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기까지

 

정 종 여(미술가)

 

1914년 12월 30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출생.

1935년부터 일본 오사까미술학교에서 공부.

1954년부터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으로 사업.

1964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으로 사업.

1984년 12월 30일 사망.

인민예술가, 부교수.

                                                           

 

 

아름드리거목도 뿌리에서 시작되고 만사람이 다니는 대통로도 초행길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자랑스러운 민족회화로 나날이 만발해가는 조선화의 풍요로운 화원을 볼 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여 무성한 꽃들을 자래운, 주체미술의 초행길을 걸어간 선대미술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화가 정종여도 그러한 선구자들중의 한사람이다.

 

 

《해변》

 

정종여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면 상동이다.

1914년 12월 가난한 농가의 셋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거창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벌써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늘 꽃과 새, 나비, 닭 등 주위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즐겨 그렸는데 어찌나 생동했던지 교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허나 초가지붕을 짓누르는 가난의 무게는 금방 싹트기 시작한 나어린 재능마저 압박해왔다.

그는 1928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살림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진학은 꿈조차 꿀수 없었다. 별수없이 약국과 개인병원을 떠돌며 잡심부름을 몇달 하던 그는 일자리를 찾아 현해탄을 건느게 되였다.

도꾜까지 흘러간 그는 신문배달도 해보고 자전거와 전구를 만드는 자그마한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하면서 이국살이의 설음을 지긋지긋하도록 맛보아야만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미술에 대한 동경만은 접을수 없었던 그는 낮에는 가네모도전구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구로자와초상화야간학교에 다니면서 한해동안 짬짬이 인물초상 그리는 법을 수업받았다.

1935년에 그는 직업적인 화가가 될 꿈을 안고 오사까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주간학교에 입학하기는 했으나 그의 처지로서는 힘에 부치는 고학생활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학비를 물기 위해 아침이면 신문을 배달하고 밤이면 삯일을 찾아 거리를 헤매이군 하였다. 거기다가 일본인들의 멸시와 천대까지 겹치여 모든것을 엎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몇번이나 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기에는 그림을 그리려는 그의 열망이 너무도 강렬했다.

어느날 그는 내가의 물오리를 그린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게 되였다. 으슥한 작은 내가에서 깃을 다듬으며 한가로이 노니는 다섯마리의 물오리를 형상한 그림이였다. 무더운 여름날 물비린내가 풍겨오는듯 한 내가에는 낯익은 풀들이 무성해있는데 저녁노을에 반사된 물오리들의 깃색갈이 야릇한 감동을 자아내며 정종여의 마음에 젖어들었다. 아마도 그 깃색갈은 호분(조선화색감으로 쓰이는 조개가루)을 섞어 조색한것 같았다.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 설레였다.

(우리는 이렇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데 모국의 산천은 어이하여 저토록 아름다운것일가?)

자기도 그려보고싶었다. 맑은 공기가 차흐르던 소나무숲과 발가숭이몸으로 자갈밭에 뒹굴던 소꿉시절의 강변을, 초가우에 박이 달처럼 걸려있던 고향동네를 그려보고싶었다.

조상의 얼과 숨결은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피와 살속에 스며드는 모양이다. 심신이 약해질 때마다 태를 묻고 자라난 그곳을 화폭에 담고싶어, 옛 미술가들의 뛰여난 필치에 고무되여 그는 다시금 붓을 잡군 하였다.

하여 미술학교에 다니는 기간 그는 고향산천을 그린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중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비교적 폭이 있게 형상한 조선화작품들로 《해인사계곡풍경》(1937년), 《가을교외》(1938년), 《산촌의 물소리》(1939년), 《3월의 눈》(1940년), 《홍류동의 봄》(1940년) 등이 있는데 《3월의 눈》은 동백꽃우에 눈이 소복하게 내려쌓인것을 진채화법으로 선명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젊은 미술가의 장래를 내다볼수 있게 한 우수한 그림으로 당시 화단의 눈길을 끌었다.

걸음마다 들씌워지는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며 전문부 2년과 동양화과 3년, 연구과 2년을 마친 정종여는 마침내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에 귀국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고향과 강화도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청계》라는 호로 여러 전람회들에 조선화작품들을 출품하였다. 그중에는 일본미술가들의 작품을 누르고 입상되여 조선사람의 예술적재능을 시위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석굴암의 내부정경을 시간적계기와 일치시켜 정취가 느껴지게 그린 조선화 《석굴암의 아침》(1941년)이라든가 《눈내린 뜰》(1942년), 《기다리는 사람들》(1944년) 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해방전에 창작한 그의 작품들가운데는 근로하는 조선녀성의 모습을 정확하면서 부드러운 필치로 묘사한 《해변》이라는 제목의 조선화도 있다.

바다가의 두 녀인을 그린 작품에서는 머리에 임을 인 녀인과 바위우에 앉아있는 녀인의 성격이 그들의 행동과 얼굴표정을 통하여 생동하게 전달되고있다. 비록 바다물속에서 조개를 줏고 미역을 따내며 힘들게 살아가는 녀인들이지만 그들의 건장한 체구와 소박한 모습, 더우기 조선옷을 입은 형상을 직관성있게 그림으로써 정종여는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민족성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나가는 우리 인민의 강의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일제의 가혹한 략탈과 탄압에 항거하여나선 우리 인민의 보다 적극적인 투쟁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있었다.

화가는 화폭우에 묘사대상을 옮기기 전에 자기자신의 마음을 옮겨놓는다.

