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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사랑의 기슭


1


해가 지면 바다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밀려온다.

한낮때면 그리도 갈개던 바람이 어디서 잠들었는지 락조가 사라진 도시우엔 봄의 훈향이 고요히 떠돈다.

사나운 바람결에 몸부림치던 가로수들도 드디여 안정을 얻은듯 물이 오른 가지들을 정겹게 흐느적인다.

소생의 기쁨에 취한 대지의 숨결이 푸근하게 느껴지는 이런 저녁무렵이 되면 일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아빠트후원에서 서성거리며 혹은 담장모퉁이에서 이웃들과 두런두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누군 한다.

청년들이 사는 제강소합숙근처는 어느 마을보다 더 활기가 넘친다. 게으른 집들에서는 아직 봉창도 뜯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이미 어느 방을 막론하고 창문들이 자주 여닫겼으며 불빛밝은 그 방들에서 말소리며 웃음소리가 행길에까지 날아갔다.

늦은저녁때면 이 식솔많은 큰집은 안팎으로 흥성거렸다. 2층로대의 란간에 의지하여 뜰앞에 있는 동무들과 롱지거리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신발을 끌고 복도를 지나가며 부르는 노래소리도 들린다.

이런 시간에 아무도 방구석에 처박혀 잠을 자려 하지 않는다. 공부에 열을 내는 젊은이들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서라-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어느 누가 극성을 부린다면 그런대로 내버려두라. 아무에게나 꿈이 있고 방마다에 생활이 있으니까. …

강기석은 오늘도 생각에 잠겨 늦게야 합숙으로 돌아왔다.

이즈음 공장안팎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그를 못내 흥분시키고있었다.

아직 아무도 말한 사람이 없고 이렇다하게 밝혀진것은 없지만 기사인 그는 장차로 새로운 야금법을 완성하기 위한 시험생산이 벌어지리라는것을 예감하고있었던것이다.

얼마전 해안창고아래켠에 새로 건설을 벌려놓았을적만 해도 그는 그것이 원료장확장공사라고만 생각했었다. 사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들 말했다.

하지만 제강소구내에 있는 금속연구소의 중간공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어떤 암시를 던져주었고 그 일과 련관시켜보면 지금 건설하고있는 건물도 새로운 시험생산에 필요한 원료장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연구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공개하지 않을수 있겠지만 오랜 로동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상식으로써 능히 짐작이 가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눈앞에 다가오는 새로운 거창한 사업을 예감하면서 그는 기사로서 또 그 일에 남다른 관심을 품어오는 젊은이로서 못내 기대와 흥분속에 지내는터이였다.

합숙에 돌아오니 한방에 있는 친구는 어디로 나갈 차비를 하고있었다.

직장동무들과 극장에 간다는것이였다.

《함께… 가겠나?》하고 친구는 거울앞에서 면도를 하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공연인데?》

《무얼 한다더라? 잊었군. 좌우간… 아니, 동문 그만두라구.》

《그건 또 어째서?》

강기석은 호기심을 품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거울속에 있는 태호를 넘겨다보았다.

《사실은 구경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거기 우리 직장 처녀들이 온다네.》

속심을 털어놓은 태호는 게면쩍은듯 미간을 찌프렸으나 강기석은 유쾌하게 웃으며 핀잔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자구 청하지부터 말아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 친구에 대해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것이였다.

《하긴 그래.》하고 중얼거린 태호는 묵묵히 면도질을 계속하다가 생각난듯 말했다.

《참 기석이, 아까 우리 방에 문화회관 관장이 들렸댔어. 강동무가 있는가 하면서.》

《무슨 일로?》

《특별히 일이 있는건 아니고 그저 지나던 걸음에 들린 모양이야. 기타를 벗겨서 몇가락 타보면서 날더러 회관에 다니라고 권고하더군. 뭐 재능은 꽃피워야 된다나.》

실팍한 몸집에 얼굴도 둥그스름한 안태호는 성미도 느린 축이였다.

비누거품이 발린 한쪽볼을 마저 밀고 웃음이 어린 얼굴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난 예술인이 될 생각은 없고 그저 심심풀이로 이따금 탄다고 했더니 마악 성을 내지 않아.

