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무대에서 찾은 한생의 진리

 

   

한 진 섭(연극배우)

                       

1914년 5월 16일 경기도 김포군에서 출생.

1935년 금희좌에서 배우생활 시작.

1946년 5월 중앙예술공작단(국립연극단의 전신)에서 활동.

전후에 국립연극극장 예술부총장으로 사업.

1994년 3월 12일 사망.

인민배우.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속에서 인민배우로 자라나 수많은 연극과 영화들에서 관록있는 연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그 은혜로운 품속에서 보람찬 무대생활로 한생을 마치고 애국렬사릉에 오른 인민배우 한진섭!

그가 걸어온 인생의 길은 북에 살건 남에 살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모두에게 귀중한 생의 진리를 체득시키고있다.

 

 

방황의 먼지오른 고달픈 청춘시절

 

한진섭은 1914년 5월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약암리 붉은바위마을에서 가난한 농사군 한응식의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이때부터 한진섭자신이 해방전 생활을 돌이켜보며 《방황하던 인생》, 《막벌이청춘》이라고 말하던 불우한 인생살이가 시작되였다.

고향에서 8살이 되던 1922년에 그는 없는 살림속에서도 지극한 부모들의 관심과 형제들의 후원속에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수 있었다.

배움에 대한 소원은 당시의 모든 조선소년들이 다 가지고있었지만 한진섭은 정말 미치다싶이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 향학열은 수업료미납때문에 눈물과 한숨으로 바뀌여질 때가 드문하였다.

째진 가난속에서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가정사정은 그토록 배움을 갈망하는 어린 한진섭의 꿈을 지켜주지 못하고 종시 보통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부모들의 아픈 가슴을 허비며 학교가겠다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였다. 공부는 둘째치고 먹고 살기 위한 초보적인 생존조건이 어린 소년의 앞길을 위협하였던것이다.

아글타글 애쓰던 끝에 그는 1927년 가을에 인천항 소년인부로 들어가 힘겨운 육체적로동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생활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직업으로는 될수 없었다. 나이로 보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로동인데다가 그 일자리마저 거덜이 날 때가 드문하였다. 배가 들어와야 짐을 싣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는 그 일이 공고한 직업으로 될수 없은것은 당연한 리치였다.

발을 벋디디고 밥벌이를 할수 있는 직업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던 한진섭은 1931년 가을에 서울로 가서 금강당이라는 활판인쇄소 로동자로 입직하여 일하다가 그후 일자리를 옮겨 문화당인쇄합작사와 대성당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로동에 종사하였다.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당시 인쇄소에서 출판하고있던 신문과 잡지들을 읽어보고 남몰래 좌익서적도 탐독하게 된 그는 사람 못살게 되여먹은 세상의 리치를 깨닫게 되였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일에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싶은 불같은 희망을 품게 되였다.

그는 1935년 여름에 비밀독서회에 망라되여 맑스, 엥겔스와 레닌의 저서들을 비롯한 사회주의리론서적들,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고취하는 도서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던중 당시 일제가 가장 엄중시하며 눈초리를 돌리던 좌익서적의 하나인 《붉은 지붕밑》이 발각되는 바람에 한진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였다.

순간이라도 어물거리다가 잡히는 날에는 목이 날아나든가 꽁꽁 묶이워 감옥으로 끌려갈수 있었기에 그가 급기야 피신처로 찾아간 곳이 당시 3류급의 가설포류랑극단인 금희좌였다. 말그대로 거친 포목으로 림시 막을 둘러 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하며 떠다니는 극단이여서 배우들의 잔등에서 늘 등짐이 떠날줄 모르는 극단아닌 극단이였다.

인천공립보통학교시절부터 연극에 남다른 취미와 지향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너무 밑천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했던지라 그는 주저없이 극단에 들어갔다.