그는 여직 해변가에 머무르고있었다. 투쟁의 격랑으로 높뛰는 시대의 바다 한복판으로 뛰여들지 못하고있었다.

해방전 그의 작품들이 주로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자연풍경을 그리는데 머무른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하지만 일제의 악랄한 민족문화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미술의 정화인 조선화를 계속 고수해나간것은 애국심이 없이는 할수 없는 일이였다.

정종여는 8. 15해방을 서울에서 맞았다.

민족재생의 희열속에서 31살의 젊은 화가는 자기의 앞날을 그려보았다.

10여년세월이 흐른 뒤 정종여는 남녘에 있는 어느 한 벗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환희로웠던 그 나날에 대하여 이렇게 추억하였다.

《… 우리 나라가 일제기반에서 해방된 초기 형과 운포와 나 셋이 종로5가 어느 2층집에서 긴긴 밤을 새우며 열렬하게 토론하던 그때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때 우리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우리 조선화를 어떻게 살려나갈것인가에 대하여, 그 전망에 대하여 밤가는줄 모르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 눈앞에는 조선화의 휘황한 장래가 떠올랐고 자신들을 힘과 신념을 가진 용기백배한 사람으로 느꼈었지요. …》

그는 새 조선의 미술발전을 위해 주추돌이 되리라 결심하고 서울 성신녀자중학교와 배재중학교의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후대교육사업에 정열을 기울였다.

하지만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미국이 또다시 이 땅우에 민족비운의 먹장구름을 몰아왔던것이다.

자주냐 사대냐? 독립이냐 예속이냐?

격동의 해방정국이 들이대는 준엄한 이 질문앞에서 시대의 해변가에 서있던 정종여 역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어제날의 망국노들은 저들이 주인된 진정한 나라를 갈망하고있었다. 사대와 굴종으로 얼룩진 오욕의 력사가 자주독립국가를 념원하고있었다.

겨레의 생사흥망을 판가름해야 할 시각에 과연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허무한 환상을 피워올리는 자욱한 담배연기속에 묻혀 서유럽의 로맨스나 감상하고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양키병정들의 초상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든가, 고관대작들의 명함장을 얻어 제 그림이나 파는데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무릇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성을 떠나, 량심과 도덕을 떠나 아름다움에 대해 론한다는것은 한갖 궤변에 불과할따름이다. 넘어진자와 약한자를 위하여 말하기 두려워하는자에게, 허위와 불의에 침을 뱉기 두려워하는자에게 어찌 참다운 예술가의 심장이 있다고 말할수 있단 말인가.

정종여는 인민이 가는 길을, 정의와 량심의 길을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사찰풍경이나 꽃, 새, 풀과 벌레 등을 담던 화폭에 사나운 파도와 같이 일떠선 인민의 모습을 담기 시작하였다.

조선화 《5월의 데모》(1946년), 《병든 서울》(1947년), 《분노한 인민》(1947년), 《산사람들》(1948년), 《돌아온 사람들》(1948년), 《고향》(1949년), 《해녀》(1949년), 《금강산설로》(1949년), 《금강산초여름》(1949년) 등은 그 시기에 정종여가 창작한 작품들이다. 《5월의 데모》와 《분노한 인민》, 《산사람들》과 같은 주제화들에서 화가는 반미구국투쟁에 일떠선 남조선인민들의 항거의 모습을 조선화의 필법으로 격조높이 형상하고있다.

고루한 상아탑속에 갇혀 목가적인 아름다움만을 좇던 그가 드디여 시대정신에 민감한 화가로 되여 현실의 한복판에 용약 뛰여들었던것이다.

미제와 주구들은 그의 미술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반동들의 박해를 피하여 대구와 부산일대로 피해다니면서 뜻을 같이하는 미술가들과 함께 7인전을 여는 등 진보적인 창작활동과 사회운동을 계속 벌려나갔다.

정의와 진리, 참다운 아름다움을 갈망하던 정종여는 전쟁이 일어나자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민심의 용용한 대하에 합류해나섰다.

해방된 남녘땅에서 문화선전성 문화국에서 사업하던 그는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애국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배낭속에 벼루와 붓을 넣어가지고 북으로 들어왔다. 천여리가 넘는 간고한 후퇴길이였다. 험산준령을 넘고 죽음의 고비들을 헤치며 밤낮으로 가야 했던 길이였지만 그 길이 진정한 삶의 길이고 력사앞에 떳떳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그들은 끝까지 걸을수 있었다.

그후 정종여는 중앙미술제작소 회화부 부원으로, 미술가동맹 창작가로 활동하면서 전쟁 전기간 우리 인민과 인민군군인들을 승리에로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전투적인 미술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한 작품들로 조선화 《농민들속에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1951년), 선전화 《미제에 죽음을 주라》(1950년), 《현물세를 제때에 바치자》(1951년), 조선화 《2차로 서울을 해방한 인민군》(1951년), 《진격》(1951년), 《바다가 보인다》(1952년), 《전선수송》(1952년) 등과 그밖에 《습격조》, 《야간춘경》, 《빨찌산》 등이 있다.

사생결단의 판가리싸움이 계속되는 전쟁의 엄혹한 현실은 무엇보다도 미술작품에서 강한 선동성과 설득력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는 결국 조형성에만 적지 않게 치우치고있던 종래의 묘사방법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이 쉽게 리해하고 감동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평이하고 통속적인 형상들을 창조함으로써만 해결될수 있었다. 정종여의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는 그런 측면에서 우수한 전례를 창조한 작품이였다.