〈예술은 심심풀이나 오락의 대상이 아니요!〉 하면서 제강소에는 예술에 대한 리해가 부족한 그러루한 인물들이 더러 있는데 그가 설사 지배인이라 해도 자기는 그런 축들을 존경하지 않을뿐더러 상대하고싶지도 않노라고 공연한 울분을 터뜨리더군. 허허허. 참 괴짜야.》

무심히 듣고있던 기석은 《관장은 재미있는 사람이네.》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재미있긴 뭐가 재미있어? 아무 일이나 제 성미대로 되지 않아 발딱거리는 사람이라던데.》

강기석은 어쩔수 없다는듯 웃으며 대답했다.

《혹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상은 예술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라네.》

《모를 소리야-》

하던 말을 그렇게 덮어버리고 옷을 차려입던 태호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난 나이들어보이는게지. 우리 직장 처녀들까지도 〈태호동무〉하고 부르는게 아니라 〈태호아저씨〉하고 부른단 말이야.》

《존경해서 그러는거겠지.》

《존경은 늙어서 받구 젊어선 사랑을 받아야지. 제길, 그런 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상한단 말이야.》

《심각한 문젠데…》하고 기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심각하다기보다 난처한 일이지.》

《방도를 찾아보자구.》

기석의 말에 태호는 픽 웃었다.

《방도는 무슨 방돈가!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걸.…》

《그럴순 없어. 아무 일에서건 방도는 있는거니까. 그런데 동문 말과 동작이 너무 느린게 탈이야. 원인은 거기 있어.》

《타고난 성미니 할수 없지.》

《허허, 참 야단이군. 팔자타령만 하지 말고 넥타이도 좀 색갈이 밝은걸 매라구.》

《우리 방엔 이런것뿐이야.》

《그렇다면 얻어라도 옵세.》

그렇게 말한 기석은 있을만 한 친구들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야기판을 벌리고있던 동무들이 그의 청을 듣고 유쾌하게 떠들었다.

《합숙게시판에 광고를 내야겠군.》

《허허- 기석동무에게 사치한 넥타이라-》

《광고는 후에 내고 물건이나 내놓게!》

《빌리는 주제에 독촉이군. 허!》

《처녀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지.》

《봄바람이 불었어.》

맞춤한것들을 꺼내보이면서 저마끔 한마디씩이다.

방에서 기다리던 태호는 가져온 물건을 들여다보고 헤벌쭉해졌다.

《이건 지내 요란하군. 좌우간 괜찮아.》

옷을 차려입고 기분이 유쾌해진 태호는 방을 나서면서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난 가서 놀다오겠으니 동문 방안에서 그 처녀 생각이나 하라구!》 그리고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나한테 인사시키겠다던 먼곳에 있는 미인 말이야.》

태호가 나간 뒤에 기석은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요즘 그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성구기의 대형화에 대한 생각도 지금은 어쩐지 어설프게만 떠돈다.

봄날저녁의 가슴설레이게 하는 정취때문인지, 창문밖 정원에서의 설렁거리는 분위기때문인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고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다. 상두대에 놓여있는 기타를 굽어보면서 태호가 말한 그 처녀를 생각했다. 뒤숭숭한 기분에 싸여 방안을 천천히 거닐던 그는 이윽고 기타를 집어들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천천히 줄을 더듬으며 가락을 뜯기 시작했다. 그윽한 상념에 싸여 전투적인 가요를 느리게 탔다.

허나 그 느린 곡조는 박력을 가해가는 웅글은 저음과 더불어 잠자고있던 감정을 억세게 불러일으키는상싶었다.

서정짙은 음향이 방안에 넘치였다. 얼굴을 숙이고 명상에 잠긴 그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지를 모르고있었다.

익숙된 곡을 거듭하여 타고있던 그는 하는 일이 마음싸지 않은듯 뚝 그쳐버렸다.

그러자 뜻하지 않게 박수소리가 터졌다. 어리둥절해진 그가 몸을 일으키자 창문밖에 모여섰던 처녀들이 와그르르 흩어졌다.

기석은 천천히 창문으로 다가갔다. 외등이 어슴푸레한 정원에서 처녀들이 명랑하게 웃어댔다.