하지만 극단에 들어간 초기에는 공연무대를 타지 못하고 무대잡부로서 궂은일 마른일을 도맡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후에 본인이 회상자료에도 썼지만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토스레를 걸친 연약한 등에 무거운 짐짝을 걸머지고 류랑하는 극단을 따라다니는 짐군노릇은 참으로 눈물겨운 고통의 하루하루였다.

적지 않은 기간 잡부로 일하면서 어쩌다가 군중역에 출연해본것이 그의 첫 예술활동이였다.

이처럼 체포령을 피하여 새로운 방랑을 시작한 때로부터 한해반가까이 되던 1936년 가을 한진섭은 2류급의 극단인 황금좌의 광대로 취직하여 연극 《법정에 선 기생》에서 청년대학생역을 수행하게 되였다.

여기서 배우로서의 장끼를 보여주고 인정을 받은 그는 련이어 연극 《장수월》에서 주인공 장수월역을 맡게 되였다. 결국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무대배우로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리도 공경하고 하고싶었던 일, 가고싶었던 길인 연극예술창조의 소원은 쉬이 성취되지 않았다.

어디에나 먹이를 노리는 독사들이 득실거리던 악의 땅에서 그한테는 꿈을 펼칠 무대가 아니라 죽음의 올가미만이 늘 뒤따르고있었다.

황금좌의 무대에서 두번째 봄을 맞이하던 1938년 3월 독서회책임자였던 현기백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고있다는것을 직감한 그는 조국을 떠나 이국땅 만주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부터 거의 두해가까이 그는 형용키 어려운 가련하고 서러운 눈물의 방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승원에서 베이징으로, 베이징에서 심양으로, 심양에서 평양과 인천으로 변성명을 하고 숨어다니는 방랑객이 되다나니 연극무대 같은것은 그림의 떡이였고 당장 입에 풀칠을 하는것이 목전의 과제로 나섰다.

한진섭은 서리바람이 배회하는 락엽무지에 방랑객의 몸을 묻고 밤을 지새우면서 서럽게 울군 하였다.

울어도 땅을 쳐도 자기 몸을 따뜻이 감싸줄 집이 없었고 돌봐줄 손길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눈물겹고 고달픈 방랑의 먼지를 들쓰며 차츰 나라잃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자기자신의 운명과 결부시켜보면서 이대로는 살수 없어 투쟁에 일떠선 사람들의 장거가 얼마나 의로운것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였다.

귀중한 청춘시절을 놈들의 눈을 피해다니며 호구지책을 위한 방랑으로 흘러보내는 허무감과 수치감으로 모대기던 끝에 그는 가고싶은 길을 걸으면서 왜놈들과 그 앞잡이놈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사람들을 찬양하고 고무격려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1939년 11월 만주의 할빈으로 들어간 한진섭은 조선연극연구협회에 가입하였으며 연극 《길》과 《포구에서》를 창조공연하는데 참가하였다.

그런데 일본고등계의 검열관놈들은 이 작품들이 불온한 경향을 가지고있다고 하면서 무작정 공연을 중지시키고 이 단체에 추방령을 내리였다.

하는수 없이 심양으로 가는 창조집단을 따라걸으며 이국땅에 와서까지 일본놈들의 채찍밑에서 옹크리고 살아야 하는 식민지노예의 신세를 절감하였다.

그는 가슴속에서 굳어지기 시작한 반일애국감정을 폭발시켜 무대우에 무엇인가 더 크고 의로운 형상을 펼쳐놓아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옳았다는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1941년 봄 서울에 있던 중앙극단인 반월무대의 연극인들이 심양으로 밀려들어왔는데 리유인즉 일제놈들이 무조건 연극을 일본말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였으므로 이에 항거하여 극단이 통채로 이동해왔다는것이였다.

남의 나라 땅인 만주에서라도 우리 말로 연극을 계속해보려는 이들의 념원은 절절하면서도 눈물겨운것이였다.

침략자가 주인이 되여버린 조국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던 처지, 조선사람이면서도 조선말을 하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이 가슴찢기는 현실을 두고 연극인들은 설음에 울고 분노로 주먹을 떨면서 이를 갈았다.