《조선미술사》 2권(사회과학출판사 1990년) 26페지에는 이렇게 서술되여있다.

《들끓는 현실과 근로인민의 투쟁과 생활을 반영한 주제의 조선화는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보다 활발히 창작되였다. 조선화화가들은 낡은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전시의 준엄한 현실속에 대담하게 뛰여들어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과 후방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을 주제로 한 조선화작품들을 련이어 내놓았다.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미제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데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인민군용사들이 패주하는 미제침략자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남으로 진격하던 길에서 높은 령마루에 올라 지척에 펼쳐진 남해바다가를 바라보고있는 감동적인 형상을 통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장병들이 발휘한 영웅적위훈을 보여주었다.

작품에 창조된 인간과 자연형상들은 선묘법과 몰골법을 배합한 현대조선화의 풍부한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있다. 특히 인물의 성격적모습과 남해의 고유한 자연미를 선명하고 힘있게 그려낸것은 해방직후에 전통적인 조선화화법을 우리 인민의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서 이룩한 귀중한 성과로 된다.》

작품은 사회주의나라에서 열렸던 순회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여 우리 인민군대의 사상정신적풍모를 널리 선전하였다.

자기의 운명을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결합시킬 때 인간은 강해지며 삶의 보람과 사명을 찾게 된다. 어느덧 정종여는 시대의 앞장에서 대중을 선도해나가는 미더운 인민의 예술가로 성장한것이다.

가렬한 전화의 나날이였다. 하건만 그속에서도 사람들은 억세게 숨쉬며 새 생활의 봄을 마중해가고있었다.

중앙미술제작소가 오늘의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소개되여있던 나날 정종여는 박인숙이라는 한 처녀를 알게 되였다. 순천이 고향인 박인숙은 해방후 평양에 나와 수예를 배우고 당시 미술제작소에서 수를 놓고있던 녀성이였다.

두사람은 진실하고 소박한 성격의 공통성으로 하여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그들은 새 가정을 이루었다.

 

 

《5월의 농촌》

 

전후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회화인 조선화의 앞길에는 빛나는 전성기가 펼쳐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조선화를 토대로 하여 우리 미술을 발전시킬데 대한 독창적인 방침을 제시하시였던것이다.

너무나도 기나긴 세월 민족사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 교조주의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것이 수령님의 단호한 결심이였다.

발전하는 현실과 인민의 지향을 반영한 문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드높여주는 주체적인 문화를 건설하시려는것이 그이의 드팀없는 의지였다.

온 나라 미술가들이 흥분했다. 그중에서도 정종여를 비롯한 조선화화가들의 격정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지난날 홍수처럼 쓸어들어오는 서양화에 밀려 퇴색한 동양문명의 슬픈 그림자마냥 외면당하던 조선화였다. 그러던 민족회화가 마침내 당당한 자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화가들 자신이 그 벅찬 시대의 담당자로 되였으니 감격과 기쁨인들 오죽 컸으랴.

정녕 위인이 안겨준 크나큰 행운이였고 영광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구상에 따라 평양미술대학에 조선화강좌가 처음으로 생겨나고 조선화계의 여러 중진들을 교단으로 불렀을 때 정종여는 맨 먼저 대학으로 달려갔다. 그는 조선화강좌의 첫 교원으로, 강좌장으로 되였다. 그때가 1954년 1월이였다.

우리 인민의 미감과 시대의 요구에 맞게 조선화를 발전시키는것은 미술부문에서 주체를 세우고 미술의 모든 종류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선차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관건적인 과업이였다.

그것은 아직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로동당시대의 화가들이 처음으로 개척해야 할 전인미답의 생소한 길이였다. 수많은 미학적문제들을 새롭게 해결하여야 했고 형상수법들도 보다 풍부하게 탐구하여야 했다. 론쟁들도 많았고 이러저러한 시도들도 많았다. 하지만 초행길은 역시 다난하고 힘겨운 법이다.

허다하게 쌓이는 리론실천적과제들앞에서 많은 미술가들이 갑론을박하며 창작적번민에 모대기고있던 1954년 8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느 한 중학교에서 열린 평양미술대학 교원, 학생들의 제1차 미술작품전람회장을 찾아주시였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를 보내시며 차에서 내리시는 수령님을 뵈옵는 순간 정종여를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눈굽이 화끈해지고말았다.

그이께서 교원들이 얼마전에 공급받은것과 꼭같은 흰 아마직여름옷을 입고계시였던것이다.

학생들앞에 나서자면 외모가 단정해야 한다시며 교육자들을 보다 번듯하게 내세우시려 늘 마음을 쓰시면서도 자신께서는 언제나 수수한 생활에서 만족을 찾으시는 수령님의 숭고한 인민적풍모가 가슴을 울려왔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무려 세시간동안에 걸쳐 잠시도 쉬지 않으시고 전람회장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보아주시였다.

전시된 작품들중 대부분이 학생들의 실습작품들이였던지라 미숙한 점들도 적지 않았지만 수령님께서는 어린애의 첫 걸음마를 대견스레 바라보는 친부모의 심정으로 보시는 작품마다 치하를 주시며 우리 학생들이 현실을 보는 안목이 바로서고 조선사람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그릴줄 안다고 그토록 기뻐하시였다.

1층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시고 2층으로 올라가신 수령님께서는 정종여가 그린 조선화 《금강산》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 작품은 우리 나라의 명승인 금강산의 일경을 대담하게 채색화로 그린 풍경화였다.