《재청이예요, 재청…》

《여기 나와 타세요.》

《노래를 부를테니 반주해주세요.》

《반주값은 비싸다나!》

《호호호…》

《호호호…》

명랑하게 떠드는 처녀들을 바라보던 강기석은 어처구니없어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기타를 던지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반나마 닫혀진 창문으로 처녀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며 나직이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깍지낀 두손으로 뒤통수를 고이고 눈을 감으니 먼곳에 있는 그 처녀의 모습이 방불히 떠오는것이였다.…

그들은 려행길에서 알게 되였다.

그때 기석은 어느 한 야금기업소에 다녀오는 길이였다.

무더운 날씨여서 차칸의 손님들은 어지간히 지쳐있었다. 창곁에 앉은 녀자는 더위에 기진한듯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졸고있었다.

졸다가도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면서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주변을 이따금 돌아보는것이였다. 옆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사양했으며 점심식사도 마다하고 들큰한 랭차만을 들이키였다.

얼굴에 내리드리우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올리면서 흐르는 땀을 연송 훔치고있는 그 녀자의 모습은 초췌해보였고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렬차가 어느 중간역에서 멎었을 때 기석은 구내매점에 가서 구럭사과를 사들고왔다. 아직 맛이 들지 않은 푸른 올사과여서 아이들이나 좋아할것이였다.

그 녀자는 사과 한알을 천천히 먹고나더니 다시 한알을 더 먹었다.

그리고는 정신이 좀 드는지 두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올리면서 식당칸으로 갔다.

렬차가 서너정거장을 지나친 다음에야 제자리에 돌아왔는데 그 녀자의 달라진 모습에 모두들 의아해할 지경이였다. 화장실에 들려 세면을 하고 몸단장까지 한 모양으로 머리는 부드럽게 빗어넘기였고 크고 아름다운 눈에는 생기가 돌고있었다.

《이젠 살아났구만.》

나이지숙한 중년남자가 자리를 내주며 그렇게 말했을 때 곁에 있는 사람들도 유쾌하게 웃었고 처녀도 비로소 방싯이 미소를 지었다.

그 자태는 아름다왔다.

날씬한 몸매에 눈길이 다소곳한 매력있는 처녀였다.

그 녀자의 청신해진 모습은 좌중에 활기를 부여한듯싶었다.

이야기가 흥겹게 벌어졌다. 저켠 창가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이쪽으로 옮겨앉았다.

범속한 생활적인 이야기들이였지만 아름다운 녀자가 곁에 있는것으로 하여 공연히 흥이 나서 떠드는상싶었다.

기석은 처녀의 자태에 호기심을 품었으나 주변의 들뜬 분위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저켠의 빈자리로 옮겨갔다.

달리는 차창밖으로는 파도가 하얗게 뒤번져지는 동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이 펼쳐져있었다.

그는 푸른 바다며 흘러지나가는 아담한 포구마을이며 곡식들이 소리치며 자라는듯 한 들판을 바라보았다.

경쾌하게 기적을 울리며 렬차는 쉬임없이 달리고있었다.

《아유- 저쪽은 더 더운것 같아요.》

고개를 돌리니 바로 그 처녀가 맞은켠에 옮겨왔는데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미소를 보내고있었다.

《사과를 참 맛있게 먹었어요. 그걸 먹고나니 기운이 나더군요.》

《도움이 되였다니 기쁩니다.》하고 기석은 선선히 대답했다.

처녀는 다정한 어조로 렬차의 맞물림이며 종착역, 도착시간 등을 알아보다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것이였다.

대답을 듣고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거기까지 가요. 거기 어디서 일하세요?》

《제강소에 있습니다. 회전로 용해공이지요.》

처녀는 무슨 생각엔지 방긋이 미소를 지었다.

《회전로는 우리 사업과 인연이 있어요. 전 서부금속연구소에서 일해요.》

얼마전부터 그곳에서 일하는데 지금은 휴가를 받고 집에 간다는것이였다.