과연 내 나라, 내 민족을 살릴 구세주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은 왜놈들이 이름만 들어도 기절초풍하는 김일성빨찌산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심정으로 마음과 마음을 합쳐 새로운 극단인 동방을 조직하고 공연활동을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한진섭과 함께 해방후 연극예술활동에서 이름이 높았던 배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방은 태여나 첫울음을 터치기 바쁘게 된서리를 맞지 않으면 안되였다.

악독한 일제놈들은 만주국홍보처(검열기관)놈들을 부추기여 한진섭이네들이 조직운영하는 동방을 불순단체로 락인찍고 공연활동을 중지시키였으며 이것도 모자라 추방령까지 내리였다.

한진섭을 비롯한 동방성원들은 포악무도하고 잔인교활한 일제놈들의 이 책동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비겁하게 굴복한것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분연히 일어나 종횡무진의 이동공연을 결심하였다.

그들은 북대정자, 명월구, 돈화, 반석, 교하, 길림 등 조선사람들이 사는 부락과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일제놈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우리 말로 연극공연무대를 펼쳐놓군 하였다.

공연활동은 열을 띠고 진행되였으나 그 열성에 비하여 공연이 대중에게 주는 영향은 그리 혁명적인것이 못되였다.

그들은 대체로 《불사른 저고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과 같은 인정세태극을 공연하였는데 그것은 불공평한 사회, 돈이 판을 치는 사람 못살 착취사회에 대한 증오와 가난에 우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련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였다.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눕히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로 추동하는 정신세계와는 먼거리에 있는 공연내용은 적지 않은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연은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조국을 알게 하고 조국에 드리운 비운과 신음하는 인민들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특히는 조선말로 공연하는것을 허락치 않는 일제에 대한 항거인것으로 하여 반일의식고취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방랑하는 류랑극단으로 알려진 동방이 조국해방소식에 접한것은 심양을 떠난지 4년째 잡히던 때였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을 안고 심양으로 돌아온 한진섭과 연극인들은 평양으로 가겠는가 서울로 가겠는가를 놓고 의논을 벌리였다.

더러 서울로 가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한진섭은 가슴속에 원한만을 안겨준 서울로 갈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눈물겨운 방랑의 자욱이 수없이 찍힌 서울과 인천은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였다.

그는 서울이요 평양이요 하면서 갈 곳을 론하기 전에 우선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 말로, 우리 생활로 마음껏 극무대를 펼쳐보고싶은 욕망이 솟구쳐올랐다.

적지 않은 연극인들의 심정도 한진섭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동방의 연극인들은 심양을 떠나 도보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서 려장을 풀었다.

이때 한진섭은 해방된 조국에서 시작된 자기의 연극창조활동이 어떤 전변을 가져오게 될지, 자기가 어떠한 광망에 휩싸여 태양이 빛나는 하늘길을 걷게 될는지 알수도 예측할수도 없었다.

 

 

인생의 가치

 

배우의 가치는 연기술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하였다. 과연 그런것일가?

만약 그렇다면 한진섭이 연기를 잘하지 못하여 해방전에 그리도 불우한 인생행로를 겪으며 살아왔단 말인가?

한진섭의 쓰라린 체험은 배우의 가치가 결코 연기술의 높낮이에만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생활적으로 증명하여주고있다.

한진섭이 단장으로 있었던 극단 동방의 연극인들은 서둘러 조국인민들앞에서 자기들의 연극을 펼치였는데 당시 혁명적인 연극작품을 가지고있지 못했던 이들은 해방전 만주에서 떠돌며 공연하던 인정세태적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같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수밖에 없었다.

한진섭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홍도의 오빠역을 담당하였는데 해방된 조국의 앙양된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여서 그는 공연을 진행하면서도 내심 자신에 대한 불만감으로 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여 그는 《압록강》과 《어머니》를 창조하여 신의주시에서 공연활동을 벌리였으며 연극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서자 대담하게 어버이수령님을 형상한 연극 《조선빨찌산》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였다.

