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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사랑의 기슭


10


가로등이 밝은 거리를 지나다가 박성국은 식당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기요.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울적하구만.》

혜영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따라들어갔다. 퇴근무렵이여서 식당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구석진 자리에 있는 빈 식탁에 마주앉았다.

《난 맥주나 마시겠소. 혜영동문?… 더운 차에 속 넣은 빵이 좋겠지.》

기다리는 동안 박성국은 팔굽으로 식탁을 고이고 머리를 떨어뜨린채 말이 없었다. 연구실에서 있었던 론쟁때문인지 그의 기분은 흐려있었다.

접대원이 음식을 가져다놓은 뒤에도 그는 거품이 넘쳐날듯 한 맥주고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쳤다.

한모금 마시고 고뿌를 내려놓고서야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구단광연구실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누만.》

혜영은 차잔을 받쳐들고 김이 오르는 분홍빛액체를 들여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술을 대군 했다. 박성국의 말이 불안을 자아내는데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과 방금 그들의 옆식탁에 들어와앉은 손님들이 모두 자기만을 여겨보는듯 하여 몸가짐이 부자연스러워지는것이였다.

《게다가 원옥희라는 녀자는 참 가관이더군, 그 파고드는 성미가.》

《좋은 언니예요.》

혜영은 여전히 사기고뿌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박성국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자라는건 외모로나 심장으로나 부드럽고 아름다와야겠는데 너무 딱딱하거던, 땅벌처럼 쏘기나 하고…》

《인정이 있는 언니예요, 아는것도 많고.》

《그럴수도 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던진 박성국은 고뿌를 들어 들이키고나서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뭐 그런 얘기를 하자는건 아니요. 당면한 사업을 두고 그 동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게 문제지. 벌써부터 공업시험으로 넘어가다니! 난 쓰라린 실패도 겪었던 사람으로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소.

보오, 조금전에… 중간공장에서는 로가 멎어서지 않았나?》

《그건 원료공정때문이였어요.》

《물론 그렇소. 한데 야금공업, 특히 구단광야금에서는 원료예비처리공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로행정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요. 이런건 그 동무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있을거요.》

《성구기가 여러해동안 쓰지 않던것이여서 이따금 말썽을 일으킨다더군요.》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해도 그런 소형성구기로써는 공업로에 먹일 구단광을 다 빚어낼수가 없소. 그걸 대형화한다는것은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고…》

혜영은 잠자코 있었다.

그 분야는 깊이 모르고있었던것이다.

이때 건너편 식탁에서 관자노리를 고이고 앉아있던 청년이 불쑥 물었다.

《왜 불가능합니까?》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으므로 혜영은 눈길을 돌렸다. 아니나다를가 강기석이 거기 앉아있었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저쪽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시우?》

혜영은 반갑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는 동무예요.》 하고 그 녀자는 나직이 박성국에게 속삭였다.

《말씀도중에 안됐습니다만 전 그 일에 관심이 있어서 묻는겁니다.》

박성국은 마뜩지 않게 청년을 훑어보고있었다.

《동문 대체 누굽니까?》

《실례했습니다. 제강소에 있습니다. 회전로 현장기사입니다.》

기석이와 마주앉아있는 안태호는 친구의 일이 불안한지 고개를 숙이고 식탁모서리를 들여다보고있었다.

《회전로기사라-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동무의 사업과는 아직 관계되지 않소.》

《말씀하는 뜻을 리해할만 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관계되게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러니 기사가 생각하지 않을수 있습니까?》

《흥미있소. 그래… 동무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할수 있소.

성구기의 종류가 여러가지인데 어느 종류든지 대형화하는 경우엔 가동률이 떨어지오. 금속공업에서는 더욱 그렇소. 성구공업이 발전되였다는 다른 나라에서도 그것때문에 애를 먹고있소.