이윽토록 그림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아주 잘된 작품이라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조선화는 이 그림과 같이 선명하고 아름다와야 하며 앞으로 조선화는 이렇게 발전시켜나가는것이 좋겠다고, 조선화는 언제나 조선사람의 감정에 맞는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은 정종여의 가슴속에 산울림과도 같은 환성의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그렇다. 조선화의 기준은 다름아닌 우리 민족의 감정이였고 우리 인민의 미감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그해 10월 당시 문화선전상과 하신 담화에서도 조선화를 발전시키자면 채색화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화를 오늘의 현실에 맞게 발전시키는데 힘을 넣어 우리 인민의 생활감정과 정서에 맞는 참다운 인민적인 미술로,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혁명적인 미술로 되도록 할데 대하여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수령님의 교시를 자자구구 되새기면서 정종여는 그때까지 미술계를 지배하고있던 구태의연한 창작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창작태도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화가들이 묵화를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면 조선화의 전통을 살리는것처럼 생각하고있은것도 결국에는 옛것에만 매여달리면서 인민들의 생활감정을 보려 하지 않은데 주되는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서고분이나 안악고분의 호화찬란한 벽화를 통해 알수 있듯이 조선화는 오래전부터 채색화로 발전하여왔고 먹도 초기에는 조선화의 한개 채색에 불과하던것이 아닌가. 그러던것이 《청빈락도》를 숭상하는 일부 문인들의 수묵화가 수백년간 류행되면서 채색화의 화려한 전통은 점차 희미해지고 먹그림을 조선화의 주류인것처럼 여기는 외곡된 편견이 생겨나게 되였던것이다.

물론 지난 시기 수묵화도 현실의 모습을 이러저러하게 취급했지만 생활의 다양한 내용과 인민대중의 미적요구를 충족시키는데서는 단조로움을 면할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정종여의 눈앞에 문득 대동문의 자태가 떠올랐다.

평양의 대동문은 왜정때부터 퇴색된채로 조국해방전쟁까지 겪어왔는데 그 검뿌연 재빛의 모습은 마치 먹으로 그린 묵화를 련상시키군 하였다. 그러던 대동문이 전후에 들어와 새롭게 단청을 하였다. 봄을 맞아 초록의 생명이 다투어 움트는 대동강변에 수려하고 웅장하게 드러난 대동문의 새 모습은 흡사 아름다운 한폭의 진채화를 방불케 하였다.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우아하게 단청된 대동문앞에서 감탄해마지 않던 광경을 상기하며 정종여는 조선화의 채색화와 묵화를 두고 깊이 생각해보았다.

《인민들은 확실히 색을 사랑한다. 건강하고 젊고 씩씩한 빛갈을, 침착하고 점잖은 빛갈을, 청신하고 화려한 빛갈을 사랑한다. 채색화, 이는 일반군중속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그림이다.

인민의 생활, 그들의 요구와 지향, 그들의 감정과 견해들은 진정한 예술을 먹여살리며 그것에 내용을 부여하는 생신한 원천이다. …》

그가 어느 기회에 토로한 자기의 소감이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는 복고주의의 기성틀에 얽매여있던 미술가들에게 조선화의 유구한 전통을 새시대의 요구에 맞게 훌륭히 계승발전시켜나갈수 있는 창조의 지침을 안겨주었다.

정종여는 그이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조선화를 묵화로부터 전면적인 채색화로 발전시키며 시대의 정신과 인민의 감정을 민족적형식의 화폭으로 진실하게 옮겨놓는 창작활동에 자신의 온넋을 쏟아부었다.

조선화 《5월의 농촌》(1956년)은 그 과정에 창작된 화가의 대표작중의 하나로서 당시의 채색화들가운데서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그림에는 해살 따사로운 봄날의 그윽한 농촌정서가 펼쳐져있다.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햇병아리들을 품고있는 어미닭과 한가로이 모이를 쫏고있는 닭들, 모이통에 내려앉은 한마리의 참새와 그것을 쫓아달라는듯 어미닭을 쳐다보는 병아리, 변두를 곧추세운채 참새를 노려보는듯 한 수닭, 그런가 하면 봄풀이 돋아난 들판우로 뻗은 복숭아나무가지며 아름답게 피여난 꽃송이들…

번들거리는 직사광선도 강한 그늘이나 반사도 취급되여있지 않지만 여유있는 공간감이 느껴지는 화폭전체에서는 포근하고 따스한 봄빛이 흘러넘치고있다. 몰골기법을 적용한 봄물이 오른 나무가지며 연두빛애잎들, 구륵법과 우림법을 활용한 엄지닭의 섬세한 형상 등은 진채화의 양상에 맞게 조화롭게 통일되여있음으로써 봄을 맞은 농촌마을의 정겨운 서정을 실감있게 나타내고있다.

보이는 정경도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정경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림을 바라보느라면 전쟁을 이겨낸 이 땅우에 봄은 찾아와 그 봄의 훈기속에서 한껏 기지개를 펴며 새 생활창조에 떨쳐나선 전후 우리 농촌의 웃음과 화기, 약동하는 기상이 훈훈하게 안겨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단순히 화조화라고만 볼수는 없는것이다.

조선화 《5월의 농촌》은 전통적인 채색화형식을 시대적요구에 맞게 발전시킨것으로 하여 국가미술전람회에서 1등으로 당선되였으며 현대조선화의 채색화발전에서 선도적역할을 논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 나라 미술사에 당당히 기록되여있다.