이것은 한진섭의 창조활동에서 사상정신적으로 커다란 전진이 아닐수 없었다.

연극인으로서 그의 사상적립장과 창작태도, 창조활동에서 그가 노는 역할은 극예술부문에서 결코 무시할수 없는것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런 연고로 하여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1945년 10월에 하신 교시에 따라 다음해인 1946년 5월에 조직된 예술단체의 하나인 중앙예술공작단(오늘의 국립연극단의 전신)으로 조동되게 되였다.

한진섭은 바로 이때부터 참다운 예술,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연극예술창조의 길에 들어설수 있게 되였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날에날마다 변화발전의 길을 걷게 되는 자기 운명의 걸음걸음을 두고 조국을 해방시켜주시고 우리 인민모두에게 자유와 행복, 삶의 희망을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였다.

그리고 매 인간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과 련결되여있으며 민족이 제 나라도 없이 다른 나라에 예속되여있으면 차라리 죽은 목숨보다도 못하다는것을 해방전과 해방후의 대비적인 생활체험을 통하여 뼈저리게 절감하고있었다.

한진섭이 중앙예술공작단으로 조동될 당시 이 집단에서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항일혁명투사들의 충직한 모습을 형상한 장막극 《뢰성》을 창조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 1돐을 앞두고 진행되고있는 이 연극을 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 경축공연작품으로 선정하고 지도해주시였으며 대표들과 함께 친히 공연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나라의 천만가지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일분일초의 시간을 얻어내기조차 힘드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연극을 몸소 지도하여주시는것을 직접 목격한 한진섭은 정처없이 떠돌던 연극인들의 불우한 인생이 이제야 운명의 보호자, 연극예술의 위대한 스승을 모시였구나 하는 행복감으로 눈굽을 적시였다.

그는 자기가 그리도 하고싶었던 일을 인제야 마음놓고 할수 있고 걷고싶었던 길을 인제야 비로소 마음껏 걸을수 있게 되였다는 희열로 하여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는 연극인들과 모든 예술창조자들의 진정한 삶의 품은 어버이수령님의 품이라는 진리를 실지생활을 통하여 터득한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48년 3월 5일 장막극 《백두산》(장편서사시 《백두산》 각색)의 작가와 연출가를 비롯한 창조성원들을 당중앙위원회청사로 불러주시고 작품의 내용을 료해하신 다음 사람들의 실생활을 파고들어 진실하고 깊이있게 그릴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나흘후 첫 시연회를 보아주시고는 성과와 부족점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시였다.

특히 인물들의 성격창조에서 정치성과 인간성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데 대한 원칙적인 문제와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전형화하는것이 예술창조에서 근본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이것은 연극예술인인 한진섭의 관점과 립장을 새롭게 정립시켜준 하나의 전환적인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8년 3월 27일 북조선로동당 제2차대회 대표들과 함께 연극 《백두산》을 보아주시고 아주 잘된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작품은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의의를 예술적으로 잘 형상하였다고, 특히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주는 장면을 잘 형상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와 같은 높은 평가와 고무는 한진섭으로 하여금 연극예술의 눈부신 발전에 적은 힘이나마 이바지하고있다는 긍지와 함께 이 성스러운 길에서 자기의 삶을 보람있게 꽃피워갈 신심과 락관을 가지게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한진섭이 출연한 작품들인 《봉화》, 《춘향전》, 《산사람들》을 보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또다시 주시였고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전쟁의 중하를 한몸에 지니신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1951년 9월 1일 연극 《탄광사람들》을 친히 보아주시고 작품이 이룩한 성과와 결함을 지적해주시면서 전형적인것을 보여줄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한진섭은 어버이수령님의 이 교시를 창조실천에 구현하여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사실주의적인 연기의 묘술을 하나하나 터득하게 되였다.