《그럼 우리 고장사람이구만.》

《하지만 전 그 도시를 잘 몰라요. 방학때 한두번 가보긴 했지만… 제가 학교다니는 기간에 집이 그쪽으로 이사갔어요.》

그 녀자가 철을 다루는 거치른 로동과 인연이 있는 직업에 종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귀였었다.

렬차가 종착역에 당도할무렵에 비가 쏟아졌다. 객차안이 술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내리면서 강기석은 그 녀자의 짐을 당반에서 내려주었다.

트렁크는 무거웠다. 금속시편들이 들어있다는것이였다. 화물로 부치려고 하는걸 시간이 늦어질가봐, 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겠기에 자기가 오는 걸음에 들고 떠났다는것이였다.

사연을 알게 되자 그 녀자를 도와주고싶었다.

트렁크를 들고 함께 내렸다.

그 녀자는 시가변두리에 있는 북부금속연구소에 먼저 들리겠다고 했다.

《길을 압니까?》

기다림칸출입문가에서 비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내다보며 그는 물었었다.

《전차종점에서 제철소와 반대쪽으로 좀 걸어간다더군요.》

《제철소정문을 압니까?》

《글쎄요. 물어보면 되겠지요.》

걱정스럽게 말하고는 어설프게 웃었다.

기석은 처녀의 짐을 들고 역사를 나서면서 말했다.

《갑시다.》

자기네 합숙은 가까이에 있었지만 멀리까지 가야 할 그 녀자를 도와주고싶었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낯설은 도시에서 비내리는 어둠속을 헤매고다닐 그 녀자의 정상이 가긍하게 여겨졌던것이다.

내리는 비로 하여 전차는 정류소마다에서 지체되였다. 종점까지 타고가는동안에도 그리고 비를 맞으며 연구소까지 걸어가는 구간에서도 그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처녀는 미안해하면서도 말을 걸지 못했고 강기석이 또한 말없이 걷기만 했었다.

그때 그가 말을 하지 않았던것은 내리는 비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렇다하게 할말도 없었기때문이였다.

따라오는 처녀가 《아직 먼가요?》하고 간신히 물었을 때 그는 《좀더 가면 됩니다.》하고 짤막히 대답했을뿐이다.

처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속에 불안이 깃들어있음을 처음엔 느끼지 못했었다.

청년의 성격도 심정도 알길이 없었던 그 녀자에게는 함께 걸어가면서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태도가 리해되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는다던 길을 자꾸만 걸어가는것이 이상스러웠던 모양이다.

고마움을 느끼며 미안해하던 처녀가 불안을 품기 시작하고 불안이 차츰 의혹으로 변하여 겁을 먹고있다는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연구소가 어느쯤에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때에야 그 녀자의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처음 오는 길이여서 멀어보일수도 있습니다.》하고 안심시켜주었다. 했으나 그 녀자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듯싶었다.

넓지 않은 행길을 꺾어들자 외등이 환한 정문이 나섰고 그앞에서 걸음을 멈춘 강기석이 《다 왔습니다.》하고 말했을 때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내리깔았었다.

무거운 트렁크를 넘겨주자 처녀는 고마움을 어떻게 표시했으면 좋을지 몰라하며 말을 하고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기석은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비내리는 어둠속을 돌따서 걸어갔다.

그렇게 서로 이름도 모르고 헤여졌었다.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만큼 그후 제강소구내에서 만났을 때 기쁨과 놀라움도 그만큼 컸었다.

처녀는 제강소의 회전로공정을 견학하는중이였다.

그 녀자와 함께 다니던 제강소 기사장도 그들의 반가운 해후를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그뒤 기사장은 아마 처녀에게 기석의 이야기를 좋게 해준 모양이였다.

자기를 대하는 처녀의 태도에서 기석은 그것을 느꼈다.

《강동문 기사더군요.》

처녀는 처음 렬차에서 만났을 때의 대화를 념두에 두고 책망하는 투로 말하는것이였다.

《현장기사로 된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전까지는 용해공이였소.》

기석은 소박하게 대답했는데 처녀는 호기심을 품고 찬찬히 여겨보는것이였다.

그후 어느날 기사장이 전화로 그를 찾아 서부연구소에 있는 최혜영동무가 생산공정을 배우겠다는데 좀 도와주라고 했었다.