정종여는 그 작품외에도 담채와 농채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채로운 채색화들을 많이 창작함으로써 조선화를 채색화로 발전시키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화가 정종여가 조선화발전을 위해 남긴 또 하나의 공로는 시대에 민감한 적극적인 인물주제화창작으로 조선화를 새로운 높이에 올려세우는데 이바지한것이다.

전후 우리 조국의 력사는 말그대로 기적의 세월이였다. 미제가 백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장담하던 페허우에서 날에날마다 세기를 주름잡는 자랑찬 창조물들이 용을 쓰며 솟구쳐올랐다. 사람들의 심장도 커지고 안목도 넓어졌다. 세인들은 경이적인 변혁이 펼쳐지는 이 땅을 가리켜 《천리마조선》이라고 놀라움에 넘쳐 부르고있었다.

허나 조선화계에서는 비약하는 현실에 미처 따라서지 못하고있었다. 많은 조선화화가들이 종래의 관념대로 여전히 화조화나 풍경화에만 집착하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투쟁모습을 담은 인물화에는 관심을 덜 돌리고있었고 설사 인물화를 취급하는 경우에도 기껏해서 풍속화나 미인도를 그리는것이 고작이였다. 아직도 미술부문에서는 조선화가 묘사기법의 보수성과 재료상 제약성으로 하여 인물주제작품창작에서 서양화만 못하다는 그릇된 견해가 지배하고있었다.

문제는 화가들의 뒤떨어진 창작자세에 있었다. 시대는 줄기차게 전진하는데 화가들은 의연히 진부한 창작관념을 털어버리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로부터 정종여 역시 한때는 어지간히 진통을 겪기도 하였었다.

1955년에 그는 《까치의 습격》이라는 조선화를 발표한적이 있었다. 큰 화폭에 가지들이 얼크러져 뻗어나간 거목 한대가 서있었는데 구렝이 한마리가 까치둥지를 터는 바람에 급해난 까치들이 가로세로 떼를 지어 구렝이한테로 날아들며 요동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였다.

구도와 필치에서 화가의 기량이 느껴지는 그림이였으나 대중의 호평을 받지 못하였고 평론계에서는 미학적안목이 바로서지 못하여 자연에 있는것을 맹목적으로 옮겨놓았다고 작품을 비판하였다.

당시 정종여는 미술대학 조선화강좌장이였는데 강좌에는 조선화과를 2기로 졸업한 리률선이라는 신인교원이 있었다. 전쟁시기 한다리를 잃은 영예군인으로서 후날 40여년간이나 조선화학부장으로 사업한 리률선은 학생시절부터 정종여를 비롯한 여러 스승들의 남다른 관심을 받아온 제자였다.

어느날 그가 강좌장실에 들어가니 정종여가 퇴근시간이 퍽 지났는데도 번뇌에 잠긴 모습으로 방에 앉아있더라는것이다. 리률선이 왜 퇴근하지 않는가고 하자 스승은 불쑥 그에게 자기가 앞으로도 꽤 그림을 그려낼것 같은가고 묻는것이였다. 아마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그림때문에 고민이 컸던것 같았다. 젊은 영예군인은 의기소침해있는 스승에게 힘을 내라고, 한번 실패했다고 주저앉으면 되겠는가고 고무해주었다고 한다.

사실 그때 정종여의 심중은 여간만 무거운것이 아니였다. 단지 작품을 부정당해서만이 아니였다. 자기가 시대의 진군에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고있다는 뼈아픈 자책감때문이였다. 락오자의 모습으로는 결코 제자들앞에 나설수 없다는 량심의 준렬한 꾸짖음때문이였다.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는 예술은 대중의 버림을 받기마련이다.

정종여는 벅찬 현실속에 뛰여들어 인민들의 투쟁과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것을 화폭에 진실하게 담을 때 인민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수 있고 그들의 투쟁을 고무할수 있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의 정당성을 자신의 교훈을 통해 페부로 절감하였다. 그는 새로운 각오를 품고 들끓는 시대의 맥박에 심장의 박동을 맞추어나갔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수천척 지하막장에서 로력적위훈을 창조하고있는 성흥광산 로동계급을 형상한 조선화 《굴진》(1955년)을 창작하였다.

옆으로 전개된 화면에는 착암기를 잡고 굴진을 다그치고있는 광산로동계급의 불꽃튀는 투쟁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형상되여있다. 긴장된 로동활동은 사선으로 놓여진 로동자들의 전진적인 자세와 힘있는 필치에서 강조되고있으며 조화로운 인물배치와 매개 인물들의 능숙한 작업동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주인공들의 락천적인 성격과 흥겨운 일솜씨를 진실하게 전달하고있다.

조선화 《굴진》은 그 시기에 창작된 사회주의현실주제의 인물화들중에서 손꼽히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국가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정종여가 창작한 인물주제화들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작품을 꼽으라면 두말할것없이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를 말해야 할것이다.

1958년에 발표된 이 그림은 현대조선화의 성과작중 하나로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다.

작품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을 도와나선 고성인민들의 투쟁모습을 전형화된 매 인물들의 깊이있는 형상을 통하여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옆으로 길게 전개된 화폭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이겨내며 온정령을 넘어 전선으로 탄약과 식량을 운반해가는 늙은이들과 녀인들의 군상이 펼쳐져있다.