이렇듯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치심속에서 인민이 좋아하고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우리 시대의 참된 배우로 성장할수 있었다.

한진섭의 배우생활과 연기형상에서 최절정을 이룬것은 1968년에 창작공연된 혁명연극 《승리의 기치따라》창조때였다.

이 연극창조에서 한진섭은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의 역을 맡아 수행함으로써 배우로서 누릴수 있는 최고의 절정에 올라서게 되였다.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가 공연의 막을 열게 되자 극장은 매일과 같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의 거룩하신 영상을 뵈옵고싶어 누구라 없이 매일처럼 극장을 찾아왔고 지방에 있는 수많은 근로자들과 인민군군인들, 청년학생들도 먼길을 달려와 극장으로 밀려들군 하였다.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역을 맡아 훌륭히 수행해낸것으로 하여 한진섭은 유명해졌으며 가슴벅차게도 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직접 만나뵙고 가르치심을 받는 최상최대의 영광과 특전을 누릴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69년 5월 30일 이 연극을 보시고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시면서 연극이 385고지전투를 위주로 한 생활을 반영하면서도 아주 폭이 넓게 잘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여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버이수령님의 형상이 보다 더 완벽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 잘못된 세부들을 바로잡아주시였고 385고지전투에서 녹아나 비명을 지르는 미제침략자들의 몰골을 사실그대로 진실하게 보여줄데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한진섭은 위대한 예술의 영재를 모시고 공연을 하는 영광과 더불어 천금보다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은 무한한 감격과 기쁨의 눈물로 옷깃을 적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한진섭의 연기형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에게 최대의 믿음을 주신것은 연극 《승리의 기치따라》를 지도하여주시기 전인 1968년 1월 3일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를 보시고 5형제의 아버지역을 맡은 한진섭이 연기를 잘한다고, 형상이 구수하고 진실하다고 하시면서 그의 연기는 완전무결하다고 말할수 있다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지방순회공연중인 한진섭을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창조사업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비행기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처럼 한진섭은 연극무대는 물론 영화화면을 통해서도 위대한 장군님의 극진한 믿음과 보살피심을 받는 행복한 배우가 되였던것이다.

바로 그 사랑이 있었음으로 하여 그는 영광스럽게도 연극혁명의 첫 포성을 울린 혁명연극 《성황당》창조에 참가하여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쳐 맡은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던것이다.

한진섭은 그때의 그 영광에 대하여 1978년 11월 국립연극단에서 열린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격정에 넘쳐 토론하였다.

《…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한량없는 사랑과 배려에 의하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각색한 혁명연극 〈성황당〉의 지주역을 맡게 된 저의 감격과 흥분은 진정할수 없는 창조적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동지들! 불후의 고전적명작 〈성황당〉을 각색한 혁명연극 〈성황당〉을 무대에 올리는 사업과정은 무엇보다도 우리 집단에 남아있던 서방연극리론과 부르죠아연극리론,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온갖 잔재를 깡그리 털어내고 창작실천을 통하여 당의 주체적문예사상과 리론을 깊이 체득하며 그를 실천해나가는 과정으로 되였습니다.》

그의 이 토론은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이 뿜어내는 진정의 토로였다.

혁명연극창조에서 주역을 맡았다는 긍지와 자부심, 창조적열정이 크다고 하여 그것이 곧 형상적인 성과로 되는것은 아니였다. 모르고 내는 열정이 똑바른 결실을 가져올수 없는것은 당연한 리치였다.