나는 몇해전에 접시형으로 종형성구기를 만드는데 참가했지만 다 해놓고 보니 시원치 못했소.

파철이 되여 로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그 제철소에 있을거요. 이젠 알만 하오?》

《모르겠습니다. 그건 하나의 현상일뿐이지 과학기술적인 근거는 아닙니다.》

《남의 말을 믿지 않겠으면 제 손으로 만들어보구려.》

《생각은 하고있습니다.》

《흠, 용사로군!》

박성국은 어처구니없어 웃으며 혜영이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녀자는 머리를 짓수굿하고 저가락으로 접시우에 무엇인가를 그리고있었다. 마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듯 방심한 표정이였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긴장하여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동무의 앞길엔 창창한 길만이 열릴거요.》

과장된 칭찬을 하면서 박성국은 호기심에 끌려 물었다.

《학교는 어디를 나왔소?》

《공업대학입니다.》

《김책공대?》

《아니요.포항공대.》

《포항공대? 그건 어디 있소?》

《여기 공장대학입니다.》

기석은 버젓하게 대답했으나 박성국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시에 피로감을 느낀듯 잠자코 있다가 인사치레로 한마디 했다.

《괜찮구만.》

그리고는 고개를 젖히며 맥주를 마저 들이키고나서 식탁우에 고뿌를 밀어놓았다.

《혜영동무, 우린 가보지.》

《네.》

대답은 했으나 처녀는 일어서지 않았다.

박성국은 뒤늦게야 눈치를 채고 《참, 아는 사이같은데 이야기를 하시우. 난 먼저 실례하겠소.》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출입문으로 향했다.

혜영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있다가 강기석을 향해 《그럼 후에 다시 만나요.》하고 속삭이고는 서둘지 않고 일어서더니 식탁들사이를 지나갔다.

《동문 저 녀자를 어떻게 아나?》

밖으로 사라지는 처녀의 뒤모습을 줄곧 바라보고있던 태호가 묵묵히 앉아있는 기석을 향해 물었다.

《나한테 편지하던 바로 그 동무야.》

《그-래?!》

태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커다란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말을 못했다.

《동문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만. 저런 요란한 미인을 붙잡은걸 보니. 게다가 지배인의 딸이겠다!》

《지배인의 딸이라니!》

기석은 어정쩡해서 물었으나 태호는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시치미를 떼지 말라구. 그만한 사이가 되였는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단 말이야?》

《지배인이란건 어느 지배인인가?》

《허, 이 친구 봐라. 밤새껏 울고나서 어느 마누라 초상인가 묻는다더니 자네야말로 그런 격이군. 저 녀자가 바로 우리 최병기지배인이 애지중지하는 딸이라네.》

《사실인가?》

기석은 눈섭을 찌프리고 침울하게 물었다.

《사실이네. 난 저 녀자의 이름은 모르지만 지배인의 딸이란건 확실하네. 방학에 놀러온걸 봤네. 매부네 집에 있을 때 말이야.》

《…》

기석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난 왜 여태 그런걸 모르고있었을가, 하긴 저 녀자도 나의 부모가 누구인가를 모르고있지.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언젠가는 다 알게 되리라고 믿으면서… 그렇지만 이건 심중한 문젠데…)

안태호는 맥주를 마시고나서 손바닥으로 입을 씻었다.

《하긴 저 녀자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걸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거야. 집에 와있은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나도 매부네 집에 있었으니 알지 그렇지 않으면야 알 도리가 없어, 어쨌든 괜찮네. 축하할 일이라니까.》

《…》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 강기석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굳어져있었다. 그것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 인연과 더불어 자기자신을 조소하는듯 한 부자연한 미소였다.

상념은 방금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고있었다.