한손으로 지팽이를 짚고 다른 한손으로는 탄약상자를 지운 황소의 고삐를 틀어쥔채 화폭의 중심에서 힘있게 걸어가는 로인의 형상은 이 작품의 주제사상을 해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세찬 눈보라를 맞받아 침착하고 확신성있게 걸음을 옮기는 로인의 얼굴과 거동에서 우리는 굴할줄 모르는 의지와 확고부동성을 뚜렷이 느끼게 된다.

로인의 앞뒤로 탄약상자며 밥함지를 이고 지고 비탈길을 톺아오르는 녀인들과 로인들, 중년들의 행렬이 눈보라속에 우련히 드러나보인다. 대렬의 전진방향과 반대로 돌아서서 폭음에 놀라 머리를 높이 쳐든 말의 고삐를 잡아채는 인민군전사의 다급한 행동은 전선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것을 인상깊게 보여주는 세부처리이다. 눈보라속으로 앞서 사라지는 녀인들의 드바쁜 움직임과 허리부러진 나무들, 거품을 내뿜으며 씩씩거리는 황소 등도 작품의 긴박한 극적정황과 잘 어울린다.

대오의 긴 행렬을 화면종심깊이에까지 끌어간 여운있는 구도형식이며 겨울날의 차거운 공기를 담고있는 은회색의 공간처리, 강약과 률동이 살아있는 기백있는 붓질, 대상의 성격에 맞게 씌여진 박력있는 선은 주인공들의 강한 운동감과 긴장된 심리상태를 선명하게 전달하고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전해져온다. 룡을 그리고난 후에 마지막으로 눈알을 그려넣었더니 그 룡이 진짜 룡이 되여 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성구로서 점 하나가 진짜 룡과 가짜 룡을 구별지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림에서 안깐힘을 쓰는 소의 부릅뜬 눈알을 붓으로 한번 꾹 찍어 정확하게 그려낸 필치는 조선화가 아니고서는 해결할수 없는 형상의 묘기이며 예술은 점 하나로 결정된다는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특히 작품에서 구성의 핵으로 되는 중심대상들을 강조하고 거기서 환경과 정황을 암시하면서 배경처리를 생략한것은 조선화의 집약적형상수법을 최대한으로 높이 살려낸 결과에 이루어진 귀중한 창작성과이다. 이 그림에서 여백을 살려 형상의 선명성과 간결성을 보장한 좋은 경험은 그후 조선화창작에서 널리 일반화되였다.

당시의 한 문예잡지는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고있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는 구상의 크기와 깊이로 하여 뛰여난 작품이다. 여기서 옛 전통을 잘 살려서 6폭의 병풍형식을 취하였다. 대상의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띤 이 그림은 조선화의 전통적인 특성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여있지마는 투쟁에 궐기한 인민의 굳은 단결은 화폭에서 붓을 아주 아껴가면서 간결하게 전개시켰다. 그 형상수단의 간결성, 이야기전개의 엄준성, 견고한 형상력은 놀랄만 하다.》

준엄한 서사시적화폭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상으로 펼쳐보이기까지에는 화가의 고심어린 노력이 깃들어있다.

초기의 그림초안에서는 화가자신이 그림속으로 뛰여들지 못하고 그림밖에 서있었기때문에 단순히 정황과 지형을 설명하는데 머무르고있었다. 그후 주변의 산들을 제외하고 원호행렬만을 따로 떼여보았지만 여전히 내용을 설명하는데 불과하였다. 문제는 전선원호에 나선 인민들가운데서 전형을 포착하는것이였다.

등장인물들의 구체적인 성격과 내면세계를 연구하는 과정에 화가는 자신이 직접 소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며 고삐를 잡아당기는 로인이 되고 밥함지를 인 녀인이 되기도 하며 그림속으로 뛰여들었다. 구도가 변경되고 화폭에 긴박감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물들을 사생하는데서도 애로가 많았다. 그림의 내용은 눈보라치는 겨울인데 창작하던 시기는 한여름철이였던지라 눈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감정표현들이 더위에 녹아버릴 위구가 있었다. 모델들에게 겨울옷을 입히기도 어려웠고 솜옷이 나타내는 선을 파악하는데서도 난관이 있었다. 더우기 탄약을 지운 소를 사생할 때에는 모델을 사용하기 곤난했기때문에 점토로 소를 빚어 모델을 대신하였다.

폭음에 놀란 말을 형상하기 위해 습작한것만도 50여장이나 되였다. 보통의 환경에서는 그러한 동작을 잘 볼수가 없어 우마차사업소에 찾아가 우정 말을 때리기도 해보고 아이들을 시켜 고삐를 높이 치켜들게도 해보면서 사생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초안을 완성하고 기본그림에 달라붙기에 앞서 화가가 제일 고심한것은 조선화의 다양한 화법들을 대상의 특성에 맞게 어떻게 활용할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화가는 장승업의 매화도병풍에서 볼수 있는 기백과 필치, 김홍도의 신선도병풍에서 풍겨오는 구도와 선묘의 세련됨, 김명국의 《박쥐를 날리며》에서 느껴지는 묵색과 붓놀림의 묘미 등 옛 조선화화가들의 형상기법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인물주제의 대작을 전통적인 조선화수법으로 형상하려는 첫 시도였던만큼 창작과정은 쉽지 않았다. 붓을 많이 대면 필치가 시들고 색도 혼탁하여지기때문에 화면의 어느 부분이건 붓을 두번이상 댈수가 없었다. 완성과정에서 어려운 고비들을 수없이 겪었지만 화가는 지칠줄 모르는 노력을 기울여 끝끝내 조선화분야에서 시대를 반영한 인물주제화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야말았다.