그는 풍자극은 풍자적웃음으로 일관되여야 한다는 낡은 연극관념에 사로잡혀 덮어놓고 웃기는 연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형상이 심화되여감에 따라 그의 연기가 너무 과장되고 신파냄새가 풍긴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78년 6월 14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연극의 첫 시연회를 보아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인물들의 성격은 생활의 론리에 맞게 형상하여야 합니다. 생활의 론리를 떠나서는 웃음도 슬픔도 사색도 진실하게 보여줄수 없습니다.》

이날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로운 혁명연극창조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주역을 맡아 수행한 한진섭이 무대생활을 오래동안 하였기때문에 무대심장이 크겠는데 무대에 등장하는 첫 순간에는 연기가 좀 뜬것 같다고 하시면서 그의 잘못된 연기를 바로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연극을 지도하시면서 풍자극의 세계적이며 고전적인 틀을 완전히 마사버리고 우리 식의 풍자극을 창조할데 대하여 밝히시면서 사실주의적인 풍자극의 본질과 독창적인 극작술에 대하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풍자극이라고 하여 웃음으로 관통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시면서 생활의 론리를 따르는것은 작품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담보라고 가르치시였다.

풍자극도 생활의 론리에 따라 웃음도 있고 사색도 있게 끌고나가야 한다는것이 그이의 천재적인 발견이였다.

한진섭을 비롯한 연극인들은 풍자극양상에 대한 독특한 해명으로 새로운 연극의 극작술원칙을 독창적으로 밝혀주시는 그이의 빛나는 예지앞에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세계연극사를 더듬어보면 고대그리스의 도리아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희극은 2 400년동안 양상에 생활을 억지로 틀어맞추면서 웃음을 조작하는것을 목적으로 삼고 흘러왔다.

그 실례로 문예부흥기의 유명한 대표적희극들인 쉑스피어의 《말괄랭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몰리에르의 《동쥬앙》, 《수전노》, 《따르뜌프(위선자)》 등을 들수 있다.

희극은 자기 발전의 전기간 풍자적인 부정인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야유, 조소, 악의없는 비웃음으로 관통되여야 한다는것이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관례로 굳어져있었다.

그런데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풍자극의 기존틀을 완전히 마스고 《성황당》식혁명연극창조의 새로운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완벽하게 밝혀주시였으니 한진섭을 비롯한 오랜 배우들과 창조성원들의 기쁨과 감격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면서 혁명연극창조에 열정을 기울이고있던 한진섭은 자기가 전혀 다른 배우, 지난날의 연극인과는 대비도 안되는 가장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예술인으로 다시 태여났다는 희열로 하여 힘든줄도 피곤한줄도 몰랐다.

한진섭은 비로소 해방전부터 그리도 바라고바라던, 하고싶던 일로서의 연극배우, 가고싶던 길로서의 연극창조의 길이 바로 백두산위인들의 품에 안겨서야 완전무결하게, 새롭고 긍지높이 성취되였음을 똑똑히 깨달았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이시야말로 모든 예술인들을 가장 참답게 살도록 보살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문학예술의 영명한 스승이시고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이것이 50여년동안 더듬어온 무대생활에서 한진섭이 찾은 인생의 철리, 삶의 진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78년 8월 31일 혁명연극 《성황당》공연을 보아주시고 한진섭을 비롯한 창조성원들과 기념사진도 찍어주시였다.

1982년 4월 혁명영화 《조선의 별》 제6부의 우사령역을 담당한 그에게 관록있는 배우라는 치하의 말씀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1984년 3월에는 혁명연극 《혈분만국회》공연을 보아주시고 한진섭과 창조성원들을 불러 또다시 기념사진을 찍어주시였다.

그리고 1987년 3월 20일에는 그가 연출을 맡아하는 혁명연극 《3인1당》의 창조정형에 대하여 료해하시고 작품을 훌륭히 형상완성해내도록 고무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와 보살피심속에서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역형상을 훌륭하게 창조해냄으로써 우리 나라 연극계의 관록있는 배우로, 온 나라가 다 알고 사랑하는 인민배우로 자라난 한진섭은 우리 로동당시대가 인민의 무대우에 세워놓은 또 하나의 믿음직한 거목이였던것이다.

 

 

누려온 행복, 못다 이룬 소원

 

인민배우 한진섭은 자기의 생일 80돐을 몇달 앞두고 자리에 눕게 되였다.

