요. 그런데 지금은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나서고있는 형편에서 여기를 떠나야 하니… 난 야금기사란 말이요!》

《그래도 상부에서 인정했다는건 좋은 일이 아니예요!》

《동문 그렇게 생각하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요.》

처녀의 당당한 대답에 기석은 허거프게 웃었다.

렬차가 서서히 출발선에 들어서고있었다. 혜영은 하고싶은 말을 다하지 못할가 저어하듯 바삐 쏟아놓았다.

《어쨌든 모든 일이 잘됐어요. 그렇지만 나한테 알리지 않은데 대해선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그런줄 알아요!》

《알리지 않았다는건 중요한게 아니요.》

《왜요, 아주 중요해요.》

처녀는 웃고나서 덧붙였다.

《그렇지만 편지를 자주 하면 용서할수 있어요. 편지를 하지요?》

《하겠소. 그런데 집에는 하면 안될거고… 구단광연구실에?》

《괜찮아요. 집에다 하세요.》

주소를 급급히 수첩갈피에 적어주고는 계속했다.

《아버지가 출장지에서 돌아오면 다 말하겠어요. 그러는게 좋지요?》

《그건 동무가 알아서 할 일이요.》 하고 대답한 기석은 웃으면서 물었다. 《만일 아버지가 반대하면 어쩌겠소?》

《동문 참 별난 사람이예요. 무슨 당치않은 소릴 해요!》

처녀는 웃으면서도 비난하듯 눈을 흘겼다.

《강동문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부모들이 반대한대서 그 의견을 따르겠어요?》

기석은 미더운 눈길로 그 녀자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하고 그는 은근한 정을 담아 너그럽게 말했다.

둘이는 사람들에게 떠밀리우며 숭강대까지의 멀지 않은 구간을 다정하게 걸어갔다.

《몸건강히 일 잘하세요.》

행복감에 넘쳐 얼굴을 빛내며 혜영은 당부했다. 렬차가 떠나는 마지막시간까지 이 자리에 서있고싶었고 이야기하고싶었다. 허나 기석은 《박선생을 바래우러 나온 사람이 여기 있으면 어떡하오.》 하면서 그쪽으로 가라고 권했다.

혜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가면 곧 편지하세요.》

그리고는 연신 뒤돌아보며 상급차쪽으로 걸어갔다.

박성국은 승강대앞에서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혜영이가 가까이 온것도 깨닫지 못하고 무슨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가는 길이 유쾌하지 않구만.》 하고 서글프게 말하고는 얼굴을 찌프렸다.

《또 오셔야지요 뭐.》

인사로 하는 말에 박성국은 머리를 저었다.

《참, 그 동문 아주 소환됐소?》

《모르겠어요. 회전로제진장치에 대한 구상이 기술국일군들의 주목을 끈 모양이예요.》

《재능이 인정됐구만. 좋은 일이지.》

《그래도 거기엔 마음이 없어하는것 같아요. 야금기사라고…》

《현장에만 있었으니 시야가 좁을수도 있지.》

박성국은 혼자말처럼 뇌였다.

《재능이라면 전공한 분야에서만 꽃피는것도 아니요. 젊은 사람들의 경우엔 자기 재능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수도 있고… 후에라도 만나면 충고해주오.》

《제가 뭐 상관할게 있나요.》

혜영은 당치않다는듯 웃으면서도 그 말을 새겨두었다.

《과학계엔 그런 일들이 많지.》 하고 저쪽은 자기 생각에 잠겨 말했다.

《현대생물학의 창시자인 찰즈 다윈도 젊어서는 의학을 전공했었고 화학을 련금술로부터 과학으로 추켜올린 아메데오도 원래는 법학박사였지.…》

그는 인류문화사에는 그러루한 례가 얼마든지 있다는것을 말하려고 했으나 어쩐지 자기 말이 스스로도 공허하게 느껴져 그만두고말았다.

《박동무의 말에서는… 낡은 시대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고있어요,》 하던 원옥회의 비난이 불쾌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떠나가는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젊은 기사의 표정도 떠올랐다.

《…떠나가면 어떡합니까. 일은 방금 시작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은데…》

그러자 마음은 더욱 심란해지고 기분도 걷잡을수 없이 흐려지는것이다.

잘 다녀가라는 혜영의 인사에 대답하고는 승강대에 올랐다.

경쾌하게 기적을 울리며 렬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석에 앉아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박성국은 눈을 감았다.

아무런 결실도 없이 또다시 떠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은 한량없이 쓸쓸했다.

과학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만 한 일을 해놓으려고 이날이때까지 얼마나 고심했던가. 늘 병석에 누워있으면서도 남편의 사업에 관심하며 남편을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와하던 세상떠난 안해가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 유치원에서 지내며 아버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있을 철없는 딸애가 애절하게 그리워졌다. 떨어지지 않겠다는것을 아버지는 아주 중요한 일때문에 꼭 가야 한다고 달래고 타이르면서 눈물이 글썽해진 아이 손을 간신히 떼여놓았었다.

그렇게 떠나다니면서 지금까지 자기는 대체 무슨 일을 했으며 생활에 어떤 기여를 했단 말인가. 과학을 사랑하며 학구적인 지향도 높은 자기가 어째서 아무것도 해놓지 못했단 말인가!…

지그시 감고있는 그의 두눈굽에 뜨거운 눈물이 괴여오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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