조선화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는 인물화에서 조선화가 서양화를 따르지 못한다는 허무주의적관념을 타파하고 조선화의 무궁무진한 형상적위력을 높이 시위한 의의있는 작품으로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1등으로 당선되였으며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에서 열린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여 금메달을 받았다.

작품은 조선화 《5월의 농촌》과 함께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정종여의 유가족들은 화가를 곁에 세우시고 환히 웃으시며 조선화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를 보아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그날의 영상이 모셔진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

화가는 그후에도 천리마시대의 주인공들을 형상한 조선화 《용해공들》(1965년), 《풍어》(1966년)와 같은 우수한 주제화들을 내놓음으로써 조선화가 주제를 다양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현실을 소극적으로 반영하던 지난 시기의 결함들을 극복하고 시대와 인민에게 참답게 복무하는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민족회화로 발전되도록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인민들의 정서에 맞게 조선화에 채색을 전면적으로 도입한것이라든가 화조화를 전문하던 화가로서 인물주제화창작에 솔선 달라붙은것을 보면 정종여는 확실히 대담한 미술가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는 조선화의 여러가지 형상수법들을 살려쓰고 발전시키는데서도 대담하였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에 적용된 시원스러운 여백처리와 인물들을 묘사한 확고하고 탄력있는 붓질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후대들의 추억에 새겨진 모습

 

정종여는 비단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조선화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그는 1954년부터 1964년까지의 10년기간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강좌장으로 있으면서 주체미술의 주역들로 될 수많은 후비들을 육성하였다.

전후의 초기만 해도 조선화계에서는 복고주의가 우심했던지라 적지 않은 기성화가들이 옛것만 고집하면서 젊은 화가들의 진취적태도에 제동을 걸고있었다. 하지만 정종여는 제자들의 혈기왕성한 의욕과 새로운 시도들을 적극 지지해주군 하였다. 정영만, 정창모, 리률선, 리창 등 후날의 유명한 중진들이 그의 고무를 받으며 대학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열가지를 그리자면 한가지에라도 정확히 정통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 현지에 나가 묘사대상을 구체적으로 사생하여야 한다고 늘쌍 강조하군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뜬금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것을 질색하였으며 철저히 현실에 의거하여 창작하는 사실주의화가였다. 그가 그린 조선화 《5월의 농촌》을 보아도 복숭아나무의 가지며 꽃들도 그렇고 닭들도 깃털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여있다.

미술교육에서 실기교육이 가지는 중요성을 잘 알고있던 그는 강의만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활동으로 학생들을 이끌어나갔다. 그가 남긴 력작들의 대부분이 대학교편을 잡고있던 나날에 창작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화가로서뿐아니라 교육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하기에 정종여는 제자들에게 성의를 다한 인간적인 스승이였다고 후배들은 말하고있다.

조선화 《락동강할아버지》를 창작하여 우리 미술사에 자욱을 남긴 인민예술가 리창은 대학시절 정종여의 신세를 많이 진 제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인 리용악이다. 정종여와 리용악은 남녘에 있을 때부터 친분을 맺어온 사이였다.

당시 미술대학은 전쟁때 소개되여있던 평안북도 룡천군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산두리에는 큰 기와집들이 많았는데 그 집들을 교사로 리용하고 학생들은 농가들에 분숙하고있었다.

그때 정종여는 어느 농가의 웃방에 화실을 꾸려놓고있었는데 친지의 아들인 리창을 그곳에 기숙하게 하면서 개별지도도 주고 교원의 창작과정도 지켜보게 하였다고 한다.

정종여는 학자풍이라기보다 농민풍에 가까왔고 농가에서 나서자라서인지 자연과 농촌생활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산두리시절 누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자체로 심어먹으면 되지 않느냐며 실천에 옮기군 하였고 어딜 가서나 밤도 줏고 도토리도 줏고 약초도 즐겨 캐군 하였다. 길을 가다가도 눈길을 끄는 풀을 발견하면 맨손으로 캐서 흙을 툭툭 털고는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씹어보기도 하는것이 그의 례사로운 모습이였다.

산두리에서 10리가량 가면 백마강이 있는데 한번은 정종여가 리창을 데리고 뱀장어를 잡으러 강에 나갔던적이 있었다. 부인은 큰일이나 칠듯이 떠나는 그들에게 삶은 감자를 점심삼아 싸주었다. 감자는 가던 도중에 들판에 퍼더앉아 다 먹어치우고 백마강에 당도한 그들은 종일토록 송사리 한마리 건지지 못한채 헛물만 켜고말았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무안해서 오는 도중에 뱀장어를 사들고 와서는 부인에게 자기가 잡아왔다고 능청을 부리던 스승의 모습을 리창은 웃으며 회상하였다.

사람들은 정종여에 대해 박식하고 생활을 사랑하는 다감한 예술가였다고 한결같이 회억하고있다.

해박한 상식가였던 그는 특히 의학과 음식분야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있었다. 어렸을 때 약국과 개인병원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언제나 의학서적들을 즐겨 읽었고 건강상식이 풍부했으며 반의사로 불리울만큼 의술에도 능했다.