세상에 태여났다가 누구나 다 겪게 되는 인생의 마지막고비였으나 한진섭의 가슴속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누려온 행복이 너무도 크고 고마워 그것을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한생을 다시 살아 위대한 그 품속에서 보람찬 예술창조의 그 길을 계속 걸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진섭은 머리맡에 놓인 사진첩을 당겨 맨앞에 정중히 모신 위대한 영상을 우러르며 눈물지었다.

1987년 7월 25일 혁명연극 《3인1당》의 시연회를 지도하시기 위해 극장에 나오시였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인민배우 리단과 한진섭을 량옆에 세우시고 찍으신 기념사진이였다.

한생을 빛나게 살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은인을 우러르는 그의 눈앞으로는 눈물을 뿌리며 방랑의 길을 떠난 경기도의 고향땅이며 만주의 거친 풍경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죽어서도 잊지 못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따사로운 손길이 온넋을 감싸안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말이지 위대한 수령의 품, 위대한 령도자의 품에 안기지 못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찌되였을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부풀었다.

위대한 품에 몸을 맡겼기에 그는 적지 않은 나이인 54살에는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에서 준혁의 아버지역을, 년로한 70살나이에도 혁명연극 《성황당》에서 황지주역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에서 서대감역을, 72살에는 혁명연극 《3인1당》의 연출을 담당수행하여 로당익장하는 혁명적예술인의 참모습을 자랑스럽게 과시할수 있었던것이다.

돌이켜보면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 순간부터 한진섭의 걸음걸음은 백두산위인들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자신심과 긍지와 행복으로 충만되여있었다.

특히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돌려주신 사랑과 배려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수 없었다.

어느해인가 예술영화촬영장에서 한진섭을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정히 그의 손을 잡아주시며 요사이 건강은 어떠한가, 목소리가 갈린것을 보니 피곤한 모양인데 쉬여가면서 일하라고 따뜻이 보살펴주시였고 또 언제인가는 그를 만나시고 혈압이 높다는 말을 들었는데 좀 어떤가고, 나이도 많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고문역할이나 하면서 일하라고 다심하게 말씀하시였다.

한진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하셨으면 그가 걸어다니기 힘들어할세라 승용차까지 배려해주시였겠는가.

잊지 못할 사랑의 나날을 더듬으며 사진에 모셔진 자애로운 그이의 영상을 우러르는 한진섭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베개잇을 적시였다.

(아, 그이를 모시고 더 많은 일을 하고싶구나!)

한진섭은 이때처럼 생에 대한 애착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그이를 영원히 우러러모시고 오래오래 배우생활을 하다가 통일된 조국의 광활한 무대를 활보하고싶은 욕망이 못 견디게 솟구치면서 떠나온 고향땅을 밟아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한진섭의 눈앞에는 안해 인화를 데리고 아버지, 어머니, 삼촌과 헤여지던 리별의 그날이 어제일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저려왔다.

그때 안해는 푼푼이 모아두었던 비상금 1 000원을 눈물이 그렁해 서있는 어머니에게 꼭 쥐여주면서 간절히 당부했었다.

《어머니, 아버님이랑 이 돈으로 잡숫고싶은걸 다 잡수시고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안해의 얼굴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였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꼭 그러안아주시면서 《아가야, 내 걱정말고 너희나 부디 잘살아라.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은 꼭 왔다가거라.》 하고 부탁하고는 아들인 한진섭에게 《이젠 내가 마음이 놓인다. 이런 색시를 맞았으니 정말 마음이 놓인다. 부디 잘들 살아야 한다.》 하고 뜨겁게 당부했었다.

그때 한진섭은 《예, 알았어요.》 하고 울먹이며 대답하고는 안해의 손을 잡고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에게 다시한번 깊이 머리숙여 작별인사를 드리였다.