공장대학을 졸업했다는 대답을 듣자 너그러운 아량으로 속심을 가리우며 《괜찮구만.》 하던 박성국의 인사치레며 그때 얼굴을 붉히고 눈길을 떨구던 혜영이의 모습…

(오늘 그 녀자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쳤을가. 내가 해임되여간 전 지배인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된다면 혜영이는 어떻게 나올가.…)하는 생각에 이끌리여 심각해있던 강기석은 자기로서는 어찌할수 없는 일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자 빙그레 웃고말았다.

지금의 자기가 어리석게 느껴졌던것이다.

《여어! 무얼 혼자서 좋아하나. 마저 마시자구, 사랑의 성공을 위해서!》

태호의 객적은 호언에 웃음으로 대답하며 맥주를 마시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기석의 눈앞에는 《후에 다시 만나요!》하고 속삭이던 처녀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우리들의 관계는 모든것이 자연스러웠고 자연스러웠던만큼 진실하고 아름다왔다. 앞으로의 일은… 생활이 해명하겠지.)

그는 그 처녀를 사랑하고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이 아무리 열렬하다 해도 결코 사랑을 애걸하지는 않을것이고 또한 동정을 받으면서 성취하려고도 하지 않을것이였다.…

×


혜영은 식당을 나와 박성국이와 함께 네거리까지 걸어왔다.

방금전의 그 청년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물음에 사귀게 된 경위를 추려서 간단히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게 바로 저런 친구들을 두고 하는 소리지.》하고 박성국은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기업소들에 다녀보면 저러루한 친구들이 더러 있소. 재간도 없지않고 공부도 얼마큼 하고, 그런 덕분으로 창의고안이나 기술혁신을 몇가지 하고는 못해낼 일이 없을것처럼 아무데서나 덤빈단 말이요. 일속을 아는 사람들이 제지시키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기만 하면 보수주의요, 경험주의요 하면서 초혁명적으로 나오거던. 안목이 제한되고 시야가 좁은 답답한 사람들이지.》

(아니예요. 그 동문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하고 혜영은 속으로 반박했으나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네거리에서 헤여져 혼자 걸어오면서도 내내 마음이 언짢았다.

(강동무가 과연 그런 사람일가?) 하는 의혹이 가슴한구석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추켜드는것이였다.

집에 들어서는 딸을 여겨보면서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째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너도 어디가 아프냐?》

《아무렇지도 않아요.》

혜영은 스스럼없이 대답했으나 기분은 좀처럼 가시여지지 않았다.

《영철이는 병이 든것 같다. 오늘도 직장에 못 나갔다.》

《병원에서는 뭐이래요?》

《진료소에 가봤더니 운동이 과해서 좀 피곤해하는것 같은데 며칠간 쉬고나서 보자더구나.》

《그럼 좀 쉬우지요 뭐.》

《너의 아버진 또 일하기 싫어서 그런다구 직장에 내보내라는구나.》

어머니는 어수선한 표정으로 어쩔바를 몰라하며 걱정이였다.

웃방에 누워있던 동생은 누이를 쳐다보면서 눈을 끔쩍거렸다. 자기때문에 일어나는 말썽거리가 재미있다는 뜻이였다. 동생의 머리를 짚어보았으나 열은 없었다.

《너 저녁 먹었니?》

누이의 물음에 영철은 누운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내 이 정신 봐라.》하고 아래방에서 어머니가 혼자소리하면서 무엇인가 부산하게 차리는것이였다.

《혜영아, 너 여기 내려와서 저녁을 먹어라. 어서.》

《먹고싶지 않아요. 어머니, 식당에서 먹었어요.》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먹고싶지도 않았거니와 다른 아무 일도 하고싶지 않았다.

(강동문 로동속에서 단련된 지식있고 재능있는 사람이야. 아버지가 말하는것처럼 제노릇을 할수 있는 성실하고 자립적인 사람…)

박성국이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혜영이였지만 이 일에서만은 그의 말을 믿고싶지 않았다. 보다는 자기 소견과 자기 감정을 믿고싶었다.

처녀는 불안이 스며드는 애타는 심정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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