그에게는 그 부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무들이 일하고있는 회전로현장을 아름다운 처녀와 함께 다닌다는것이 마음싸지 않았던것이다.

《제가 무얼 안다고 그런 일을 맡깁니까? 로숙한 기능공들도 있고 오랜 기사들도 수두룩한데…》

《그럼 책임기사나 나많은 기술자들이 그런 일까지 해야겠소? 그러지 않아도 할일들이 많은데…》

《…》

《공식적인 지시는 아니요. 시간이 있으면 도와주라는거지. 그 동무가 지금 여기 와있는데… 좀 수고해주우.》

이튿날부터 처녀는 찾아오기 시작했다.

연구소에 있는 녀동무가 찾아왔다는 전달을 받고도 그는 하던 일 끝내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안내하여 다니면서 아는껏 해설해주는수밖에 없었다.

마치도 연구사업에만 파묻혀있던 로학자에게 풋내기현장기사로서 생산공정을 해설해주는듯 한 정중한 태도로 설명하면서 일할 때에는 잘 쓰지 않던 학술적인 용어들을 애써 찾아내군 했다.

혜영은 말없이 들으면서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중간공장설비와 차이나는 점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그들의 사이가 얼마큼 익숙해진 어느날이였다. 원료장입장치를 돌아본 두사람이 저탄장쪽으로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전동차의 창문으로 운전공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가무스레해진 얼굴에 두눈만 반짝거리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혜영은 호호호 웃어버렸다. 총각애들처럼 채양 긴 모자를 눌러쓴데다 탄먼지가 오른 운전공의 얼굴이 웃음을 자아냈던것이다. 그때 강기석은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피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설픈 미소가 떠돌고있었는데 그것은 그 녀자의 때아닌 웃음을 유감스러워하면서도 현장에 자주 다니지 않던 연구사임을 리해하는 미소였다.

그들은 서먹한 기분으로 그곳을 지나쳤다. 혜영이도 자기가 경솔했음을 느꼈던 모양이다.

《전 남동문가 했댔어요.》하고 그 녀자는 기분없이 중얼거렸다.

《일하는 과정에 먼지를 들쓰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지요. 그리고 또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기사들, 기술자들의 잘못이지요.》

혜영은 눈길을 떨구고 걸으면서 풀기없이 뇌였다.

《하긴… 그래요.》

그것은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자기의 행동에 대한 반성인듯싶었다.

심란해진 처녀의 모습을 보면서 강기석은 그 녀자에 대해 더 따뜻한 애착심을 느꼈었다.

그 자그마한 일로 하여 그들사이는 은연중 더 가까와진듯싶었다.

그후부터 기석은 공정에 대한 설명을 되도록 알기 쉽게 하면서도 처녀를 더욱 친근하게 대했으며 성실하게 도와주었다.

그무렵에 기석은 오래동안 고심해오던 새 제진장치의 도안을 완성하고있었는데 처녀는 그 사실도 알고있었으며 호기심을 품고 묻는것이였다.

《그건 대단한것이 아닙니다. 다만 회전로현장을 더 일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고싶은 욕망에서 새롭게 시도했던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강기석은 야금공업이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는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있지만 회전로에서의 철생산이 야금공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는가 하는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회전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야금공업의 주체적발전을 위해 귀중한 싹으로 보아주시고 원대한 구상을 무르익혀오신 중요하고 의의있는 야금로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이 로의 생산수준을 높이며 이곳을 더 일하기 좋은 일터로 꾸리는것은 야금일군이라면 누구나가 힘써야 할 절박한 과업이지요.》

그는 처녀앞에서 자기의 포부며 지향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녀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는것이였다.

평범하게 보아오던 청년에게서 제강소에 대해서, 나라의 야금공업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웅심깊은 인간을 보았던것이다.

그 녀자는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것을 알고싶어하는듯 했으나 정작 나타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였다.

《강동무에겐 제강소설비들의 성능과 구조를 상세하게 기록한 수첩이 열권도 더 있다더군요.》

강기석은 난처한듯 입을 다물고있다가 대답했다.