그 다음 나루가로 나가 목선을 타고 인천으로 가서 형님에게 인사를 하고 북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리별로 될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던가. 만나기를 기다리며 애를 태우고 속을 썩이며 수십년, 이제는 어느덧 나이가 80고개에 올라서고있으니 헤여진 혈육들을 만날수 없다는 허전함에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한진섭의 눈에서는 다시금 리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자아내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이것이 어찌 나 하나만의 불행이랴 하는 깨달음에 한진섭은 병석에 누워서도 민족의 고통과 불행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천만에 가깝다는 흩어진 가족을 낳은 이 민족분렬의 비극을 어찌 울분과 통탄만으로야 풀수 있겠는가.

사생결단으로 일어나 온 민족이 힘을 합쳐 통일의 문을 열기 위해 피와 살을 아낌없이 바쳐야 할것이다.

한진섭은 생의 출발지점은 남쪽에 있어도 인간으로서 누려온 진정한 삶은 북에 있는 자기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남이 아니라 북에다 자기의 보금자리를 정한 자신의 운명, 인민의 보호자를 따라 한생을 선택한 자기의 운명에 감사를 보내였다.

(행복했지, 정말… 난 원이 없어. 너무도 영광스러운 삶이였거든. 아, 남쪽의 부모형제가 이 모든것을 다 알수 있다면, 그들의 소식을 알수만 있다면…)

한진섭은 누려온 행복과 풀지 못한 소원이 하나로 엉켜 자아내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자기 한생의 스승이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인민의 사랑을 받던 인민배우 한진섭은 이렇게 한생을 마치였다.

그는 갔으나 위인의 사랑은 계속되였다.

한진섭이 숨을 거둔 날 저녁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국립연극단 한진섭동무가 80돐생일을 두달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는데 참 아쉽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남쪽에서 소년로동을 하다가 류랑하여 연극활동을 한데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뜨거운 사랑을 담아 다음과 같은 은정깊은 말씀을 주시였다.

《그는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참다운 연극예술창조사업에 전념하면서 자기의 재능으로 변함없이 당을 받든 우리의 연극혁명에 한몫한 연극혁명창시자의 한사람이였고 혁명연극활동에 적극 기여한 연극예술의 원로였습니다.

한진섭동무는 내가 영화혁명을 할 때에도 큰 몫을 담당수행했고 자기의 예술적재능으로 변함없이 당을 따라온 관록있는 인민배우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처럼 그의 한생에 대하여 과분한 평가를 주시면서 그의 장의를 잘하도록 하시고 어버이수령님과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였으며 그의 령구를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였다.

또한 그에 대한 부고를 여러 신문과 방송들에 내고 남조선에도 널리 알려진 연극배우인것만큼 대외출판물에도 내여 그가 당의 품속에서 수령님을 따라 변함없이 연극혁명의 길에서 자기 재능을 마음껏 꽃피운 관록있는 연극배우였다는것을 크게 소개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그가 무대배우생활을 50여년간이나 오래하였기때문에 심장이 나쁠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연극배우들이 무대에서 자감상태의 지속연기를 하기때문에 심장질환이 많다고 심려하시면서 연극배우들을 위해 정상적으로 검진도 하게 하고 한증탕을 꾸려주어 심장병에 좋은 한증치료도 하게 하자고 이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진섭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훨씬 넘은 2009년 6월 20일 어느 한 연극작품을 보아주시고서도 한진섭동무가 연기를 잘했다고 다시금 뜨겁게 추억해주시였다.

그리고 2010년 4월 26일 경희극 《산울림》을 보시고서는 매우 만족해하시면서 한진섭, 리단동무들이 보았더라면 몹시 기뻐했을거라고 그에 대하여 또다시 감명깊게 추억하여주시였다.

이처럼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보람차고 행복하게 생을 마친 인민배우 한진섭의 삶의 로정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운명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따를 때만이 가장 보람차고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 후세에 빛날수 있게 된다는 귀중한 진리를 가르쳐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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