그는 음식과 관련하여서도 아는것이 무척 많아 여럿이 모여앉아 함께 식사할 때마다 하나하나의 음식들을 가리키면서 이건 뭐가 좋고 저건 어디에 좋다는 식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었는가 하면 때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잉어회를 치기도 하고 추어탕을 끓이기도 하였다는것이다. 그 덕에 리률선도 스승에게서 추어탕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부인 역시 남편에게서 여러가지 음식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오락회가 벌어지면 닭소리를 신통하게 내여 모두를 웃기군 하였다는 그, 휘파람으로 노래를 멋지게 형상하군 하였다는 로화가의 유쾌하던 모습은 오늘도 사람들의 추억속에 인상깊게 새겨져있다.

흔히 화가들속에서 나도는 말이 유화가들은 큼직큼직하고 승벽심이 강한데 비해 조선화가들은 대체로 성정이 착하다고들 한다. 비슷한 말인지 정종여도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이였다.

그는 사람들앞에서 틀을 차리는 성미가 아니였고 소탈하고 붙임새가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도 구면지기처럼 터놓고 대하군 하였다.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인간적으로 따랐고 스승의 풍모에서 많은것을 배웠다.

정종여는 많은 후비들을 키워냈을뿐아니라 조선화의 우월한 화법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기 위한 연구사업도 적극 벌려 《채색화에 대하여》, 《묵화에 대하여》, 《채묵화에 대하여》, 《조선화재료에 대한 사용법》 등 일련의 교수요강들을 작성하였으며 조선화실기기초를 완성하고 조선화교육을 과학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중요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와 함께 《혁명적인 채색화를 힘차게 발전시키자》, 《조선화분야에서 채색화발전을 위한 몇가지 의견》 등 조선화발전과 관련한 여러 론문들도 활발히 집필하였다.

1964년에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우리의 민족회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모든 힘을 다 바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밑에 미술계에서 혁명적전환이 이룩되던 나날에 정종여는 조선화부문의 책임일군으로서 조선화를 기본으로 우리 미술을 발전시켜나갈데 대한 주체적문예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그는 조선화화가의 대렬을 결정적으로 늘이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진행된 조선화실기강습을 여러차례 조직집행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할 미술작품들을 전부 조선화로 창작하도록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미술가동맹에서 사업하는 나날에도 그는 조선화 《만경대설경》(1970년), 《청봉의 아침》(1973년, 리병호와 합작), 《양어장의 봄》(1977년), 《모란꽃과 병아리》(1977년), 《쏘가리》(1978년) 등 우수한 작품들을 내놓았으며 1978년 이후에는 만수대창작사 조선화단에 있으면서 조선화 《비파와 밀화부리》(1979년), 《모란꽃》(1979년), 《무궁화》(1981년)를 비롯한 많은 성과작들을 내놓았다.

정종여는 몰골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기법의 능수였다.

그는 현실을 깊이 연구하고 묘사대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 힘썼으며 그것을 자기의것으로 소화하기 전에는 절대로 붓을 들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가나 늘 속사첩을 들고 다녔다. 이른아침 이슬을 헤치며 모란꽃을 해부학적으로 파고들어 탐구하였고 해종일 양어장에서 잉어의 움직임을 관찰하였는가 하면 닭과 제비를 잡아놓고 털들을 세여보며 그 생태의 밑바닥까지 놓침없이 살피고 습작하는것은 그가 창작에 앞서 반드시 진행한 어길수 없는 공정이였다. 때문에 그의 붓은 대상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기초우에서 대담하고 정확하였다.

언젠가 꽃을 그리려는 아들을 데리고 대동강가에 나갔었는데 꽃이 피여나는 모습을 직접 보아야 한다면서 밤을 새워가며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을 다 관찰하게 하고서야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진지한 창작태도를 잘 말해주고있다.

정종여는 그림을 그릴 때 사색을 많이 하면서 그리는 화가였다. 큰 화조화를 하루동안에 일필휘지하여 완성하는 화가도 있었지만 그의 경우에는 얼마간 그리다가는 붓을 놓고 구도며 색상을 두고 사색해보다가 다시금 붓을 들고 하는 식으로 여러날이 걸려서야 완성을 하는 류형이였다.

그는 수많은 몰골작품들을 창작하였는바 그중 꽃으로는 모란꽃을, 동물로는 닭을 제일 많이 그렸다.

미술후비육성사업에서 세운 공로로 그는 1961년에 부교수의 학직을 수여받았으며 미술창작에서 이룩한 공로로 1974년에 공훈예술가, 1982년에는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정종여는 1951년부터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이였으며 1953년부터는 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집행위원으로, 1961년이후에는 문예총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한생에 걸쳐 1 900여점의 조선화작품들을 창작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조선미술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들에 국보작품으로 소장되고 이딸리아, 프랑스 등 서유럽나라들에도 널리 소개되였다.

정종여는 1984년 12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신문 《민주조선》과 《평양신문》에 부고가 실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사망한지 이태후인 1986년 12월에 정관철, 정종여 2인전람회를 열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전쟁시기부터 1981년사이에 창작한 그의 작품들가운데서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6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였으며 수많은 관람자들이 찾아와 로화가를 추억하였다.

화가는 오래전에 우리곁을 떠났으나 민족문화를 중시하는 조선로동당의 정책에 의하여 조선화의 기법은 오늘도 꿋꿋이 이어지고있다. 정종여의 가정만 놓고보아도 아버지에게서 붓쥐는 법을 익히던 그의 맏아들 정희진이 어느덧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실장으로, 공훈예술가로 재능을 떨치고있는데 이어 오늘은 그의 손자가 평양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있다.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품에 안겨 민족회화의 전성시대를 직접 체험하면서 조선화의 거장으로 성장한 정종여의 한생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와 예술에 대해 다시금 깊이 음미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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