《명백하게 아는것만이 힘이 되지요. 현장에선 일반적인 지식만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처녀는 침착하게 그를 지켜보는데 미소가 고즈넉이 어린 아름다운 눈길엔 리해와 감동이 어려있었다.

기석이 역시 그 처녀의 솔직하고 성실한 마음을 알게 된 뒤로 더욱 마음이 끌리였고 그 녀자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기다려지는것이였다.

십여일이 지나서 최혜영이 자기 연구소로 갈무렵엔 서로 잊을수 없는 사이로 되여버렸다.

떠나기 전날엔 함께 바다가를 산책했었다. 시름없이 거니는 그 길에서도 그들은 기분이 어울리는대로 자연에 대해서, 회전로에 대해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두서없이 나눈 그 활기띤 이야기속에서도 청춘들의 심장은 뜨겁게 화답하고있었다.

애틋한 정을 가슴에 남긴채 헤여졌다.

떠나는 날 그 녀자는 옥색웃옷에 깃이 퍼진 담청색치마를 입고 찾아왔었다. 그 자태는 청신하고 아름다왔다.

그동안 많이 배워주어 고맙노라고 인사하면서 바래우러 나가겠다는데 대해서는 사양했다.

《그건 안돼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올수 있어요.》

그리고는 상글상글 웃으며 덧붙였었다.

《편지도 하지 마세요.》

명랑한 표정과는 모순되는 그 말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수 없었다.

《아직은 그저 우리 두사람만 알고지내요!》

처녀는 명랑한 웃음과 수수께끼같은 말을 남긴채 떠나갔고 그 아름다운 자태는 청년의 가슴에 귀중하게 남았다.

오래동안 기다렸으나 편지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장의 소식이 날아왔었다. 담담하게 쓴 그 편지에서 처녀는 뜻깊은 나날들을 정겹게 회상했었다.

자기는 연구소의 신입생으로 바쁘면서도 보람찬 나날을 보낸다는것과 어쩌면 사업상용무로 이쪽에 올것 같다는 사연이였다.

편지끝에서 그 녀자는 강기석이 고심해 완성하던 제진장치의 운명에도 관심했었다. 한마디로 가볍게 물은 말이였지만 은근한 기대가 어려있었다.

기석은 행복감에 싸여 회답을 했으나 제진장치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안은 완성됐으나 그것의 운명에는 그사이 곡절이 있었고 그뒤 금속공업부에 제기했으나 거기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것이다.

정열을 기울여 처녀작을 완성한 신진작가는 그것을 편집부에 발송한 다음달부터 투고한 잡지의 목차를 부지런히 뒤져보기마련이다. 경험이 없는 그는 크낙한 기대가 어린 자기 작품이 사업에 분주한 편집부의 원고더미속에 파묻혀 오래동안 순차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것도 그러다가 어느 한 실무적인 편집원의 눈길을 거쳐 가치없는것으로 평가되는 경우에는 처리가 급하지 않은 사무대상으로 인정되여 다른 서류장속에 깊숙이 보관되여버린다는것도 알수 없는것이다.

두달, 석달, 넉달… 잡지가 올 때마다 목차를 뒤지고 혹은 우편함을 살피면서 안타까이 지내는 동안에 차츰 실망과 더불어 자기 재능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그것을 점차 망각의 심연속에 밀어버리는것이다.

만일 그가 창조의 지향이 뚜렷하고 열정이 끓는 사람이라면 첫 실패에 락심하지 않고 생활속에서 문제를 찾아내여 새로운 주제를 탐구하기에 심혈을 기울일것이다. …

기석이도 지금은 생활이 제기하고있는 새로운 종자, 아직은 준비중에 있지만 장차 반드시 큰 사업으로 벌어질 주체적인 철생산을 위한 성구기의 대형화에 마음을 쓰고있었다.

이런 형편이여서 그는 처녀에게 제진장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밝히지 않았었다.

얼마전에 혜영에게서는 두번째 편지가 왔었다. 문안만 적은 짧은 편지였으나 련련한 정이 글줄마다에 흐르고있었다.

만일 이때 꿈같은 회상을 깨뜨린 문기척소리만 아니였던들 그는 잊을수 없는 일들을 끝없이 더듬고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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